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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74화 (74/166)
  • 74화

    그러나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을 빼놓고서.

    눈을 뜬 사람들은 아슬란이 잡고 있는 검자루에 흐르는 피를 보고 놀랐다.

    “뭘 그리 놀라나. 내가 설마 사람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그렇게 보였다면 정말 실망인데. 내 인품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다는 소리니.

    “각하……?”

    “왜, 팔을…….”

    아슬란이 벤 것은 그 자신의 팔이었다. 크게 베인 것은 아니었고, 소리만 요란했을 뿐이었다.

    ‘내 짐작대로라면 내 피는 아벨의 세뇌를 푸는 효과를 보일 수 있을 거야.’

    데니스가 불러일으킨 기억뿐만이 아니라 아벨의 어린 외형과 연회장 복도에서 마주친 때를 떠올린다면 유추 가능한 지점이었다.

    ‘그때 머릿속으로 세뇌를 깨우는 목소리가 울렸지.’

    웬 여자의 목소리였다. 단호하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며 다급하게 외치던 그 선명한 목소리 덕분에 아벨의 같잖은 꾐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 윈블 자작이 괴로워하는 것, 그리고 아슈라 윈블이 과도한 광기로 연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을 때 그녀의 눈에서 보인 푸른 기운은 연관성이 있으리라 봤다.

    아슬란은 붉은 피가 뚝뚝 흐르는 팔을 가져다가 윈블 자작의 입가에 가져가려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윈블 자작 부인은 대경실색하여 아슬란에게 그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고, 공작 각하! 대관절 그게 무슨 해괴한 짓이랍니까!”

    “이상하게 보일 것은 알고 있네. 그렇지만 자작에게 내 피를 먹이면 나아질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하지만…… 사람의 피를 먹는다니요. 야만족도 아니고 어찌 그런 일을.”

    사람의 피를 마시는 일은 마수나 할 법한 행동이었기에 꺼릴 만도 했다.

    ‘당장 모여 있는 인원들부터가 날 수상쩍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고.’

    아슬란의 돌발행동에 놀란 사람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재고 있었다.

    녹슬고 늘어진 감이 있어도 그들은 북부를 지키던 자들의 후예였다. 남녀 가릴 것 없이 아슬란이 그들이 따르고 있는 윈체스터 공작이 아니라면 바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점은 변하지 않았군.’

    그래, 그래서 나는 그대들을 믿었는데.

    어쩌다 잘못된 길을 걸어 우리 모두가 몰락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나.

    ‘그 일만은 막아야 한다.’

    루스벨라, 그녀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컸으나 그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아벨의 세뇌를 깰 방법을 찾아 두는 것은 중요했다.

    “윈블 자작 부인,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어. 그대의 남편을 우선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나.”

    “의, 의원을 부르면 될 일입니다. 이이도 각하의 피를 마시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죽음을…….”

    자작 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윈블 자작이 입에서 거품을 내뿜으며 경련하기 시작했다.

    “여보! 어, 어서 빨리 의사를!”

    그리고 아슬란은 똑똑히 보았다.

    ‘자작에게서도 푸른 기운이 보인다.’

    아슈라 윈블 자작 영애의 눈에서 보였던 불길한 푸른 기운이, 윈블 자작의 허옇게 까뒤집힌 눈에서도 희미하게 관찰되었다.

    아슬란과 북부에서 온 귀족들이 모인 장소는 윈체스터 공작이 소유한 타운 하우스 중 하나였다. 부상병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언제나 의사가 대기하고 있는 북쪽의 성채가 아니었다.

    ‘의사를 부르기 위해서는 아무리 빨라도 30분은 걸릴 거야.’

    그러면 너무 늦는다. 윈블 자작이 보이는 경련 증세는 마치…… 암살자들이 임무에 실패하여 독약을 삼켰을 때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무엇인지는 몰라도 윈블 자작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목숨과 함께 앗아 갈 작정이로군.’

    질이 나쁜 놈들이었다. 딸에 이어 아비의 목숨까지 앗아 가려 들다니.

    “윈블 자작 부인.”

    “……예, 각하.”

    자작 부인은 짧은 시간 내에 눈물범벅이 되어 얼굴이 엉망이었다. 남편까지 잃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고스란히 공포 서린 표정에 드러나 있었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나를 믿어 주게. 내가 옳은 선택을 했다는 것을 멀쩡해질 자작을 통해 보여 주겠다고 약속하겠네.”

    시간이 없었다. 윈블 자작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굴었고, 확신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 주는 주군이 있었다.

    남편이 죽는 것을 바라만 볼 수는 없으니 선택지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령 윈체스터 공작이 미쳐서 지껄인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 해도, 공작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작의 신변을 그가 책임지겠다고 한 이상 명예는 잃지 않으리란 계산도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제 남편을 살려 주세요.”

    “염려 마시게.”

    자작 부인의 허락을 얻어 내자마자 아슬란은 사람들을 불러 자작의 몸을 부여잡고 기도를 확보했다. 입가의 거품을 대충 닦아 내고서 그의 피를 자작의 입가에 대었다. 선홍색의 피가 방울져 자작의 목구멍 너머로 넘어갔다.

    꿀꺽. 무의식적으로 자작의 몸은 입 안에 들어온 것을 삼켰다.

    ‘통해라!’

    아슬란은 간절히 빌었다. 그의 피가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기를. 그리하여, 다가올 절망을 피할 수 있도록 희망의 끈을 내려 주기를.

    다행스럽게도 아슬란의 피가 윈블 자작에게 흡수되면서부터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윈블 자작의 눈가에서 보이던 푸른 기운이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슬란만큼은 그 변화에 눈에 띄게 안도했다.

    “세상에…….”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거지?”

    “각하께서는 치유사의 핏줄을 타고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평범한 이들의 눈에도 자작이 안정되어 가는 것이 보였다. 뒤집혔던 눈은 얌전히 원래 상태로 돌아와 동공이 보였고, 입가에서는 거품이 더 나지 않았다. 그리고 심한 경련은 가라앉아 자작의 몸은 긴장이 풀렸는지 축 늘어졌다.

    “……고비는 넘긴 것 같군. 이제 괜찮을걸세.”

    “정말 감사합니다, 각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는지…….”

    남편이 무사함을 확인한 자작 부인이 연신 허리를 깊이 숙여 아슬란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감사를 전하고 싶거든, 내가 아까 말한 대로 황제 폐하께 영애의 억울한 죽음을 재조사해 달라고 말하게.”

    “저희도…… 그러고 싶습니다. 세상 어느 부모가 보상금 몇 푼 받는다고 딸자식 잃은 고통이 사라지겠습니까.”

    “하면?”

    윈블 자작 부인은 남편을 부여잡고 그가 왜 보상금 따위에 입을 막으려 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이상하게도 사건을 은폐하려는 기색이 다분하셨습니다. 검시관들도 움직이지 않았죠.”

    장내가 웅성거렸다. 이 발언은 위험할 수 있었다. 황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이상, 반역의 뜻이 있는 것 아니냐는 추궁을 들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 말에 거짓이 없다고 책임질 수 있겠나?”

    아슬란의 질문에 자작 부인은 열심히 긍정의 뜻을 나타냈다.

    “물론입니다, 각하. 죽은 제 딸아이와,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예를 걸고서 말씀드릴 수 있는 바입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황제는 아벨과, 그러니까 에덴과 결탁을 했다.

    ‘무엇을 미끼로 황제 폐하를 꼬드겼을지는 대충 예상이 가.’

    뻔했다. 그들이 집착하는 영생을 대가로 걸고 회유했을 가능성이 컸으므로.

    ‘평생을 내 영지에 헌신하고, 제국에 충성하는 동안 황제라는 인간이 눈이 멀어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줄도 몰랐구나.’

    그러나 지금이라도 깨닫게 된 것이 어딘가. 더 늦게 알았다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붙들고 우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아슬란이 알아낸 정보들을 정리하는 사이 귀족들이 슬그머니 다가와 질문 공세를 하기 시작했다.

    “각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람을 살리는 피라니…… 치유사의 능력이 뒤늦게라도 나타나신 겁니까?”

    “윈블 자작에게 피를 먹이면 나을 거라는 확신은 어디에서 얻으셨습니까?”

    “설마 새로운 전염병은 아니겠지요? 이곳은 무려 수도인데…….”

    모여 있던 이들은 긴장이 풀린 탓인지 질문을 너 나 할 것 없이 아슬란에게 퍼부었다.

    “그만, 그만. 다들 궁금한 것은 알겠지만 엉뚱한 추측으로 불안에 빠지지는 말도록.”

    아슬란이 웅성거리는 사위를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보내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묻고 싶을 것이 많은 줄 안다. 그중에서도 우선 대답을 한다면, 제국을 위협하는 세력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적은 제국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썩은 내를 풍기고 있다.

    귀족들의 걱정스러운 눈빛 교환이 이루어졌다. 감히 어떤 자가 제국의 평온을 깨려 한다는 것인지, 내전으로 이어질지에 대한 불안이었다.

    아슬란이 피를 윈블 자작에게 먹이던 것처럼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자작을 살린 일로 방 안의 사람들은 아슬란의 말이 사실일 거란 쪽에 추를 더 걸었다.

    “혹시 그 불온한 집단이 황제 폐하와 연관이 있는 겁니까?”

    용감한 누군가가 추가 질문을 던졌다. 아슬란은 그 물음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볼 수 있네. 그게 아니라면, 고작 이룰 수 없는 소유욕을 사랑이라 착각한 귀족 영애의 죽음을 무슨 이유로 은폐하려 들겠나.”

    “아무리 그래도 설마…….”

    “폐하께서 그러실 이유는 그럼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거기다, 심증만 존재하는 것 아니십니까, 각하?”

    그래도 혼란스러움은 남아 있어 몇몇 사람들은 차마 황제가 교단의 꼬임에 넘어갔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보!”

    “일어났나, 윈블 자작?”

    기절해 있던 윈블 자작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부인이 몸을 받쳐 주어 무리 없이 상반신을 세운 그가 말했다.

    “……예, 공작 각하. 어리석은 가신이 지켜야 할 주군에게 목숨을 빚졌으니 이 부끄러움을 무어라 다 표현할 수가 없군요.”

    “형식적이고 따분한 인사를 생사의 고비를 넘긴 시점에서도 해야겠나, 자작?”

    “아닙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윈블 자작은 호흡을 한 번 고른 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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