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건국제 연회장에서 한 어린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스치듯 지나간 인연이지만, 기억에 남을 만큼 범상치 않은 느낌이 풍기더군요.”
“……그 아이가 혹시 백발에 붉은 눈을 하고 있지는 않던가?”
“맞습니다. 흔한 생김새가 아니라서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눈길을 끄는 아이였어요.”
아벨이었다.
아벨이 최대한 타인의 시선이 머무르지 않도록 다니려 했으나 무리였다.
그를 둘러싼 기이한 힘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고, 그것은 윈블 자작 역시 논외가 아니었다.
특히나 아벨이 이용했던 그의 딸인 아슈라 윈블이 있었기에 마주치는 일은 피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찰나의 마주침은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그것을 잊게 만든 것은 아벨의 힘이었다.
‘귀찮으니 아무것도 기억하지 마라.’
세뇌의 힘은 아슈라뿐만이 아니라 그 아비인 윈블 자작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저 네 딸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노릇이나 해.’
모든 것은 만물이 사랑해 마지않을 나를 위해서…….
아벨의 세뇌는 마치 전염병처럼 자작에게로, 더 나아가서는 북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
아슈라 윈블이라는 살아 있는 매개체를 통해서 북부로 세뇌의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던 것이다.
건국제 연회에서 아슈라가 말도 안 되는 주장에 힘을 실을 사람을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벨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왜 각하께 말씀드리지 않았는지 저조차도 의문이 듭니다만…….”
자작은 고개를 떨구며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아슬란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한 번 세뇌로 조종당했던 인물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줄 필요는 없겠지.’
“그건 괘념치 말게.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해 줘.”
아슬란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고 자작에게 정보를 요구했다.
자작은 제 주군이 저를 용서했다고 여긴 것인지,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실은…… 사특한 주술처럼 들리겠지만, 딸아이가 가진 거울에서 이따금씩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세뇌의 힘이로군. 원격으로도 가능했던 건가.’
아슬란은 혀를 차며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전염병처럼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넘나드는 세뇌라면 과연 어디까지 퍼졌을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 목소리가 연회장에서 봤던 아이의 목소리와 같았습니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이 늙은이가 기력이 쇠했다고는 하나, 어엿한 북부인으로서의 사냥개 같은 감각은 죽지 않았나이다.”
북부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추위와 짐승의 습격에 대비하며 자란다. 귀족이라고 해도 그 풍토는 사라지지 않아서, 아슬란 또한 선대 공작이 살아 계실 적에는 설산으로 사냥을 곧잘 나가곤 했다.
‘외형이나 비열한 공작까지 아벨이 맞다. 확신할 수 있어.’
심장이 두근거린다. 기분 좋은 울림이 아니라 불쾌함으로 인해서. 제 목덜미에 이를 박고 싶어 하는 굶주린 늑대를 마주쳤을 적에, 바로 그 찝찝함.
‘서둘러 제거해야 한다.’
……사냥꾼이 아니라 사냥감으로 여겨질 때의 그 거슬림.
아벨을, 그 포악한 괴물을 어서 죽여야 했다.
그래야…… 그녀에게 진 빚을 갚고 얼굴이라도 볼 자격이 주어질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아이가 불온한 자들과 황제 폐허와의 연관성이 있음을 증명해 줄 수 있나?”
“물론입니다.”
윈블 자작은 희게 질린 얼굴로 당시의 기억을 소상히 설명하려 노력했다.
“귀족이라면 웬만한 귀족들의 정보는 파악하고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전혀 본 기억이 없었지요.”
“그래서?”
“하여 아이와 함께 온 보호자가 누구인지를 살폈습니다.”
윈블 자작은 초대 명부를 보고 아이의 보호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귀족은 맞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백발에 적안을 가진 자식 따위는 없었고, 방계에도 그런 아이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전혀 본 적이 없던, 수상한 아이였습니다. 더욱 이상했던 건 그 아이에게 보호자가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지요. 마치…….”
“그 아이가 주인인 것처럼 말인가?”
“맞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봤다면 단순히 아이를 귀애한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런 애정이 깃든 눈이 아니었습니다.”
윈블 자작이 포착했던 것은 공포요, 경외심이었다.
‘고작 어린아이에게 어째서 저런 시선을 보내는 것이지?’
의문은 꽃피우지 못하고 사라졌다. 사랑하는 그의 딸, 아슈라와 있으면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고 딸의 바람을 이루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강하게 남아 그를 재촉했다.
경계심이 아니라 태만함이, 물러지고 텅 빈 욕망이 심장을 채우는 것을 느껴 당혹스러웠으나, 저항할 수 없었다.
흐릿해지는 이성을 붙들고 간신히 본 것은 아슬란의 피를 마신 이후 다시 기억이 났다.
“그렇지만 이상했던 것은 역시…… 모두가 연회장에서 빠져나가고 있을 때, 그 사람만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는 점입니다.”
“어디로 가고 있었지? 밖으로 나가는 통로는 하나뿐일 텐데.”
황궁의 연회장은 암살을 대비하여 통로가 하나밖에 없었다. 혹여 황족이 살해당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바로 연회장의 문을 닫아걸고 범인을 색출해야 하니까.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과 움직임을 같이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런 척만 하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연회장에 모인 모든 귀족들에게 나가라는 명을 내렸다. 움직이지 않았다면 심히 눈에 띄었을 터.
“다른 귀족들이 그를 의심했을 텐데.”
“마차가 있는 곳까지는 다른 사람들과 걷는 속도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윈블 자작은 그 당시를 더 상세히 기억하려는 듯이 손가락을 더듬거렸다.
“다 나오고 나서야 화장실에 들러야겠다는 핑계로 다시 들어가더군요. 그리고 그런 그에게 안내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아슬란은 자작의 말을 듣자마자 그에게 길안내를 한 자가 누구일지를 알아챘다.
“……황제 폐하의 시종장이었나? 그자가?”
“그러했습니다.”
귀족들에게 샴페인 잔을 가져다주는 등의 잔심부름이나 하는 하급 시종. 그 하급 시종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폐하의 시종장?’
그것도 최측근이었다. 황제가 제 손발처럼 쓰는 이였거늘. 그 자존심에 하급 시종처럼 분하고 굽신거리며 귀족을 안내하는 작태라니.
너무나도 수상한 일이었으나 다들 빠져나가기 바빠서 그런 사소한 점을 짚을 새는 없었다.
딸의 구명을 바라는 아비의 절박한 마음이 빚어낸 결과였던 것인지, 얄궂게도 그만이 이상한 점을 눈치챘던 것이다.
“딸아이를 풀어 달라는 저는 기사들에게 저지당하여 돌아가야 했지만, 똑똑히 보았습니다.”
제가 떠나는 순간까지도 폐하의 시종장과 함께 들어간 자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을요.
‘아마 볼 일을 마치고 난 후에나 나왔겠지.’
화장실에 가는 볼일은 아니어도, 황제와의 만남을 가지고 돌아갔을 것이다.
‘시종장은 이미 매수되었던 자란 말인가?’
쥐새끼처럼 응달에 숨어 있는 에덴의 광신도들이었다. 그들이 정식으로 약속을 잡고 오는 것은 어려웠다.
하물며 제국의 황제는 만나고 싶다 하여 바로 약속을 잡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닌데.
‘황제의 최측근으로서 일정 관리까지 겸하는 시종장을 통해서라면 가능했겠지.’
아슬란은 자작에게 들은 바를 토대로 차분히 상황을 판단했다.
통탄할 일이지만, 수석 시종장은 이미 에덴에 매수되었거나 교단의 끄나풀일 확률이 높았다. 그것이 자발적인 의지인지, 아니면 윈블 영애의 일처럼 조종되어 벌어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사실은 밝혀졌다.
“그, 그렇다면…… 정말 황제 폐하께서 불온한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말이오?”
황제가 수상한 자와 접촉을 했으며, 그다음 날 윈블 자작 영애가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것.
“적어도 무관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윈블 자작이 인정했다. 모여 있던 귀족들은 참담함에 입을 열지 못했다.
‘황제가 귀족가의 여식의 죽음을 방관하고, 은폐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를 모를 자는 없었다. 황제가 귀족을 쓰고 갖다 버릴 말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니.
황제가 손을 잡은 세력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위협적이었다. 다음 귀족이 음모에 휘말려서 죽을지도 모르는 일.
“어쩌면 내가 죽을지도 모르지.”
체념하듯 읊조리는 윈블 자작의 말에 모두 파드득 어깨를 떨었다. 아슬란은 논외였다. 그는 고요한 물처럼, 다만 듣고만 있었다.
“……이제 와 이런 중대한 사실을 털어놓는 이유가 뭐요? 연회장에서 말했으면……!”
“말했으면, 상황은 더욱 안 좋아졌을 것이오. 아예 내 가족 전체가 몰살당했을 수도 있겠지.”
“그런…….”
윈블 자작은 우울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럴 정신도 없었지. 머리가 이상해진 것처럼, 그자에게 해가 될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역시 사특한 주술 때문인가…….”
“이미 먼 옛날에 이단을 믿는 자들을 쫓아내고 사악한 주술 따위는 지워 버리지 않았나?”
“어째서 폐하께서 잘못된 선택을…….”
좌중이 시끄러워졌다. 제국을 다스리는 어버이란 존재인 황제가 저지른 사건에 단단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슬란만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수긍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전엔 그렇게 빠르게 무너졌던 것인가.’
적어도 이번에는 얼빠진 놈처럼 허겁지겁 대처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었다.
‘그녀가 날 봐줄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봐야 적어도 후회든 미련이든 남지는 않겠지.
“……폐하께서 저희를 먼저 저버리셨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은 겁니까?”
누군가 던진 질문이 도화선이 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았다.
그 시선의 끝에는 그들의 수장인 윈체스터 공작, 아슬란이 있었다.
“답을 요구하는 얼굴들이로군. 그대들이 나를 추궁할 처지가 아닐 텐데 말이야.”
“각하시라면…… 적어도 저희를 버리시진 않을 것이라 사료되어.”
“버린다라.”
‘사실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 따위는 버리고 싶다만.’
아슬란은 그를 바라보는 기대와 희망의 눈동자에 비춘 그 자신을 보았다.
스스로에 대한 경멸과 회한으로 지친 영혼이 겨우 껍데기를 부지하고 있었다.
‘버리는 건 안 될 말이겠지.’
그녀라면 원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미워도 제 사람이니 끝까지 책임질 수 있어야 우두머리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아까 내가 윈블 자작에게 피를 먹인 것을 보았겠지.”
아슬란의 말에 귀족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보았습니다.”
“그것이 작금의 사태를 헤쳐 나갈 전력이 되어 줄 것이다.”
“예?”
어리둥절한 눈빛이 얼굴 위로 따갑게 와닿는다. 아슬란은 폐부 깊숙이 공기를 머금고 무게감을 실어 말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자, 폐하에게 접근한 무리들에게는 사람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 자가 있다.”
“그 말씀은…….”
“그자들의 간계를 피하는 데 내 피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슬란이 낮게 내리뜬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깊은 호수의 물빛과 같은 벽안이 반짝였다.
“데벤테르 후작 부인에게 내 피를 사용한 세뇌용 대비 포션을 만들어 달라 부탁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