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구구절절한 미사여구가 붙은 서신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황제가 범인을 잡았으니, 윈체스터 공작가와 데벤테르 후작가는 모두 노여움을 풀라고. 윈블 자작가에는 유감을 전했다.
“범인이, 잡혔다고?”
황급히 루스벨라가 그다음 줄을 읽었지만, 이내 실망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진짜 범인을 잡은 게 아니로군요.”
“범인으로 붙잡힌 게 누구랍니까?”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변방의 귀족이에요.”
뜬금없이 나타난 변방의 귀족이 자수를 했다니, 뒤가 몹시 구렸다. 범행 동기나 살해 방식 또한 믿을 수 없었다.
“윈블 영애를 남몰래 사모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사술을 사용하여 그녀를 죽였다니.”
“아무도 믿지 않을 소리죠.”
명색이 제국의 귀족이란 자가 이교도의 사술을 써 사람을 해쳤다는 일은 중죄에 해당했다.
‘하지만 살해 방식이 문제가 아니야. 살해 동기가 말이 안 된다는 거지.’
아슈라 윈블은 루스벨라가 아슬란의 약혼자일 시절, 그녀를 모함할 정도로 아슬란에 대한 집착이 깊었다.
애달픈 외사랑으로 포장된 윈블 영애의 사연은 사교계에 퍼졌고, 신붓감을 구하는 남성 귀족들은 자연히 그녀를 피했다.
혹시 알아? 윈블 영애가 윈체스터 공작부인이 될 수 있을지. 그런 생각으로 그녀 곁에 아첨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몰라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자는 어떻게 된답니까?”
“사형이죠. 사람을 죽였다고 했으니까요.”
당연한 결과였지만 이와 같은 판결을 납득할 사람은 황제밖에 없었다.
‘협박이든, 매수든 뭔가를 했겠지. 그러지 않고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죄인 자리를 곱게 받아들일 수는 없어.’
또다시 이의를 제기하기엔 힘들 것이다. 믿지 못하겠어도 황제가 작정하고 거짓 증거와 죄인을 만들어 놓았으니, 자백한 인물을 찾아가더라도 이미 자살한 것처럼 꾸며져 있을지도 몰랐다.
‘예상한 일이지만 정말 씁쓸하네.’
루스벨라는 처음으로 아슈라 윈블이 불쌍해졌다. 그녀를 죽인 것은 심증상 에덴이었으나, 그것을 밝힐 물증도, 여건도 되지 않아 유야무야되는 상황이었다.
“북부는, 윈블 자작 부부 측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처음과 달리 윈블 자작 부부는 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혀 달라며 열성적으로 황실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있었다.
루스벨라의 말에 데니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입궁은커녕, 결과 보고서만 받고 돌아가야 했다고 하더군요. 참담함을 이기지 못했는지 윈블 자작 부인은 혼절했다고 하고요.”
“……윈체스터 공작은, 뭐라고 하던가요?”
머뭇거리며 던진 말에 데니스도 잠시 침묵했다. 아슬란 윈체스터는 루스벨라나 데니스에게 있어 좋을 것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현 상황에서는 힘을 보태 줄 패였으므로.
“재조사를 진행한 조사관이나 부검의를 만나려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들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더 이상의 번복은 없다고 못을 박았고요.”
그로 인해 북부 측의 사람들은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이를 달래기 위해 살해범으로 판결 난 자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라 발표가 났지만, 분위기는 살벌해져 갔다.
‘이미 말이 새어 나가고 있겠지.’
피해자의 가족도, 북부의 우두머리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결과가 나왔으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가능하면 이것으로 일을 마무리 짓고자 하시는 것 같지만, 그렇게 둘 수야 있나요.”
“이야기를 퍼뜨리고 있군요?”
“맞아요. 알아야 할 권리를 앞세워 당신에 대한 기사를 멋대로 내보내던 신문사들을 난 잊지 않았거든요.”
아슈라 윈블의 죽음을 루스벨라와 엮으려는 기사는 제법 수가 많았다. 겁도 없이. 귀족에 대한 추측성 기사를 쏟아 내는 것은 명예 훼손으로 죄를 물어도 모자란 것을.
‘하지만 황실에서는 신문사들을 향해 제재를 가하지 않았어.’
제재는 무슨, 방치를 했다. 목줄이 풀린 양치기 개들처럼 겁 없이 풀리는 기사들을 보며 데니스도, 루스벨라도 이를 갈았다.
“당한 건 돌려줘야지요. 상대방도 얼마나 그게 치졸한 짓인지를 깨달아야 하니까요.”
데벤테르 후작가가 가진 거대한 상단. 그것을 이용해 상단에서 물건을 사 가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뿌리고, 상단으로 창출된 부를 똑같이 신문사에 대가로 주고 사람들에게 사건의 부당함을 알렸다.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었다.
“타당한 말이에요. 아무래도 성력 증진제의 생산 속도를 높이는 게 좋겠어요. 세레나에게는 미안하지만…….”
“세레나가 야근하게 된다면 제가 야근 수당을 톡톡히 쳐줄게요.”
“그래 주면 고맙죠.”
루스벨라는 황제의 서신을 구겼다. 우그러진 종이를 쥐고 벽난로를 쳐다봤다. 계절은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하고 있었다. 벽난로에는 굳이 불을 피우지 않았기에 비상용으로 가져다 놓은 마른 장작과 성냥개비가 있었다.
“밖에 누구 있나?”
“네. 마님. 부르셨나요?”
한 시녀가 달려왔다. 루스벨라는 벽난로 속을 가리키며 말했다.
“장작에 불을 붙여 주렴.”
“이 계절에요? 더우실 텐데…….”
“그런 것은 괜찮으니, 어서.”
“예에.”
시녀는 금방 벽난로에 이글거리는 불꽃을 피워 냈다. 루스벨라는 화염 속으로 황제가 보낸 서신을 던졌다. 서신은 금세 형체를 잃고 재로 사라졌다.
‘한번 해 보자는 거지.’
황제도, 에덴도 죽음의 공포보다는 무섭지 않았다. 그들을 이겨 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몸을 단련하는 것만 해도 바쁠 시간에 두려움은 용납할 수 없었다.
또한 살아남기를 위해서라면 사적인 감정은 잠시 꾹 눌러 두어야 했다.
‘이미 버리기로 한 감정이잖아.’
지나간 것에 연연하지 말자. 루스벨라는 그리 다짐했다.
“데니스, 윈체스터 공작에게서 온 서신을 주세요.”
“……알고 있었어요?”
“무슨 소리예요. 발견해 주길 바란 사람처럼 티 나게 주머니에 꽂아 넣고 온 걸 봤는데.”
루스벨라가 후후 웃었다. 데니스는 멋쩍은지 두 눈을 아래로 깔고 바닥을 배회했다.
‘그녀에게 말해 주어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데니스가 접하는 모든 것을 루스벨라에게 솔직히 밝혀도 이건 망설여졌다. ‘그’ 아슬란 윈체스터가 보낸 협력 제안서였다.
[데벤테르 후작부인, 그대의 도움을 필요로 하오. 내 피를 이용하여 삿된 자들의 술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소.]
[치유사이자 이 사건에 연관되어 있는 그대라면 능히 가능할 것이라 여기고 있소. 부탁하오.]
루스벨라의 연금술사로서의 재능이 절실한 상황임을 피력하며 보낸 서신은 정중하고 겸손하기 짝이 없는 문장으로 채워져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굽힌 것처럼 쓰여 있는 것이 웬만해서는 거절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대가 필요해.]
……그 문구가 가장 거슬려서 그랬을 것이다. 한 번 버린 사람에게 뒤늦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는 모양새라니.
데니스의 심장이 불안함으로 덜걱거렸다. 아니, 이 떨림이 고작 불안하다는 감정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야. 그런 이유만이 아니야.’
아슬란 윈체스터가 변했다. 데니스가 기억을 되돌려 주기 이전에도 아슬란은 루스벨라에게 미련이 남은 것처럼 굴었다. 스스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속이 빤히 보였다.
그런데 그가 ‘기억’을 찾은 이후로는 루스벨라의 발치에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모든 것을 내놓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데니스 그 자신처럼.
‘루스벨라를 위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다고 아슬란이 말한다면…….’
나는 그녀에게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심장이 욱신거렸다. 아팠다. 데니스는 잠시 숨을 헐떡였다. 가슴팍의 통증은 그가 어떻게 그녀의 옆에 서 있게 되었는지, 그의 본분은 무엇인지 잊지 말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이봐. 계약자. 괜찮나?]
‘괜찮습니다.’
“……데니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의원을 부를까요?”
“아니에요. 루스벨라. 그냥, 속이 조금 답답해서.”
[속이 보통 답답한 게 아닌 것 같은데? 계약자, 너, 지금 질투하는 것 아니냐?]
……질투라고?
그가 감히 그런 보들보들한 감정을 품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제가……!”
“네?”
“아…….”
[바보 녀석.]
데니스는 크게 당황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생각이 아니라 입 밖으로 말을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는 황급히 입을 제 손으로 틀어막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데니스……. 많이 안 좋아요? 왜, 왜 그래요.”
“아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루스벨라. 당신에게 하려던 말이 아니었어요. 맹세코, 아닙니다.”
[평소 하지도 않던 실수까지 하면서, 아니라고? 너 자신의 마음을 똑바로 봐라. 더는 외면하지 말고.]
‘닥치십시오, 파편 주제에.’
[흥. 나는 진실을 말했거늘, 내 입을 막는다고 네가 그녀에게 가진 감정이 덮어지겠더냐? 사랑이라는 것이, 감춘다고 사라질 수 있는 감정이더냐?]
‘입 다물어요. 제발.’
데니스는 그의 안에 있는 신의 파편에 숫제 애원까지 했다. 하지만 질투가, 사랑이, 그가 가져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한 이름을 가진 감정이 심장의 고동을 더욱 빠르게 부채질했다.
“나는 괜찮아요. 어서 읽어 봐요.”
데니스는 익숙한 고통 뒤로 덮쳐 오는 죄책감을 이 악물고 삼켰다. 루스벨라에게는 환한 미소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는 그녀에게 한없이 무결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으니까.
그녀는 과거의 그에게 그런 존재였으니까.
“혹시……. 데니스. 나에게 무언가 숨긴 것은 없어요?”
“네?”
그녀가 무엇을 알아챈 것일까. 어느 쪽의 고통을 눈치챈 것인가.
“전에 데니스가 말하던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요. 누구와 대화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신성력을 끌어다 쓸수록 아프다는 걸 들었어요.”
몰래 들으려는 것은 아니었다고 루스벨라가 덧붙인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들켰다.’
오직 그 생각만이 하얗게 변한 머릿속에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