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81화 (81/166)
  • 81화

    “알렉이 무사히 돌아왔다며?”

    아벨이 손끝으로 강아지풀을 흔들었다. 그의 앞에는 한 마리 강아지가 헥헥거리며 배를 까고 누워 있었다.

    개의 털 빛깔은 아벨의 머리 색과 같은 흰색이어서,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어린아이가 강아지와 잘 놀고 있구나, 하고 흐뭇해할 광경이었다.

    “예. 목표하던 분탕질까지는 아니었더라도, 데벤테르 후작에게 불쾌감을 주려던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더군요.”

    “소기의 목적이라…….”

    나풀나풀 흔들리던 강아지풀의 움직임이 멈췄다. 애교를 부리던 강아지도 마찬가지였다. 세비어 장로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내 기분을 풀어 주려고 한 일이라면 맞기는 하지. 일시적으로는 말이야.”

    강아지풀이 푸르게 타올랐다. 아벨은 그것을 아무 데나 던졌고, 강아지풀은 굉음을 내며 바닥을 움푹 팼다.

    끼이잉. 끼잉. 강아지는 몸을 덜덜 떨면서 신음 소리만 내며 울었다. 세비어는 침묵했다.

    “근본적으로는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잖아.”

    세비어는 뭐라 올릴 말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선은 거기까지였으니까.

    ‘데벤테르 후작 가문이 함부로 건들 수 있는 가문도 아니고.’

    북방의 윈체스터 공작가만큼이나 남부의 실세인 데벤테르 후작 가문은 강대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막대한 상권을 바탕으로 거느린 휘하 귀족만 몇인지.

    ‘가주인 후작이 작위를 이어받은 지 얼마 안 된 지금이 가장 습격하기 좋은 적기라지만.’

    데니스 데벤테르는 달랐다. 갖춘 무력도 상당하거니와, 그들이 목표로 하는 루스벨라 곁의 호위도 철저히 갖춰 놓고 있었기에 영 접근하기 까다로웠다.

    자칫하면 신전 측의 술수만 보여 주고 인력은 죽어 나가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벨 님. 부족한 신도의 최선이 이것이었음을 용서해주십시오.”

    “용서?”

    아벨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세비어는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노력했다. 아벨은 변덕스럽다. 그리고 세비어는 줄어드는 신전의 수입을 보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데벤테르 후작 가문의 괘씸함은 잘 압니다. 하지만 이 세비어, 아벨 님과 에덴을 지키기 위한 선택지를 골랐습니다.”

    세비어가 무릎을 꿇었다. 세비어는 젊은 외양이었지만 아벨을 모신 지 꽤 되었고, 그래서 그가 어느 지점에서 사람을 봐줄지도 알았다.

    “그 장사치 귀족 놈이 교단의 돈줄이라도 졸라매든?”

    “……예. 그러합니다.”

    “흐음. 본격적으로 훼방질인가. 그 애송이가 하룻강아지는 아닌 모양이야.”

    아벨이 강아지의 코를 툭툭 두드렸다. 당장 사나운 기세는 없앴어도 강아지는 아벨의 앞에서 숨을 죽이고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일까?”

    끼이잉. 강아지가 애처롭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흰 털 뭉치가 허공에서 바둥거렸다. 아벨은 그것을 보며 웃고 있었다.

    세비어는 아벨이 살육을 저지르는 데 머뭇거리지 않는 냉혹한 사람임을 알았다. 아벨의 분노는 강아지가 아니라 데니스를 향해 있었다.

    “그렇지만 그만한 귀족을 죽이려면 위험이 많이 따르겠지?”

    “예.”

    “그러니 너 또한 이번 일을 미적지근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겠지.”

    “네. 그래도 알렉이 그자의 심기를 흐트러뜨리는 데는 성공한 것 같더군요.”

    “내 화풀이를 해 줄 만큼은 하고 왔대?”

    “……감시역으로 딸려 보낸 자들에 의하면 후작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세비어는 보고받은 바를 순화하여 아벨에게 전달했다. 차마 데니스가 자신이 이렇게 잘났으니 저놈 말고 나를 선택해 달라고 했다는 말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원래도 금 간 찻잔이라고 불리던데 이번 일로 쨍강, 하고 깨져 버리기라도 하면 좋겠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목소리가 유하게 풀리셨다.’

    세비어는 안도했다. 적어도 아벨이 또 벽을 때려 부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데, 방비를 철저히 하는 놈인데 어떻게 알렉은 무사히 빠져나왔네?”

    “고생을 좀 했더군요. 붙잡아서 고문하려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저런. 입은 나불거리지 않았고?”

    “예.”

    에덴에 대한 정보를 발설했다면 모가지가 날아가는 것으로는 용서가 되지 않을 일이었다. 세비어는 아벨이 배신자를 용납하지 않는 성정임을 잘 알고 있었다.

    ‘정보를 누설했다면 데벤테르 후작, 그자가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지.’

    데니스 데벤테르는 신전에 적대적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신전에 내던 헌금을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모두 거둔 것을 보면 필시 원한이 있으리라 짐작되었다.

    ‘차라리 그냥 욕심 많은 장사치라면 좋겠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신전과 척지는 것을 선택한 멍청이였다면 진즉 선대 후작이나 이복형제들에게 제거당했을 것이다.

    독을 품은 채 몸을 낮춰 때를 기다리는 뱀 새끼를 본 것 같아 세비어는 불안했다. 아벨이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찜찜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알렉의 몸이 좀 상했다지만, 자백제를 투여한 흔적도 없었으니 별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감시역으로 보낸 이들의 진술 또한 그러하고요.”

    “흐음, 그래? 운이 좋네. 나라면 그 녀석을 붙들고 아는 것, 모르는 것 모두 불 때까지 탈탈 털었을 텐데.”

    아벨의 검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세비어는 그 흉포한 시선에 잠시 몸을 떨었다.

    “……알렉을 의심하십니까?”

    “나는 아무도 믿지 않으니까. 예전에 한 번 배신당한 적도 있었고. 유한한 것들의 말은 언젠가 깨지게 되어 있거든.”

    “…….”

    세비어는 아벨이 자신도 믿지 않는 것에 조금 서운했지만, 그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종이 감히 주인에게 애정을 구걸할 수는 없는 법이었기에.

    “그래도 알렉이 목숨을 걸었다는 점은 알아주십시오.”

    “옹호하려는 거야? 네가 추천한 사람이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랜만에 들어온 신입 사제를 내치기엔 영 아깝다 보니.”

    “사람이야 금방 자라고 번식하기를 반복하는데, 아쉬울 게 뭐가 있나.”

    불로불사를 누리고 있는 아벨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지독히도 오만한 발언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꿈틀댈 만도 하건만, 세비어는 잠자코 아벨의 말을 들었다.

    그에게 아벨의 말이 곧 신의 말씀이었기에.

    “아벨 님의 오래된 소망을 곧 이루실 때가 아닙니까. 쓸 만한 인력은 있을수록 좋지요.”

    신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은 신도의 바람에 아벨은 고개를 기울였다.

    “알렉이 너처럼 나를 따르지 않는데도? 그래도 괜찮겠어?”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됐어. 설명하려면 입 아파. 제때 잡초를 뽑아내야 하는 일도 수하로서의 덕목이니까.”

    아벨은 의뭉스러운 말을 남기고 다시 강아지를 바라봤다. 강아지는 살기가 줄어들자 겨우 살 것 같다는 듯이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거슬리면 나중에 한꺼번에 죽이면 되는 거니까.”

    깨갱. 한순간에 강아지의 숨이 멎었다. 푸른 성력석이 오싹한 빛을 내뿜었다.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기회는 많으니까. 응.”

    인간은 아벨에게 말 못 하는 짐승이나 미물과 다르지 않았다. 하찮은 것이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하기라도 한다면 그 즉시 목숨줄을 끊어 놓을 수 있으니.

    “후작이라는 놈을 직접적으로 건들기 힘들다면…… 대체품의 가족은 어떨까?”

    인간은 가족을, 제 핏줄을 소중하게 여기잖아?

    “가족이 위험해진다면 보석의 숙성도 금방 끝나지 않겠어? 핏줄은 인간을 협박하기 가장 좋은 수단이니까.”

    해맑게 웃는 아벨의 모습은 순수한 어린아이 같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자신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미소. 그것에서는 지독히도 이기적인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었으니까.

    끝나지 않을 영생을 갈구하며 아벨의 수족 노릇을 하는 세비어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지펠론 백작가에 손을 써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떠먹여 주는 것만 잘하지 말고, 어서 내 앞에 대체품을 데려와. 알았어?”

    “……분부 받들겠습니다.”

    아벨이 제 손목에 채워진 푸른 성력석이 박힌 팔찌에 뺨을 기대고 중얼거렸다.

    “빨리 만나고 싶어어.”

    새로운 성력석, 아벨이 그것을 가지려 안달 내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 대체품이 나의 지루한 기다림을 끝내 줄 거야.”

    모든 것을 손에 넣을 거라는 아벨의 탐욕은 루스벨라의 심장에 자리하고 있을 강대한 에너지원인 성력석이 이루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

    ‘나 무사히 돌아온 거, 맞지……?’

    알렉은 에덴 내의 자기 방으로 들어오고서야 긴장을 풀었다. 침대 위로 몸을 늘어뜨리고서 품 안에 잘 싸매고 온 포션을 꺼냈다.

    “이걸 퍼뜨려야 한다, 이거지?”

    황금빛으로 빛나는 포션은 가짜 신성력 증진제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게 고급스러웠다.

    ‘모르고 보면 그냥 좀 특이한 음료인 줄 알겠어.’

    알렉은 데벤테르 후작저를 나오기 전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데니스는 가짜 신성력 증진제를 주며 알렉에게 일렀다.

    “네가 해 줘야 하는 역할은 미리 심지에 기름을 먹이는 일이야.”

    “후작님과 후작부인이 포션을 유통시키는 일이 불을 붙이는 거고요?”

    “맞아. 그러니 네 역할이 중요해.”

    알렉은 데니스가 말하지 않아도 그 내용을 알 것 같았다.

    ‘이 가짜 성력 증진제의 목적은 아벨의 측근들을 걸러내는 일이니까.’

    성력석을 이용해 에덴에서 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아벨이었다. 그런 그에게서 신의 힘이나 다름없는 성력석 부스러기라도 얻는 사람들이라면 바깥보다 안쪽인 에덴에 더 많았다.

    이를테면 장로라든가.

    ‘그런 대어를 건지라는 소리겠지.’

    “……이거 위험수당 확실히 챙겨 주는 겁니다?”

    “당연한 소리를. 들키는 날엔 넌 절대 곱게 못 죽을 테니까. 목숨 걸고 하는 의뢰인데 값은 확실히 치러야지.”

    “아…… 네…… 제 목숨값이요…….”

    “후하게 쳐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난 널 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약속대로 이 일이 끝나는 즉시 에덴과는 전혀 마주칠 일 없게 평화롭게 살게 해 주마.”

    “신에게 맹세…… 아, 이건 소용없겠군요.”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돈이나, 아니면 네가 타고 난 운에 비는 게 더 나을 거다.”

    “그럼 그거라도.”

    데니스의 말대로 알렉은 투덜거리며 제가 가진 운이 넘쳐나기를 빌었다.

    “그 포션, 어떤 음식에 들어가도 맛을 해치지 않고서 섞일 수 있다는 점 알아 두세요.”

    데니스의 옆에 서 있던 루스벨라가 알렉에게 말했다. 알렉의 귀가 쫑긋했다.

    “그거 다행이네요. 직접적으로 먹이는 건 아무래도 역시 제가 나중에 의심받게 될 가능성이 크잖아요?”

    하지만 몰래 음식에 섞어서 건네는 것 정도라면 나쁘지 않았다. 먹은 사제가 다급히 포션을 찾게 된다면, 그때 넌지시 알려 주면 그만이니까.

    ‘그러려면 피곤해도 빨리 행동하는 게 좋겠지.’

    으쌰. 알렉은 늘어지려는 몸뚱이를 바로 세웠다.

    “알렉 사제, 벌써 잠들었나?”

    “아닙니다. 아직 깨어 있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해서 말일세.”

    세비어 장로의 방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