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데니스는 루스벨라의 뜻을 말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의지가 무엇을 원하건 간에 들어줄 용의가 충분했으므로.
“저는 당신의 옆에서 그 바람을 들어줄게요, 루스벨라.”
데니스는 환하게 웃으며 루스벨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루스벨라를 밑에서 올려다보는 자세였다.
“손을, 주겠어요?”
“물론이에요.”
‘굳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내 손을 붙잡았다면 나는 거절하지 않았겠지.’
그런데도 데니스는 루스벨라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녀는 그런 그가 좋았다.
데니스가 곧게 뻗어진 루스벨라의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그녀에게 무엇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촉촉한 입술이 가지런한 손가락 마디에 닿았다.
“지금처럼. 지금처럼 살아주세요.”
“……데니스.”
“당신을 죽이려 하는, 인간의 거죽을 둘러쓴 놈들에게 기죽지 마세요. 그들로 인해 당신이 고통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단지 살아있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예언을 빗나가주세요, 루스벨라. 그리고 더 나아가서, 보란 듯이 잘 살아주세요.”
입술이 열 손가락 마디에 전부 도장을 찍듯 눌러졌다 떼어졌다. 데니스는 마치 여신의 축복을 비는 사제처럼 그녀를 경애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저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지.’
루스벨라는 신전을 무너뜨리고, 생존이 보장되면 떠날 결심을 세우고 있건만, 데니스의 저런 눈빛을 보면 마음이 술렁거렸다.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살아남을 거예요. 살아남아서…… 행복해질 거라고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려 불퉁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행복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일생에서 그나마 행복한 순간이 많았던 순간을 꼽으라면 데니스와 함께했던 시간들이었다.
루스벨라는 말은 행복해진다고 했지만, 사실 그녀에게 행복해지려는 미래는 신기루처럼 홀연한 것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해야,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을 입에 올렸다.
‘그래야 한다고 배웠으니까.’
살면서 잡히지 않았던 행복은 밉기만 했다. 그녀는 가질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환상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환상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쓸 것이다.
‘나를 위해 헌신하는 데니스를 봐서라도, 절대 포기하는 일은 없어.’
없다고 생각했던 신이 그에게 내려준 예언 덕분에 삶에 대한 희망을 다시 품을 수 있었다.
이 고마움을 무엇으로 갚아야 하는지 물었을 때 그는 그저 그녀가 행복하게 살아주기만 하면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그녀는 살아남을 것이다. 보란 듯이 운명이 정해놓은 죽음을 뛰어넘고 삶을 쟁취할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잘 해낼 수 있다고 말해 주는 건 늘 당신이잖아요.”
루스벨라가 데니스를 다독였다. 그녀는 일련의 경험으로 데니스가 불안을 극단적으로 감추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나마 표현하는 방식이 이런 식의 가벼운 스킨십이라니.’
어째서 그런 버릇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데니스의 평온을 위해서 루스벨라는 그 정도쯤은 눈감아주었다.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그녀를 아끼는 만큼 그 자신도 소중하게 여기기를 바랐기에.
“……당신도 그러길 바라요.”
그녀는 그에게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데니스도 루스벨라를 따라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도 노력해야겠죠.”
그 시작은 공방에서 만들 성력 증진제와 활발한 사교계 활동이 될 것이다.
“공방부터 같이 가봐요. 오늘 하루만 내가 호위로 같이 갈게요.”
“좋아요.”
둘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고 같은 곳을 향해 걸었다.
***
건물 한 채를 온전히 루스벨라에 맞춰 개조한 덕에 시설에 대한 그녀의 만족도는 굉장히 높았다.
‘친정에서나 윈체스터 공작 성에 머무를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것들인데.’
루스벨라는 새삼 그녀가 어떤 인물과 결혼했는지 실감이 났다. 연금술에 필요한 모든 재료와 실험기구가 가장 최상급으로만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다.
“아, 오셨나요? 후작님, 그리고 후작 부인.”
물론 루스벨라를 도와 잡다한 일을 도맡아줄 사람도 이미 구해져 있었다.
“안녕, 세레나. 앞으로 루스벨라를 잘 부탁할게.”
“물론이죠. 후작님이 오빠에게 사람을 구해달라고 지시한 순간부터 저는 후작부인을 모실 준비가 되어있었다고요!”
세레나라는 여성은 밝은 갈색 머리에 연초록 빛의 눈동자를 가진 재기발랄한 소녀였다.
“이분은……?”
“소개할게요, 루스벨라. 이쪽은 세레나. 제 보좌관인 제이크의 여동생이자 앞으로 당신을 모실 조수가 될 사람이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데벤테르 후작 부인! 세레나 리올이라고 합니다. 마음껏 부려주세요!”
세레나는 마치 갓 수확한 레몬처럼 생기가 넘쳐 보였다. 활달하고 싹싹한 것이 낯을 가리는 루스벨라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잘 부탁해요, 세레나.”
“마님을 곁에서 보조할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요! 오빠를 통해서 이야기를 종종 들었거든요.”
“제 이야기를요?”
루스벨라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그녀의 초점은 최근 살아남기에만 치우쳐져 있던 탓에 제이크와 같은 보좌관이나 고용인들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후작님 곁에서 조련을 잘하신다고…… 덕분에 후작 저로 출근할 때 한결 마음이 편하다고 했, 헉!”
“거기까지 하지, 세레나 리올?”
조잘조잘 말을 늘어놓는 세레나를 데니스가 무서운 눈빛으로 ‘그만 말해라’라는 뜻을 전했다. 세레나는 금방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루스벨라만이 머리에 물음표를 띄웠다.
‘음? 조련?’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조련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데니스가 말 못하는 짐승도 아닌데 무슨 조련을……?’
그것보다 항상 그녀에게 상냥하기만 한 사람인데 무슨 소문이 도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더 말해 줄 수 있어요?”
“아니요, 루스벨라. 세레나가 잘못 말한 겁니다. 그렇지, 세레나 리올?”
“어, 어, 네, 네! 제가 다른 분이랑 착각해서 말했나 봐요. 하, 하하. 죄송합니다!”
세레나가 허겁지겁 사죄 인사를 데니스와 루스벨라에게 전했다. 안색이 새파란 것이 어디 아픈 것처럼 보였다.
“어디 안 좋아요? 아까랑 다르게 너무 하얗게 질려 있는데. 치유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해요.”
“아니요! 괜찮아요! 전 1년에 감기도 한 두 번 걸릴까 말까 한 건강 체질인 걸요. 마님의 치유력은 넣어두셔요!”
세레나는 생활 근육으로 다져진 자신의 알통까지 보여주며 건강함을 확인시켜줬다.
“그렇다면야 다행이고요. 오늘 처음 만났는데, 아프면 저도 속상하니까요.”
루스벨라에게 있어 연금술은 늘 혼자 하는 외로운 작업이었다. 보통 연금술사의 공방은 많으면 네다섯 명의 조수까지 딸려 포션이나 약품을 생산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조수를 필요로 하는 직업군이지만, 그녀는 언제나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했다.
‘그래서 조수가 있는 연금술사가 정말 부러웠는데.’
제게도 다른 누군가와 함께 포션을 만들 날이 와서 무척이나 기뻤다.
“제 인생 첫 조수예요. 세레나는. 그러니까 같이 잘해봤으면 좋겠어요.”
“마님……! 네! 저 잘 해보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세레나는 루스벨라의 말에 덥썩 그녀의 손을 잡고 반짝거리는 시선을 보냈다. 루스벨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레나를 쳐다봤고, 데니스는 어딘가 심통이 난 표정으로 세레나를 루스벨라에게서 떼어놨다.
“뭐 하는 짓이야. 세레나. 예의를 지키라고 네 오라비가 말하지 않던?”
“앗, 죄송합니다. 제가 미인인 분을 만나면 환장을, 아니 너무 감격해서 그만.”
“이래서 다른 사람을 보낼까 싶었긴 한데…….”
“악! 보내지 말아 주세요! 제이크 오빠처럼 돈 받은 만큼 일 잘하는 사람이 될게요!”
“그걸 아니 너를 루스벨라 옆에 붙였지.”
‘고용인에게는 딱딱한 편인 줄 알았는데, 이런 면도 가지고 있었구나.’
데니스와 세레나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루스벨라는 살풋 웃었다. 데니스의 몰랐던 모습을 보게 되어서 내심 기뻐하는 그녀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그래서 무심코 그런 말을 던졌더니, 두 사람 모두 정색하며 부정했다.
“절대 아닙니다, 루스벨라.”
“헉, 마님! 후작님 앞에서 그런 말씀이라뇨! 절대 당치도 않습니다! 그냥 저는 오빠처럼 돈 주면 열심히 일하는 훌륭한 일꾼이에요!”
‘음? 왜 저렇게 당황해하지?’
루스벨라는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거렸다. 데니스가 한숨을 쉬더니 세레나에게 성력 증진제를 만들 재료를 가져오라 시키고 루스벨라와 둘만 남았다.
“전 세레나와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네?”
“알아두셨으면 하셔서 하는 이야기에요.”
“……?”
‘그걸 내가 모른다고 해서 말하는 건가?’
루스벨라는 정말 단순히, 세레나와 데니스 사이가 친밀해 보이길래 한 말이었는데 무슨 오해를 한 건지 의아했다.
데니스는 그녀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 취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네. 알았어요.”
그래도 착실히 대답은 해주었다. 데니스는 루스벨라의 말에 만족스러워하다가 그런 자신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한 거지.’
철없는 아이처럼 떼를 쓴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그녀 앞에서는 멋진 모습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어느새 방심하고 있었다.
이미지를 만회하기 위해 데니스는 루스벨라에게 어떤 재료라도 지원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 말도 결국은 루스벨라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말인 줄은 모르고서.
“필요하다면 금과 보석도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
“금과 보석과 같은 것들을 요구하는 종류의 실험은 이미 실패했다고 알려진 것을요. 그런 것까지는 필요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루스벨라는 포션을 만드는 데 주력하는 사람인지라 보석 같은 것은 굳이 쓸 이유가 없었다.
“자자. 데니스는 이제 되었으니 돌아가세요. 이상한 소리는 그만하고요.”
“그렇지만…….”
“호위도 충분하겠다, 성력 증진제를 만들 환경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니 걱정은 내려놓고 당신이 할 일을 해요.”
“……알았어요.”
데니스에게도 할 일이 있었다.
‘아슬란 윈체스터를 봐야 하지.’
윈블 자작 영애의 자살 사건 재수사로 인해 아슬란의 얼굴을 다시 마주해야 했다.
‘이번에는 또 뭐라고 하려나.’
만나기도 전에 이미 머리가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