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아슬란의 폭탄선언을 들은 이들의 얼굴이 상해 버린 밀가루 반죽처럼 칙칙한 색으로 변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맞서 싸워야 하는
“저…… 각하. 농이시죠?”
“여기서 갑자기 데벤테르 후작 부인이 왜…….”
그들은 심히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아슬란이 한 말을 철회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의 말이 거짓말이기를 바라거나.
‘회피하고 싶을 테지.’
아슬란은 그들의 비겁함을 이해했다. 그 역시도 루스벨라의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것이 뻔했음으로. 떨리는 동공과 불안한 손동작에서는 어렵지 않게 불편함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피하기만 하는 것으로는 안 돼.’
이기심인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아슬란은 이것이 그녀도, 그도 위한 것이라 생각했으나 결국 그녀를 위한다는 명목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과오를 되갚기 위한 일임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사태가 심각한 것을 그대들이 모르지 않을 텐데, 내가 이 시점에서 농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여유로워 보이나?”
“아닙니다. 그런 뜻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아슬란 휘하의 귀족들은 머뭇거리다 겨우 하고 싶은 말을 토해 냈다.
“왜 하필이면 그분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포션을 제작하는 연금술사가 꼭 데벤테르 후작 부인만이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말은 돌려서 하고 있지만 진짜 속내는 뻔히 보이는군.’
아슬란은 혀를 찼다. 그들은 루스벨라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엮이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루스벨라가 그들을 괴롭히기라도 한 줄 알 것 같았다. 피해자는 그들이 아니라 그녀인데도.
“번복하지 않겠다. 내 뜻은 확고하다. 나는 데벤테르 후작 부인에게 포션 제작의 의뢰를 맡길 것이다.”
“안 됩니다! 북부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
“그놈의 명예 타령은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나?”
반대가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아슬란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 겪으니 불쾌함이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내 말이 우습게 들린 것 같군. 잘 들어라. 내 피로 제작하려는 세뇌 대비용 포션은 오로지 치유사만이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치유사를 알아보면 될 것 아닙니까.”
“내가 정녕 그녀에게 의뢰를 맡기려는 까닭을 모르고 있군.”
그게 아니라면 모른 체하고 있다는 건가.
어느 쪽이든 반갑지 않은 소리였다. 아슬란은 더는 분노를 참지 않았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제국의 적이기도 하다. 굳이 황제 폐하를 현혹한 이유가 무엇일 거라 생각하나.”
“그야…… 무엇인지는 몰라도 사사로운 목적에 기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죽었다.”
아슬란이 던진 무거운 말에 분위기는 물에 젖은 솜처럼 가라앉았다. 개중에서도 윈블 자작의 얼굴이 가장 일그러져 있었다.
“고작 시답잖은 비밀이었다면, 윈블 영애가 죽임당하는 일은 없었겠지.”
“…….”
“사람의 목숨마저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일이란 것이다. 사악한 치들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폐하를 이용하려는 그 배짱을 보면 놈들이 어디까지 준비하고 왔을지 모른다.”
‘물론 기억을 찾은 나는 알고 있지만…… 밝힐 수는 없겠지. 지금으로선.’
아슬란은 아벨과 에덴을 향해 이를 갈았다. 그리고 데니스가 그에게 기억을 돌려준 취지를 곧바로 이해했다.
‘내가 이렇게 움직일 것을 염두에 두고 한 선택이었군.’
데니스는 아슬란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군사적 전력으로만 보고 있던 것이다. 아벨에 대항하기 위해서 끌어들여야 할 필수적인 전략인 셈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용당하고 있다는 불쾌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나 또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의 북부를 위해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셈이니.’
그러니 원망은 들지 않았다. 감사하고 미안함이 든다면 모를까.
‘더구나 현 상황에서 에덴에게 대항하기 위한 포션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루스벨라, 그녀밖에 없다.’
에둘러 치유사만이 세뇌 대항용 포션을 만들 수 있다고 했지만,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만들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일이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워낙 믿지 못할 일이라 믿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슬란은 편한 길을 택하기로 했다.
“북부의 피를 타고난 자라면 명예와 목숨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안다면 나를 따라라. 더는 군말하는 것을 용납지 않겠다.”
아슬란은 그에게 주어진 지도자로서의 권력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영지를 위해 일한다는 것에만 목적을 두었을 뿐, 정작 내 휘하의 사람들이 이토록 안일하게 구는 것을 묵과하고 있었다.’
몰랐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발견한 이상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북부는 데벤테르 후작 가문에 협력을 구할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다.”
‘그렇지 않으면서. 돌려준 기억 덕에 거짓말도 늘었군.’
아슬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에게 제국의 안녕이 필요하기는 했다.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제국이었으니까.
‘그녀가…… 루스벨라가 있어야 하는 장소를 에덴에게 빼앗길 수는 없지.’
그러니 지킬 것이다. 그에게 흐르는 피가 에덴의 세뇌를 막을 수 있다는 쓸모를 지닌 것을 확인했으니 돌파구는 마련한 셈이었다.
“이의가 있는 자는 당장 떠나길 바란다. 대신, 그는 북부에서 추방당하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사실상 협박이었다. 선대 윈체스터 공작과 달리 가신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애쓰던 이전의 아슬란과는 전혀 다른 행보였다.
“그리고 나는 내 뜻을 따르지 않는 멍청이를 용서할 이는 아닌 것을 알고 있겠지.”
조용한 공기 속에서 꿀꺽, 하고 침 넘기는 소리가 울렸다. 잊고 있었지만, 이곳에 모인 귀족들은 그들이 연회장에서의 사고를 친 전적이 있었다.
‘각하께서 어째서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건지는 몰라도, 지금 거슬러서는 절대 안 된다.’
“……따르겠습니다.”
거부할 수 없었다. 북부에 뿌리를 둔 귀족들이 쫓겨나 어디를 갈 수 있겠는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말라죽을 것인데.
“그래야 할 것이네. 딴생각일랑 하지 않는 게 좋을 거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믿고 싶지만, 안심이 영 되질 않아서 말이야.”
아슬란은 웃으며 한 사람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보좌관의 앞이었다.
아슬란이 루스벨라를 홀대했던 북부 귀족들에게 따지려는 것을, 술에 진탕 취하고 떠벌린 그 보좌관이었다.
“각하……?”
“우리 중에 쥐새끼의 기운이 느껴지면 정말이지 기분 더럽거든.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는 환경이라니.”
보좌관의 멱살이 잡혔다. 아슬란은 아직도 흐르는 피를 가져와 보좌관의 입 안에 억지로 먹였다.
“컥, 커헉! 각하,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는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아벨.
아슬란이 보좌관의 귓가에 발음 하나하나를 씹어 먹을 듯 끊어서 속삭였다.
“당장 내 부하의 의식을 흐트러뜨리는 것을 멈추고 꺼져라.”
“아잇, 참. 들켜 버리다니 아쉬워라.”
“무슨…….”
눈 깜짝할 사이에 달라진 보좌관의 태도에 귀족들은 경악했다.
“역시 맞았군. 경멸스러우니 어서 꺼져라.”
아슬란이 무서운 기세로 으르렁거리니 보좌관의 의식 속에 숨어 있던 아벨의 파편이 발동했다.
“역시 배신자의 핏줄이라 다르다, 이건가? 피를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어서 죽여야 내 앞날이 편하겠어.”
“닥쳐.”
“왜 화를 내고 그래? 화를 내고 싶은 사람은 나일 텐데 말이야…… 만일의 상황을 위해 숨긴 파편이 이렇게 허무하게 들켜 버리다니. 짜증나게.”
“내 보좌관의 의식 속에서 나가.”
“이미 네놈이 피를 먹여서…… 그러지 않아도 사라질 거다.”
보좌관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헛구역질을 몇 번 하더니 무언가를 뱉어 냈다. 푸른 모래 가루 같은 것이 떨어져 나왔다.
‘이게 매개체였나.’
아슬란에게 붙들려 있던 보좌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아슈라 윈블이 명령을 받은 인형처럼 움직였다면, 이건 마치 아벨의 분신처럼 행동한 사례여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낭패로군.’
“각하…… 대체 방금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대관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말하지 않았나. 제국을 위협하는 적이라고.”
“세상에.”
“전염병을 두려워했나? 나는 이게 전염병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보고 있네. 이런 식으로 믿고 있던 북부의 사람들을 음모에 이용한다면 앞으로의 미래를 전혀 장담할 수 없겠지.”
그대들 중에도 이미 적이 스며들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지.
절대 안 된다고 말하던 귀족들은 침묵했다. 눈앞에서 협력해야 할 근거가 들이밀어지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저희의 역할을 알려 주십시오, 각하. 무엇이든 하여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비로소 인지한 귀족들이 아슬란을 둘러싸고 가야 할 방향을 알려 달라 간청했다.
“말하지 않았나. 우리는 데벤테르 후작 가문과 협력해 사특한 무리들을 제거하겠다고.”
그러나 우린 데벤테르 후작 가에 이미 단단히 밉보인 상태지.
“내가 여기서 그대들에게 뭘 기대하고 있을 것 같나?”
“…….”
언뜻 들으면 밝고 명랑한 말투였으나 내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슬란은 그들을 책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괜한 기대 따위도 하지 않으며 일을 망치지만 않기를 원하고 있었다.
“각하…….”
“정말 나를 돕기를 원하고, 북부든 제국이든 지키는 데 도움을 보태고 싶다면 데벤테르 후작 가로 가서 후작 부인께 그대들의 무례를 용서해 달라 빌게.”
귀족들이 곤란해진 표정으로 애원하듯이 아슬란을 쳐다봤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참고로 내가 직접 홀로 가 봤지만 문전 박대를 당했지. 과연 나도 못한 일을 어느 인재가 가서 해낼지 궁금하군.”
아슬란이 비뚜름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