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좋아. 넌 싫지만 배신자의 혈통을 타고난 사람은 정말 필요……하니 받아들이지. 네 마음대로 해 봐.”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것이다.”
“어련하시겠어. 정말 재수 없는 건 변함이 없나 봐?”
“너 역시도 껄렁거리는 버릇을 못 고쳐서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나? 그녀 앞에서 실수하지는 않을지 모르겠군.”
“……내가 그런 멍청이 같은 실수를 할 것 같아?”
데니스는 성질을 냈지만, 속으로는 불안했다. 루스벨라에게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분하지만 아슬란의 말처럼 그가 실수라도 한 것이 있을까 봐 무서웠다.
데니스에게는 루스벨라만이 세상의 전부였고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다.
“아니었다면 되었다. 그보다, 슬슬 일어나서 나는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보지.”
“아마 너와 내가 ‘원만한’ 대화를 마치고 나오기를 기대했겠지만, 꿈 깨는 게 좋을 텐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나도 동감한다. 황제 폐하께서 부디 재고하여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길 바라지.”
“현명한 판단은 무슨, 에덴의 유혹에 넘어가서 손잡은 이상 난 그 인간을 황제로 따르지 않을 거야.”
‘이 자식 뭐라고 반응하려나.’
윈체스터 공작 가는 대대로 황실에 충성해 온 가문이었다. 황제가 잘못된 정치를 펼칠 때도 묵묵히 북쪽을 방비하며 황제의 발끝 아래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그래. 그렇게 하길 원해서 나는 너를 보고자 했다. 데니스.”
“……와. 살다 보니 네가 이런 선택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되다니.”
“네 덕분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너의 희생을…….”
“거기까지 해.”
데니스가 살벌하게 얼어버린 얼굴로 아슬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네가 뭘 알고 있든, 이까짓 거 희생 축에도 안 끼니까 어디 가서 떠들지나 마. 불쾌하니까.”
그리고 네가 감히 나를 걱정한다는 듯이 말을 해?
“네가 배신자의 낙인을 가진 놈만 아니었으면…… 그녀를 살릴 방도 중 하나만 아니었어도 널 벨 수 있었을 텐데.”
데니스는 그러지 못해 정말 아쉽다는 말투로 얼굴을 구겼다. 아슬란은 묵묵부답이었다. 그와의 적막은 질린 데니스가 먼저 너덜너덜해진 옷깃을 놓았다.
“이로써 폐하는 우리 둘의 협상이 완벽하게 결렬된 것을 묻지 않아도 알겠군.”
“닥쳐. 남은 일은 너나 알아서 해. 난 다른 볼일이 있어서 바로 가야겠어.”
아직 시간은 남아있었다. 데니스는 황태자인 베네딕트와 선약을 잡았기에 그것을 핑계 삼아 불편한 자리를 뜨려고 했다.
“아,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응?’
데니스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옷 소매로 쓱쓱 자신의 두 눈을 비벼 다시 눈앞에 보이는 것을 관찰했다.
“……베네딕트 황태자 전하십니까? 지금 제 앞에서 멋쩍게 웃고 계신 분이?”
“음, 내가 맞긴 한데. 너무 표정이 무서우니 조금만 웃으려고 노력해보면 안 되나?”
“……아슬란 윈체스터.”
데니스가 아슬란의 이름을 기가 막힌다는 목소리로 불렀다. 아슬란은 차분히 남은 차나 다 마셨다.
“내가 황태자 전하께 미리 요청드렸다. 너와 내가 이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 긴히 봐야 할 일이 있다고.”
“너…… 너 정말 대단하다. 너야말로 네 모든 것을 걸고 희생하려는 거냐?”
“너도 희생이 아니라고 했으니 그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다.”
“하…… 진짜. 옛날 생각 나게 만드네.”
분위기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원래도 삐죽삐죽한 얼음 가시가 솟아있는 것처럼 공기가 따가웠는데, 오금이 저리는 살기가 공간을 채워서 숨이 막혔다.
“음…… 저기. 진정하고 그대들이 나와 만나려던 것은 맞으니 그 부분을 논의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베네딕트 황태자가 간신히 한마디 했으나 데니스도, 아슬란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황태자인 내가 이런 홀대를 다 당해보는군…….’
베네딕트 황태자도 괴짜에 한 성깔 하는 인물이었기에 상당히 거북하고 불만스러웠으나 그의 감이 지금은 나서지 않을 것을 경고했다.
“그러지 말고, 본론으로 어서 들어가지.”
신경전은 질색인 베네딕트 황태자였다. 그는 양손을 깍지를 낀 뒤 턱을 괴고 부드러이 말했다.
“내 아버지이자 이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 폐하께서 노망에 준하는 미친 짓을 하셨으니 폐위하려는 그대들의 계획을 어서 듣고 싶거든.”
유려한 입꼬리는 당장 대화 내용이 새어나가면 목이 날아갈 소리를 태연하게 지껄였다.
‘가장 껄끄러운 인간들과 마주 앉아 있어야 하는 고통이란…….’
“예. 어서 끝내고 해산하죠.”
데니스는 베네딕트도, 아슬란도 오래 보기 싫으니 후딱 용건을 해치우고 어서 루스벨라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제국의 황제를 갈아치우겠다는 중대한 사안은 데니스에게 있어 짜증 나는 일거리에 불과했으니까.
***
“세레나, 거기 약초 좀 더 갖다 줄래?”
“네! 마님!”
루스벨라는 이미 풍족하게 준비된 재료를 가지고 성력 증진제를 제조하고 있었다.
훌륭한 조수인 세레나가 있는 덕에 힘들지는 않았다. 백 병은 많게 느껴졌지만, 둘이 같이하니 수월하여 금방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중에도 이미 흔하고, 나 역시 만드는 데 익숙하니 품질 자체는 문제없겠지만…….’
순식간에 뚝딱 완성한 밍밍한 갈색의 마력 증진제 앞에서 루스벨라는 긴장감에 찬 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을 거야.”
그동안 데니스와 함께 수없이 심장에 고여있던 신성력을 방출하고 그녀의 의지대로 운용하는 연습을 해왔다.
그러나 단순히 그녀가 활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물질과 섞을 때는 긴장이 늦출 수가 없었다.
‘처음에 힘을 끌어냈던 것처럼, 공방이 연무장처럼 박살 나는 일은 없어야지.’
루스벨라는 차분히 심호흡을 한 뒤, 눈을 감고 몸 안에 흐르는 신성력의 흔적을 뒤쫓았다.
‘손가락에 힘을 줘서, 마치 기름을 짜내는 것처럼 딱 한 방울만.’
이 모든 것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리고 나를 언제나 한결같이 믿어주는 그에게도 보답하기 위해서.
그녀의 체내에 흐르고 있던 푸른 불꽃이 의지에 반응하여 손가락으로 흘러들었다. 이윽고 푸른 불꽃이 포션 병 위에 놓은 검지 위로 타올랐다.
‘지금이야!’
그러자 손가락으로 모여든 신성력이 액화되어 방울지기 시작했다. 푸른 불꽃을 닮은 빛나는 푸른 액체가 쑥쑥 크기를 키우더니 포션 안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이내 순식간에 녹아들어 가면서 포션의 색을 황금빛으로 바꾸었다.
“성공했다.”
‘이 작업을 앞으로 계속 반복하면 된다, 이거지.’
간단하지만 섬세한 컨트롤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루스벨라는 성취에 만족하며 세레나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마님?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곧바로 달려온 세레나에게 루스벨라는 막 만들어진 성력 증진제를 들고 물었다.
“세레나. 혹시 마력을 다룰 줄 알아?”
“네! 전 태생적으로 마력이 거의 없는 데다, 간단한 빛 마법 정도만 구사할 수 있지만요.”
“그거면 충분해.”
루스벨라는 세레나에게 성력 증진제를 건넸다. 먼저 그녀가 만들어본 것을 마셔본 적이 있기에 인체에 해롭지 않다는 것은 검증된 바였다.
“이거, 내가 만든 포션인데 마셔봐. 마력 증진제야.”
“어머, 이렇게 고운 황금빛으로 빛나는 마력 증진제는 본 적이 없는데. 정말 예쁘고 맛있게 생겼네요!”
“혹시 몰라 미리 내가 검증도 해봤으니, 걱정하지 말고 마셔도 돼.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절차거든.”
“알겠어요. 마시고 나서 마법을 써서 확인하면 될까요?”
“맞아. 마법을 썼을 때 효과가 더 커지면 성공이니까. 부탁할게.”
“어려운 것도 아닌 걸요, 뭐.”
세레나는 곧바로 포션을 들이켰다. 루스벨라는 떨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성공적으로 만들어진 거라면, 이 성력 증진제는 일반인에게는 마력 증진제로서만 작용해야 해.’
세레나가 빛 마법을 평소보다 크게 발휘하면 성공이었다.
“해볼게요! 오라, 성스러운 빛이여!”
세레나가 주문을 외우자 그녀의 양손으로부터 빛의 구가 생겨났다. 구체는 쟁반만큼 컸으며, 아주 밝고 환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공방 안을 환하게 밝혔다.
“어때? 평소랑 비교하면?”
“세상에…… 말도 안 되게 위력이 좋아졌는데요? 제가 원래 발휘할 수 있는 실력은 고작 동전 크기만한 빛을 내는 거였거든요.”
빛으로 만들어진 구체는 세레나의 마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인지 금방 사라졌다. 세레나는 어안이 벙벙한 것이 가시지 않은 것인지 제 두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마님?! 이렇게 효과가 좋은 마력 증진제는 태어나서 처음 봐요.”
“음, 영업 비밀이야.”
‘말할 수가 없는 건 조금 곤란하네.’
신성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릴 수가 없으니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다 한들 완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중에 이걸로 상품을 내셔도 되겠어요! 마님의 마력 증진제가 가장 잘 나갈 거에요. 대박을 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세레나는 몹시 흥분한 태도로 칭찬을 늘어놓았다. 남에게 이토록 열성적인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루스벨라는 당황하며 볼을 붉혔다.
‘그래도 기쁘다.’
인정받지 못해 슬펐던 마음이 녹아 흐물흐물해지는 감각이 행복했다.
“팔긴 팔 거야. 대상이 한정된 판매로 진행하게 될 것 같지만.”
“어디에 팔려고요?”
“음, 신전에 유통하려고.”
“어라? 마력 증진제인데 성력을 다루는 사제들에게 파신다고요?”
“비밀이라 알려줄 수는 없지만, 왜 그런지는 곧 알게 될 거야.”
세레나가 이게 마력 증진제가 아니라 성력 증진제이며, 노리는 고객층이 아벨이 신성력 부스러기를 뿌린 사제임을 알게 된 후에는 많은 것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기다려지네.’
그날이. 나를 죽이려는 인간들이 당황하게 될 날이…….
앞으로 다가올 하루하루가, 기다려진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