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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86화 (86/166)

86화

찰나지만 데니스의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항상 웃기만 하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말을 꺼낸 루스벨라도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역시 그때 잘못 들은 게 아니었구나.’

그리고 데니스의 반응으로 보아 신성력을 끌어다 쓰는 건 그에게 적잖은 해가 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루스벨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엇부터 물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의 몸 일부처럼 자유자재로 쓰던 신성력을 쓰면 왜 아픈지, 어디가 아픈지, 몸 상태가 생각보다 많이 위중한 것인지 등등 많은 질문이 활대를 벗어난 화살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런데, 고작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런 것뿐이었다.

“왜…… 내게 말해 주지 않았어요?”

‘이게 아닌데.’

힐난하는 어조로 물어보려던 것이 아니었다. 걱정이 되었던 것인데. 사람이 아프면 서럽거늘 어째서 그것을 감춰야만 했는지를 물어보려고 했던 것인데.

“내게 말하지 않았던 건, 혹시 내가 못 미더워서였나요?”

루스벨라는 치유사였다. 신성력을 사용하여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쥐꼬리만 한 줄 알았던 치유력은 최근 나날이 늘어 가고 있었다.

데니스는 그것을 두고 각성의 조짐이 보인다고 알려 줬다.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이니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며.

‘그 말에 얼마나 기뻐했는데.’

강해지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 그토록 갈구했던 인정을 얻었다는 느낌이 루스벨라를 충만하게 만들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숨긴 건가요.”

“그건…… 그것만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루스벨라.”

데니스는 눈을 질끈 감고 답했다.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그의 인상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루스벨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나를 믿지 않는 걸까.’

그들의 복수와 관련된 그 어떤 일이건 간에 데니스는 자발적으로 그가 접한 정보 일체를 루스벨라와 공유했다.

그런 데니스가 좋았다. 먼저 알려 주는 것이 고마웠고, 루스벨라도 가감없이 그를 믿고 힘을 기르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주어진 편안한 감각. 이 사람은 내 사람이라는 안온함.

‘그랬는데…….’

“그렇다면 알릴 수 없는 이유라도 알려 주세요.”

그가 그녀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생겼다는 게, 그게 하필이면 그의 몸을 깎아 먹는 유의 것이라는 게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당신이 걱정할 게 뻔하니까요. 지금도 해야 할 일이 많은 당신인데, 내 몸 상태에 대한 짐까지 지우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건 짐이 아니에요. 데니스도 내가 아픈 걸 숨긴다면, 그 이유가 당신에게 내가 짐 덩어리로 느껴질까 두려워 그런 거라면, 네, 알겠어요 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건…… 아니요.”

대답이 빨랐다. 망설이지도 않았다. 루스벨라는 잠시 이 남자가 역지사지로 봤을 때는 잘 알면서 왜 그렇게 똥고집을 부리나 싶었다.

“잘 알면서 왜 그래요?”

“미안해요. 하지만 이것만큼은 절대 말할 수 없어요.”

데니스는 비지땀이라도 흘릴 것 같았다. 루스벨라가 매섭게 추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그를 걱정한다는 것이 전해져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언제 그녀가 들은 거지? 젠장.’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행한 결정이었다. 그의 희생은 그 혼자만 알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까지 했다고 뻐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곤란해졌구나. 완전히 궁지에 몰린 쥐 신세야. 네가 딱한 꼴을 다 보다니.]

‘이게 재밌으십니까? 관전만 하지 말고 좀 도와주시죠.’

이때를 놓치지 않고 신의 파편이 데니스에게 깐죽거렸다. 데니스는 곤란함에 여태 안 해 보던 도움 요청을 해 봤지만, 신의 파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네가 알아서 해결하거라. 네 업보니까.]

‘이런 망할.’

[어허. 상스러운 말은 자제해야지.]

말을 말아야지. 데니스는 신의 파편의 도움은 포기하고 루스벨라의 짙은 초록빛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미리 말하지만 당신을 믿지 못해서는 절대 아닙니다. 이건 그저…… 제 이기심 때문이죠.”

“무슨 이기심이요. 사람이 아픈 걸 감춰야 할 정도의 일이 대체 무슨 이기심이란 말이에요.”

‘말해야 할까?’

루스벨라의 태도는 강경했다. 그녀는 데니스가 예상했던 대로 그가 고통받는 것에 예민했다. 그녀는 다정한 사람이었으니까. 정을 준 사람이 괴로워하는 것을 두고 볼 성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절반의 진실을 내놓기로 했다.

“신성력을 끌어다 쓰면 제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맞습니다.”

“정확히 어디가 아픈 거죠?”

“큰 무리가 가는 건 아닙니다. 이 힘은 본디 제 것이 아니라 계약을 통해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에, 제약이 붙는 거죠.”

데니스가 옅게 웃었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짓는 표정이었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니까. 날카로운 비수에 심장이 꿰뚫어지는 아픔이었지만 참았다.

“저는 본래 신성력을 가지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신성력은 신의 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선택받은 이들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힘입니다.”

아벨은 그 선을 넘었지만, 보통의 인간이라면 선천적이지 않은 이상 신성력을 쓸 수 없었다. 데니스도 마찬가지였다.

신성력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벨처럼 남의 신성력을 갈취하는 것. 다른 하나는 데니스처럼 신과 계약하여 잠시 그 힘을 빌리는 것.

전자는 아무런 페널티 없이 힘을 사용할 수 있지만, 후자는 아니었다. 감히 신의 힘을 빌리는 인간이 치러야 할 대가였다.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인간에게는 성력석이 심장에 붙어 있다. 제2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인간은 성력석이 없으니 평범한 심장으로 신성력을 쓰면서 가해지는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만 했다.

그 고통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생명력의 원천인 심장에 무리가 가는 만큼, 오래 사용할수록 데니스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데니스 데벤테르는 가장 적절한 시기에 그 자신이 죽기를 바랐다. 죽더라도 루스벨라의 목숨이 더는 위협받지 않는, 안전한 상태가 될 때까지만 살아 있고 싶었다.

‘그걸 말할 수는 없지.’

말하게 되면, 루스벨라는 신성력을 다루는 법을 그만둘 것이다. 그녀가 살고 싶다고 해서 그를 죽게 놔둘 사람이 못 되었으니까.

“어서 가. 빨리!”

“살고 싶다는 거 다 아니까, 기회가 있을 때 도망가!”

진실을 모두 터놓게 된다면, 그녀는 또다시 희생양의 삶을 택할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었다.

‘루스벨라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빚을 졌어.’

데니스는 그 빚을 마땅히 갚아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녀를…… 마음에 품기 이전에도 그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알려 줬어야죠.”

“당신에게 괜한 걱정거리를 주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미안해요.”

“당신을 타박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도 당신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어요. 데니스.”

루스벨라의 굳었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절반의 진실을 액면 그대로 믿은 것 같았다. 데니스는 안도했다. 그녀가 당연히 해야만 하는 그의 이기적인 희생을 알아줄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요, 그럼. 당신의 말을 믿을게요.”

“고마워요.”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해요. 날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면, 말해 줘요.”

“아…….”

“함께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는 게 내게는 더 마음 편한 길이에요. 알았어요?”

“네. 알겠어요. 명심할게요.”

데니스는 속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루스벨라는 확답을 받았어도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데니스가 처음 보는 표정이라 신기해하고 있는데, 불쑥 그녀의 손이 그의 뺨에 닿았다.

‘어어…….’

작고 연약한 손, 그러나 누구보다 강한 사람의 손이 뺨에 닿자 데니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프지 말아요.”

당신이 아프게 된다면, 내가 치유할 수 없는 선을 넘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울 것 같으니까.

뺨을 매만지는 손길은 섬세했다. 데니스는 어쩐지 제 얼굴이 너무 익어서 터질 것 같은 토마토처럼 벌겋게 달아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부정할 수 없겠구나.’

데니스 데벤테르는 루스벨라 지펠론을 사랑하고 있었다. 희생에는 인정을 바라지 않았으면서, 염치없게도 그는 그녀의 마음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무치게 부끄러우면서도 황홀했다. 그 자신만이 알 모순을 삼키며 데니스는 루스벨라의 손을 잡고 입맞춤했다.

“건강할게요. 당신에게 감추는 것도 이제는 없어요. 정말.”

“……그래요.”

“공방으로 갈 거죠? 데려다줄까요?”

“아니에요. 수고로움을 끼칠 수야 없죠. 당신이 붙여 준 호위들을 뚫고 올 무뢰한도 없을 거고요.”

다녀올게요.

루스벨라는 마차에 몸을 싣고 공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배웅해 주던 데니스가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루스벨라는 알았다. 그녀가 데니스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댄 이유는 그를 진찰하기 위해서였다.

몇 초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훈련을 통해 늘어난 그녀의 역량은 충분히 그 시간 동안 그의 신체 상태를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결과는, 나빴다.

“내게 거짓말을 한 이유가 뭐예요, 데니스…….”

데니스의 몸 상태는 매우 좋지 못했다. 그의 심장은 쥐어짜인 걸레처럼 너덜너덜했다. 확장된 감각으로 느껴지는 생명력은 폭풍우가 지나간 밀밭처럼 엉망으로 할퀴어져 있었다.

어쩌면, 그가…… 그녀보다 더 빨리 죽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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