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데니스는 아슬란이 기억을 찾은 이상 루스벨라에게 도움 될 방향으로 움직일 거라는 예상은 했다.
‘그렇지만 제 살을 깎는 쪽으로 향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되면 아슬란이 그 핏줄을 타고난 것이 아니어도 에덴의 표적이 될 것은 자명했다.
‘이미 시작되었겠지.’
에덴 이전에 탐욕스러운 황제 폐하께서 가만히 두질 않으실 테니.
아슬란이 어떻게 되든 데니스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지만, 찝찝했다. 황제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그가 데니스와 루스벨라를 도우려고 할 줄은 몰랐기에.
“다녀와요. 저는 당신이 말해 준 성력 증진제를 완성해놓을 테니까요.”
“정말 괜찮겠어요?”
꾸준한 신성력 훈련의 결과는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루스벨라는 이제 푸른 불꽃 너울 같던 신성력을 의지대로 제어하고 부리는 수준까지 실력을 키웠다. 주먹과 발에 신성력을 실어 몸을 강화할 수도 있고, 미약하게나마 방어용으로 신성력을 잡아 빼내 두를 수도 있게 되었다.
“괜찮아요.”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한다는 게 괜찮을 수는 없겠지만.’
루스벨라는 데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만은 일관되게 상냥한 붉은 눈동자가 난롯가의 화롯불처럼 따뜻하게만 보였다.
데니스 데벤테르를 아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차갑고 싸늘하다고 평하기만 할 그 눈동자가 그녀에게는 몹시도 특별했다.
“데니스야말로 조심해요. 요새 밤잠도 자지 않고 몰두하는 것이 있는 것 같던데. 그러다 몸 축나요.”
“……들켰어요?”
데니스가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루스벨라는 그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없도록 날 지켜주는 건 고마워요.”
하지만 알잖아요?
“나도 이젠 순순히 당하지 않을 거란 걸.”
루스벨라가 녹안을 빛내며 눈가를 둥글게 접으며 웃었다.
“루스벨라.”
“사교계에 진출하겠다는 말을 괜히 한 게 아니에요. 정말…… 각오가 되어있으니까. 당신과 보낸 시간이 켜켜이 쌓여 내게 용기를 주었으니까, 그래서 가능했던 거예요.”
아직도 무섭다. 백발에 검붉은 눈을 번뜩이며 그녀에게 달려들던 괴물보다 무섭던 아벨이.
‘하지만 괜찮을 거라고 믿고 싶어.’
그녀를 지지해주는 데니스가 있다면 안 되던 일도 잘 될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루스벨라 지펠론의 인생은 캄캄한 어둠을 걷는 것 같았어도, 잠시나마 루스벨라 데벤테르로 지내는 동안은 희망을 움켜쥐고 놓지 않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살아남고 말 것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최선을 다할 테니, 당신도 당신이 하려는 일에 매진하여 날 구하는 일을 도와줘요.”
“당신은…….”
데니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삼켰다. 그만이 알고 있는, 누구보다 단단하고 강했던 사람이 생각나서.
“알겠어요. 믿겠습니다. 당신이라면 잘할 수 있을 텐데, 제 걱정이 과했던 것 같아요.”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으니, 남은 것은 때를 기다리며 암약하는 일이었다.
“그럼 전 가볼게요.”
“이따 봐요. 아무리 바쁘더라도 끼니는 거르지 말고 챙기도록 하고요.”
다정한 인사말이 전해주는 온기가 평온한 일상에 대한 갈망을 더욱 키워주었다.
‘이런 나날만 이어진다면 좋겠는데.’
아무런 걱정 없이, 그녀가 그를 아침에 일터로 보내고 그도 그녀를 저녁에 돌아와서 다시 인사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날들이.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요새는 이상했다. 데니스가 루스벨라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욕심이라고 경고라도 하는 것인지.’
망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루스벨라를 붙잡을 자격도, 그럴 힘도 없기 때문에 그는 그 자신의 목소리를 외면하려 했다.
[과연 네 뜻대로 될까.]
데니스가 황궁으로 이동하던 도중 한동안 잠잠하던 잊힌 신의 사념의 말이 들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람의 마음이란 복잡해서 멈추길 원한다고 해서 그 방향이 틀어지는 법은 없는 법.]
‘뜬금없는 소리 그만하시고, 도움이 될 정보나 주시지요. 그러기 위해 제 머릿속에 기생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이, 이런 고얀 놈이! 나를 기생충 취급하는 것이더냐!]
‘저는 기생충이라고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찔리시는 구석이라도 있으신 것인지?’
[하! 됐다! 더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훈수 좀 두려고 했더니, 시건방진 놈이라 못 주겠구나.]
‘뭘 말씀하는 건지는 몰라도 조용히 해주신다면 감사합니다.’
[고얀 놈! 고얀 놈이로세!]
신의 사념이 빽빽거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데니스는 황궁으로 향했다.
그는 언제나 들고 다니는 신성력이 깃든 검을 꽉 쥐고 닥쳐올 상황을 가늠하고 있었다.
“잡을 수 있는 손은 최대로 잡되, 그렇지 않은 자라면…….”
최악의 경우 베는 것도 서슴지 않아야 함을, 데니스는 언제나 기억하고 있었다.
[살육은 싫어하면서.]
“조용히 하세요.”
어차피 더러워진 손이었다. 데니스는 들끓어 오르는 마음을 진정하고 입궁했다.
***
황제는 진정 비겁한 인간임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재고해보라며 데니스와 아슬란을 같은 황궁의 방 하나에 던져 넣을 리가 있겠나.
“하……. 내가 왜 또 너를 봐야 하는 건지.”
“나도 폐하의 우둔한 결정에는 심히 유감을 표하는 바지만, 너를 만나 이야기를 할 짬이 났다는 것에는 나쁘지 않군.”
“난 나빠. 기분 나쁘다고.”
데니스는 아슬란과 멀찍이 떨어져 있는 소파에서 싫다는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아슬란은 아무렇지도 않은 무표정으로 그저 차를 마셨다.
방음이 잘된 방으로 왔으니 목소리를 낮출 필요는 없었다. 데니스는 신경질적으로 아슬란에게 질문했다.
“무슨 속셈이야. 뭘 원하는 거야?”
“아무것도. 그저 나 또한 너처럼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것뿐이다.”
“거짓말. 이렇게 해서 그녀의 용서를 얻고 싶은 거, 아냐?”
“……그건 쉽사리 부정할 수가 없지만. 어쨌든 나는 대가 없이 네게 협력할 생각이다.”
애초에 이럴 것을 염두에 두고 내게 기억을 준 것이 아니었나?
아슬란이 차를 마시다 말고 데니스에게 시선을 보냈다. 대답을 어서 내놓으라는 재촉에 데니스는 할 수 없이 대꾸했다.
“……그래. 너도 나처럼 그녀에게 빚이 있으니까. 사람의 염치라는 게 있다면 움직일 거라고 예상했지. 내 예상보다 더 큰 물결을 일으키려 한 건 생각 못 했지만.”
아슬란은 훌륭한 전력이었다. 제국에서 그가 만일 변절이라도 한다면 상당히 곤란했기에, 황제는 윈체스터 공작의 편의를 봐주는 편이었다. 세금 혜택을 준다든가.
그런데, 그는 그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영지를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스벨라를 지키려는 선택을 함으로써 말이지.’
그게 꼴같잖았다. 보기 싫었다. 곁에 있을 때는 두고 보지도 않았으면서, 관심도 없었으면서 뒤늦게 잘해주려는 모습이 너무도 싫었다.
“협력은 좋아. 하지만 네겐 따로 대가를 줘야겠어. 받아.”
“싫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저러다 나중에 제 영지인 북부가 위험해져야 정신을 차리지.”
“북부는 약하지 않으니 네가 신경 쓸 바는 없다.”
“그래. 재수 없는 북부의 고철 덩어리야.”
데니스가 욕을 하는데도 아슬란은 끄떡없었다. 데니스는 홧김에 물었다.
“어쩔 거야. 황제는 재수사를 하는 시늉만 할 거야. 이미 시신은 빼돌렸을 가능성이 크고, 바꿔치기야 일도 아니지.”
“그렇다면 윈블 자작 부부의 한을 풀어줄 수는 없단 이야기인가.”
“너도 머리가 있으니 알 텐데? 에덴과 손잡은 인간이 황제니 이미 그 여자의 죽음은 밝혀낼 수 없다는 걸 말이야.”
“그런가.”
황제도 황제지만, 에덴이 윈블 자작 영애에게 아벨의 흔적이 남은 이상 절대 들킬 생각이 없을 것이다.
‘진즉 증거를 잡아 만인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면 나도 좋았겠지.’
하지만 에덴은 너무나 은밀하게 제 정체를 숨기며 몇백년 동안 제국의 그림자 아래서 명맥을 이어왔다.
“네가 한 짓은 그저 네 가신에게 희망고문을 한 것에 그칠지도 몰라.”
그리고 그게 더 잔인할 수 있지.
‘괜한 희망을 가져서 괴로워하는 게 정말 사람 미치게 하니까.’
이런 속마음까지는 밝히고 싶지 않았기에 데니스는 그저 침묵했다. 아슬란도 구태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색한 적막이 몇 분간 흐르고 나서야, 아슬란이 운을 떼었다.
“네 말뜻은 모두 이해했다. 확실히 나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
“못한 건 아닌데, 그럼?”
“데니스, 네 존재가 내게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끝났을 일이었을 거다. 하지만, 네가 내게 기억을 돌려줌으로써 양상이 달라졌어.”
“무슨 소리를…… 너.”
“이걸 봐라.”
아슬란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떴다. 데니스는 그것을 보고 얼어붙었다.
“배신자의 낙인…….”
“너라면 이걸 알아볼 것이라 믿었지. 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니까.”
간절히 찾던 배신자의 표식이었다. 아슬란의 눈에 있는 희미한 신성력으로 그려진 문양은, 분명 데니스가 미친 듯이 찾던 그것이 맞았다.
“어떻게 네가…….”
“죽을 위기 정도는 되거나, 아벨을 만나야 각성이 되는 원리 같더군. 아마 난 둘 다를 충족하여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죽을 위기라면…… 아, 그래. 그쪽으로는 상상도 못 했는데. 미워도 너를 한 번은 찾아가 볼 것을 그랬네.”
“되었다. 어쨌거나 네가 불러온 나비의 날갯짓이 앞으로의 싸움에서 가치 있는 패를 만들어 주었으니, 네게 감사해야겠군.”
배신자의 낙인. 먼 옛날 에덴에서 빠져나온 인간이 후손을 걱정하여 만들어둔 힘이었다.
“그래서, 그걸 근거로 황제에게 윈블 자작 영애의 진짜 시체는 어디 있냐고 물을 거냐?”
아슬란이 다시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희미한 빛으로 만들어진 거미줄 같던 문양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게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리할 것이다.”
아슬란의 눈은 데니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데니스는 그게, 너무나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