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알렉, 자네가 고생이 많았다 들었어.”
“아휴, 뭘요. 아벨 님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고생은 당연히 감수했어야 하는 일인걸요.”
세비어는 들어서자마자 알렉의 노고를 치하했다. 알렉은 하하 웃으며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술술 거짓말을 자아냈다.
“고문을 받을 뻔했다고.”
세비어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알렉을 쳐다봤다. 몸 이곳저곳에 시선이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상해를 입었는지 관찰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모르는 감시역을 딸려 보낸 인간이 걱정하는 척을 해?’
여차하면 죽이려는 생각이었을 수도 있었다. 알렉은 좋은 사람인 척 포장하려는 세비어가 가증스러웠지만, 장로의 마음 씀씀이에 진심으로 탄복했다는 것처럼 눈물을 글썽였다.
“하마터면 아벨 님의 축복도 받지 못하는 곳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할 뻔했죠.”
아예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곳은 에덴의 본거지였지만, 집이 그립다는 설움을 눈물로 쥐어짜 콕콕 문지르니 그럴듯했다.
“이제야 장로님께서 그토록 아벨 님의 축복을 원하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자네가?”
“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걸 몸으로 체험해 보니까…… 정말 그분의 기적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흠, 커흠. 계속해 보게.”
‘아부는 어디를 가나 듣기 좋은가 보네.’
알렉은 이미 에덴에 정나미가 떨어지다 못해 욕을 퍼붓고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마음에 있지도 않은 말을 줄줄 읊었다.
“그래서 저도 장로님처럼 아벨 님을 가까이서 모시는 측근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거짓된 간절함을 담아 알렉이 세비어에게 물었다. 세비어는 싹싹하고 예의 바르게 구는 알렉을 내심 좋게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질문에 흔쾌히 답했다.
“그거야 아무래도 아벨 님의 신임을 얻는 게 최우선이지. 아벨 님의 눈 밖에 나는 순간, 장로라도 예외는 없거든.”
‘아하.’
요컨대 명확한 기준이 없단 소리잖아?
알렉은 혀를 찼다. 이 광신도 집단이 똑바로 굴러갈 거란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지만, 그래도 제국의 탄생과 함께한 역사가 있으니 침투하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가장 핵심 인물이자 우두머리인 아벨의 마음대로 굴러가는 곳이라니.’
그 말은 에덴은 아벨만 사라진다면 우르르 무너질 허상과도 같다는 말이었다.
‘오래 고여 썩은 물과 같은 곳이라면 일이 조금 더 쉽게 끝날지도…….’
그게 알렉이 가장 원하는 바였으나 속셈을 깊숙이 묻어 두고 세비어에게 더 달라붙어 질문했다.
“그렇다면…… 저도 아벨 님께 인정받아 ‘신의 축복’을 하사받을 수 있게 될까요?”
꿈틀.
“……아마도 그러겠지.”
‘이것 봐라?’
미묘한 움직임이었으나 알렉은 분명 보았다. 불쾌함으로 찌푸려질 뻔한 세비어의 눈가를.
‘신의 축복’은 푸른 성력석의 부스러기로, 아벨이 최측근에게만 내려 주는 신뢰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젊은 외관이지만 그건 아벨의 힘 때문이지. 한순간 젊음을 유지해 주는 힘을 풀자마자 다 늙은 할아버지가 된 것으로 봐서는 절대 모신 세월이 짧지 않을 텐데.’
그런 세비어가 ‘신의 축복’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 것을 보면 그는 축복 부스러기를 구경도 못 한 것 같았다.
“세비어 장로님께서는 아벨 님이 자주 찾으실 정도로 충직하신 분이시니, 당연히 축복을 손에 넣으셨겠죠?”
알렉은 이때다 싶어 줄곧 장착하고 있던 눈치를 내다 버리고 세비어 장로의 아픈 곳을 쿡쿡 찔렀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이지, 악의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가장하니 세비어의 안색이 썩어 들어갔다.
“……딱 한 번 받았네.”
한 번. 한 번이라.
‘어쨌든 받았다는 소리지.’
세비어는 에덴에 가짜 신성력 증진제를 퍼져 나가게 할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알렉은 세 치 혀를 조금 더 부지런히 놀렸다.
“세상에. 왜요? 세비어 장로님이 얼마나 노력하시고 아벨 님을 위하시는 분인데도요?”
“크흠, 그건 그렇지.”
‘좋아하기는…….’
아벨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영생에 대한 갈망 때문에 충성하는 거면서.
세비어가 쑥스러워하면서도 칭찬에 기뻐하자 알렉은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동시에 그가 불쌍했다. 아벨이라는 괴물에 인정을 받기를 원하는 모습이 우스웠으므로.
‘그런다고 해서 그 괴물이 장로, 당신을 아끼고 있을 리가 없잖아.’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모인 곳에서 인정을 바라다니, 그것만큼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알렉은 세비어의 이런 무른 점이 아벨로부터 신의 축복 운운하는 부스러기를 적게 받게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무른 점을 기꺼이 파고들기로 결정했다.
‘난 내가 제일 중요하니까.’
이깟 광신도 집단에 내줄 정 따위는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고용주인 데니스가 에덴을 박살 내 주길 원했다.
“세비어 장로님께서 많이 서운하실 만도 하시네요. 불철주야 아벨 님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신데…… 그 공로도 인정받지 못하다니요.”
“……언젠가 아벨 님께서 내 진심을 알아주실 것이라 생각하네.”
“물론 그러시겠죠. 아벨 님께서는 우리를 굽어살피시는 신이시잖아요?”
신께서 저희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실 테니까요.
알렉은 입으로 세비어가 듣기 좋을 말을 하면서 술병 하나를 들고 와 자연스럽게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 데벤테르 후작저에서 가져온 가짜 성력 증진제를 그 속에 섞었다.
“그건 뭔가?”
“아, 도망치던 중에 데벤테르 후작저에서 훔쳐 온 것입니다. 사치재와 함께 있길래 꽤나 값나가는 것이라 생각해서 가져왔지요.”
알렉이 과장된 태도로 포션 병 표면을 툭툭 치면서 웃었다.
“용케 도주하는 중에도 그런 것을 훔칠 여유가 있었나?”
“후작이 괘씸해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데벤테르 후작 가문이 가진 부에 비하면 티도 안 날 물건이지만, 그래도 분풀이를 하고 싶었습니다.”
‘미안합니다. 고용주님! 잠깐만 뒷담 좀 까겠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통신구도 꺼 놨기 때문에 데니스가 이 대화를 들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알렉은 데니스에게 사과의 말을 머릿속으로 날리고 세비어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호오. 황금빛이 은은하게 도는 것이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군.”
“그렇지요? 가져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얼른…… 얼른 마셔라.’
무슨 사제라는 놈이 술을 권하는 걸 거절하지도 않고 입맛부터 다신대.
‘진짜 싫다. 아주 썩어 빠졌구만…….’
바깥, 신전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진짜 신성력도 아닌 마력을 수련하며 검소한 생활을 살아가는 사제들을 생각하면 열불이 치솟았다. 알렉 그 자신은 사제의 길을 걷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왠지 모를 동지애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그럼, 거절하지 않고 마셔 보겠네.”
‘됐다!’
“감사합니다. 아벨 님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알렉은 자신은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비어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알렉의 손에도 잔을 쥐여 주었다.
“자네도 마시지 그러나. 혼자 마시기에는 영 적적해서.”
“제가 어떻게 장로님과 같이 마실 수 있겠습니까.”
한사코 거절하려는 알렉에게 기어이 세비어는 술을 따라 주고서 건배를 했다.
“아벨 님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알렉은 있는 뜸을 다 들이고서야 세비어와 같은 내용물의 술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목 너머로 술 삼키는 소리가 어찌나 선명하던지. 알렉은 긴장으로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크으. 맛이 좋은걸? 역시 고위 귀족들이 마시는 건 다르다, 이건가.”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네.’
알렉의 신경은 온통 효과가 잘 들었을지에 대해서만 쏠려 있었다. 그러나 당장 일어나는 뚜렷한 변화는 없었다.
‘실패……인가?’
루스벨라의 포션 제조 레시피가 실패했을 가능성을 고려하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위풍당당하던 알렉의 자존심이 푹 찌그러들었다.
‘우선 자리를 피해야겠어.’
혹시라도 부작용이 나타난다면 알렉의 탓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저, 장로님. 피로에 찌든 몸이 좋지 않아 혼자 있고 싶은데, 죄송하지만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으실까요?”
“어려운 것도 아니지. 내 정신 좀 보게. 정신없었을 테니 어서 쉬게.”
“감사합니다.”
세비어는 남은 술병과 잔을 집어 들고 방을 나섰다. 술맛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술을 좋아했는지는 몰라도 자작의 시간을 가질 모양이었다.
“아고, 난 모르겠다. 일단 할 만큼 한 거 아닌가?”
미끼는 늘어뜨렸다. 남은 것은 성력석 부스러기를 가진 세비어 장로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월척이냐 쪽박이냐를 가를 수 있었다.
“후작부인의 포션이 효과를 잘 보여야 할 텐데.”
알렉은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룰 것 같다고 투덜거렸다. 푹신한 이불을 끌어다 둘둘 싸매면서 설마 내일 아침 끌려가는 건 아닌가 하며 불안에 떨기도 했다.
하지만 알렉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알렉의 방에서 빠져나온 세비어는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 다다르자 재빨리 뜀박질해 자기 소유의 방에 들어갔다.
‘뭐지?’
무언가 이상했다. 아벨에게 나눠 받은 성력석의 힘이, 술을 마시는 순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느꼈다.
“축, 축복. 신의 축복이 어디 있더라.”
다급한 손길로 숨겨 둔 옷 주머니에 고이 보관해 두었던 성력석 부스러기를 꺼내자 번쩍거리는 광채가 방 안을 밝혔다.
“이게 대체……?”
맑고 투명하게 빛나던 푸른빛은 몇 초 후에 사라졌으나, 여전히 힘의 증가량은 느낄 수 있었다. 세비어는 어안이 벙벙해져 부스러기를 움켜쥐고 이 뜻하지 않은 행운에 넋을 놓았다.
‘설마 아까 먹은 술 때문에?’
의심이 가는 것은 그것이었다. 알렉이 가져왔던 아름다운 황금빛 음료. 다른 때와 비교해 보면 그것만이 달랐다.
“아벨 님께 보고를 해야…… 할까?”
아벨의 경고가 떠올랐다. 알렉을 조심하라고 지시하는 것 같기는 했었다.
그렇지만 우연히 훔친 물건으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알렉도 상상하지 못했을 터.
‘이건 기회야.’
장로는 넷. 그중에서도 세비어는 가장 미약한 입지를 지닌 장로였다. 힘에 대한 욕망이 그의 욕심을 부추겼다.
“조금만 더 알아보고…… 그때 말씀드려도 늦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아벨 님은 강하시니까. 설령 문제가 생긴다 한들, 금방 해결하실 수 있을 테니까.
알렉의 선택은 옳았다.
그는 에덴에 들이지 말아야 할 선악과를 무사히 들이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