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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77화 (77/166)
  • 77화

    아슬란이 연회장에서 잘못을 저질렀던 가신들에게 엄포를 놓은 일은 황제에게 귀찮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재조사를 요청한다고 했소, 공작?”

    “그렇습니다. 폐하.”

    아슬란 윈체스터 공작이 그를 따르는 북부의 귀족들을 모두 데리고 와서 윈블 자작 영애의 자살 건에 대한 재조사를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북부의 귀족들은 모험을 택하지 않았다. 아슬란도 실패한 데벤테르 후작의 용서를 구하는 일을 포기하고, 대신 아슬란의 요구대로 재수사를 요청하는 데 힘을 싣기로 한 것이다.

    황제는 정말 귀찮았다.

    “그 건에 대해서는 공작과 후작이 원만한 대화로 해결하는 것으로 끝을 내자고 하지 않았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와 제 가신들은 윈블 자작 영애의 죽음을 그냥 넘길 수 없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대의 사람들의 의견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흐음…….”

    ‘윈체스터 공작이라면 데벤테르 후작을 견제할 좋은 카드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군.’

    황제는 겉으로는 온화한 웃음을 머금고 속으로만 오만상을 찡그렸다. 바라던 대로 움직이지 않는 두 신하를 보며 황제의 속은 지글지글 끓어갔다.

    ‘다루기 까다로워서 기분 나쁘군.’

    공작이나, 후작이나 전부.

    황제는 욕심이 많았다. 그는 선황제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은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안정적인 통치와 지배를 하면서도 황제는 갈증에 시달렸다.

    ‘더 강력한 권력을 원해.’

    감히 제국의 황제를 위협할 만한 적대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제국 내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귀족들을 보면 황제는 장이 뒤틀렸다.

    ‘나만이 모든 이들의 위에 군림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미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황제는 탐욕을 키웠다. 국정을 논하는 회의에서 신하의 의견을 귀담아야 하는 것이 불편했고, 발 빠르게 시대의 흐름의 변화를 포착하여 적응한 신흥귀족의 탄생도 달갑지 않았다.

    ‘거슬려.’

    거슬린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아귀처럼 황제는 굳건한 절대 권력을 원했다. 측근들은 이를 어렴풋이 알아챘으나 황태자가 성인이 된 이후까지도 황제의 성정이 달라지지 않았음은 몰랐다.

    “폐하께 아주 달콤한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영원한 생을 얻고 싶지 않으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다니. 혀가 뽑히고 싶은 건가?”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저는 폐하의 오래된 소망을 들어드리고 싶어 말씀드리는 겁니다.”

    폐하께서는 장차 제위에 오르실 황태자 전하마저 질투하지 않으십니까.

    ‘건방지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추악한 이면이 드러났음에도 장로의 목을 치지 않은 것은 제시한 거래가 썩 마음에 들어서였다.

    “영원히 황제로 살아가실 수 있도록 불멸의 삶을 드리겠습니다. 대신…….”

    “대신?”

    “데벤테르 후작 가문을 멸문시키는 일을 도와주십시오.”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살다 보면 사람이 죽는 일은 흔했다. 귀족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한 나라가 흥망성쇠의 길을 걸으며 사라지고 새로이 생기는 성씨는 얼마나 되던가.

    “고작 그거면 싼값이지.”

    황제는 떠오르는 유망주인 데니스를 치우고 싶었고, 이는 에덴도 마찬가지였다. 음침한 속내를 숨기지 않은 채 맺어진 협력 관계는 첫 시작으로 아벨의 세뇌에 깊게 물들어 있던 아슈라 윈블의 죽음이었다.

    아벨이 수면 위로 언급되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것이 협력 관계를 맺으며 장로가 황제에게 가장 우선시해야 할 사항으로 건 조건이었다.

    ‘누구도 그분의 정체를 알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벨님 스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절대.

    황제는 그것에 의문을 가졌으나 곧 잊었다.

    ‘호기심이야 나중에 해결하면 될 일.’

    우선 치우고 싶어 안달이 났던 새로운 데벤테르 후작을 제거할 때였다.

    “이미 판결이 난 사건에 재수사 요청이라……. 짚이는 범인이라도 있나, 공작?”

    “그런 것은 아닙니다.”

    ‘걸려들지 않는군.’

    역시 북부의 윈체스터 공작이란 생각과 함께 아쉬움이 일었다.

    ‘이참에 윈체스터 공작과 데벤테르 후작이 서로를 물어뜯다 둘 다 제풀에 나가떨어졌다면 가장 좋았을 것을.’

    윈체스터 공작과 데벤테르 후작, 그 사이에는 루스벨라가 있었다. 세 사람을 둘러싼 소문은 수도를 휩쓸었고, 이는 황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신은 폐하께오서 윈블 자작 영애의 억울한 죽음에 자비로운 처사를 내려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공작이 나를 현군으로 받드니 기분이 좋군.”

    “황송합니다.”

    ‘황제가 연루된 이상 데벤테르 후작 가에 뻗칠 마수는 한 줄기도 용납할 수 없다.’

    아슬란은 한 치의 예법에 어긋남도 없이 황제의 물음에 답하며 말했다.

    “만백성의 어버이시니 딸을 잃은 자작 부부의 간절한 수사 요청을 들어주시리라 믿었습니다.”

    “부모자식 간의 정이 각별한 것임을 내 모르지는 않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네.”

    “감사합니다, 폐하.”

    아슬란도, 황제도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미소 뒤에 가려진 본심은 서로를 어떻게 해야 처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데벤테르 후작 부부도 재수사를 진행함으로써 오명을 벗을 수 있게 되었으니…… 폐하의 은덕에 감읍할 것입니다.”

    “……그래야지.”

    당장 거절할 수는 없으니 흔쾌히 받아들이는 체했지만, 황제는 데벤테르 후작 가를 없앨 생각이 이미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을 아슬란이 저지했다.

    “데벤테르 후작을 찾아갔을 때 먼저 재수사를 해야 한다며, 그전까지는 보상금을 받지 않겠다 하니 틀림없이 기뻐할 것입니다.”

    황제의 흔들림 없던 표정이 살짝 금이 갔다. 아슬란은 무엇이 문제냐는 듯 계속 웃기만 했다.

    ‘저것도 치워야겠다.’

    변방을 지킬 개야 다른 적절한 놈으로 데려오면 되지 않겠나.

    그래서 황제는 은밀히 전해진 에덴의 서신을 읽고 기뻐했다.

    -조건을 추가하겠습니다. 윈체스터 공작 가의 멸문도 필요합니다.

    “배신자의 핏줄이라는 변수를 그냥 둘 수야 없지.”

    황제와 아벨은 이런 면에서는 닮았다고 볼 수 있었다.

    향하는 길을 막으려는 요소는 죄다 없애버리려는 작자들이었기에.

    ***

    루스벨라의 하루는 최근 여러모로 바빠졌다. 무료했던 나날에 해야 할 일들이 채워졌기 때문이었다.

    ‘오늘 공방이 완성되는 날이지.’

    아침 일찍 데니스와 신성력 훈련 및 대련을 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녀를 죽이려는 신전을 속여 넘길 성력 증진제를 만들려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빠지지 않고 선대 데벤테르 후작의 치유를 봐주는 일도 일과에 들어갔다.

    거기에 루스벨라는 데벤테르 후작 가로 보내지는 초대를 선별하여 응하는 중이었다.

    ‘신전의 습격을 받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위축되어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

    적극적으로 신전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움츠러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강경한 루스벨라의 뜻에 데니스도 동의했다.

    “그렇다면 아예 과시하듯이 다니는 게 좋겠네요.”

    “과시하듯이요?”

    “네. 제가 신전의 밥줄 중 하나를 끊어버렸으니…… 이쪽의 동태를 아닌 척해도 주시하고 있을 거예요.”

    세비어 장로가 알렉을 보내고도 구태여 감시역을 보냈던 것처럼, 에덴에서 보내는 사람이 더 있을 거라고 데니스는 생각했다.

    ‘안 보내는 게 바보지.’

    루스벨라를 둘러싼 경비가 삼엄해진 것은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막아 세우는 자가 있다고 해서 그들이 탐스러운 대체품을 목전에 두고 군침만 흘리고 싶어할 리는 없었다.

    ‘차라리 소인배처럼 겁을 먹고 물러선다면 좋겠지만.’

    그들은 포기할 생각이 없을 테고, 그건 데니스나 루스벨라도 마찬가지였다.

    이 싸움은 어느 한쪽이 거꾸러질 때까지 이어질 것이니.

    “대치 상황이 길어지는 게 우리나 그쪽이나 좋을 게 없으니까, 도발 겸 신경 긁기 용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는 게 좋겠어요.”

    ‘저번에는 아무 데도 못 나가게 할 기세였는데.’

    루스벨라는 데니스의 달라진 말에 조금 놀랐다. 아벨에게 습격을 당한 당시에 데니스는 당사자인 그녀보다 더 예민하게 주위를 경계했고,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다소 과도할 정도라서 답답한 점이 있긴 했지만 말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데니스가 전략의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루스벨라는 그것이 기꺼웠다.

    얌전히 보호만 받기는 싫었다. 그녀에게는 이제 신성력이라는 힘이, 그리고 그녀 자신이 쓸모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자신감과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있었다.

    ‘억압받는 상황에 순응하는 삶을 더는 살지 않을 거야.’

    그러니 눈치 보는 생활을 지속할 마음은 눈곱만치도 들지 않았다. 아버지인 지펠론 백작으로 참고 있다고 생각했던 울분은 직접적인 살해 협박을 받으니 억누르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내가 왜 저들이 또다시 접근할까 봐 걱정하며 숨죽이고 있어야 하지?

    언제까지?

    숨어서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면, 대체 그건 언제까지일까?

    “그렇다면 사교 활동을 넓히는 게 좋겠어요.”

    루스벨라가 은은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데니스는 그녀가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들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사교계의 꽃.”

    루스벨라의 말에 데니스가 잠시 말이 없어졌다.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는 자리를 소문이 무성하던 제가…… 낚아챈다면 그것만큼 이목을 끄는 것도 없겠죠.”

    이미 이목은 집중되어 있었다. 수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윈블 자작 영애의 죽음으로 엮인 세 사람이었으므로.

    “나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이 집중된 곳이야말로 가장 곤란한 장소겠죠?”

    피식자 중에서는 도리어 눈에 띄는 선택지를 고름으로써 살아남는 개체가 있다.

    언뜻 봤을 때 괴상한 눈알처럼 생긴 무늬를 지닌 나비나 애벌레가 그러했다. 포식자에게서 살아남으려 분투한 진화의 흔적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나를 사냥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아요.”

    사냥감은 되지 않을 것이다.

    루스벨라는 독을 머금은 화려한 꽃이 되어 그녀를 노리는 포식자를 결국에는 죽이고야 말 것이다.

    ‘설령 살아남는 것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쉽게 죽어주는 먹잇감 따위는 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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