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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73화 (73/166)
  • 73화

    데니스와 루스벨라가 성력 증진제를 만드는 데 힘을 쏟는 사이, 아슬란은 대대적인 청소를 하고 있었다.

    “공작님!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뭐긴, 틀어진 북부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이지.”

    바로 사람 청소였다. 데니스에게 기억을 주입당한 이후 아슬란 윈체스터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로 돌아와 북부의 인사를 정리하고 있었다.

    우선적인 척결 대상은 건국제 연회에서 루스벨라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자들이었다.

    “저자들을 포박하라. 잘못한 이들이 사죄를 하지 않으니 내 저들이 따르는 북부의 수장된 도리로서 책임을 다해야지.”

    “고, 공작님!”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그들은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되었다.

    ‘심해야 벌금형 아니었나!’

    ‘분위기는 보상을 하지 말자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건만!’

    해당되는 귀족들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아슬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뭐지. 변명할 거리라면 듣고 싶지 않은데.”

    싸늘하기가 몰아치는 한파보다 매서웠다. 아슬란에게서 살기마저 전해지고 있었다. 더 붙들고 있다가는 손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위협마저 들었다.

    “할 말이 있나?”

    “사과, 하겠습니다. 전 약혼녀…… 가 아니라, 데벤테르 후작 부인. 그분께 가서 사죄를 요청드리겠습니다.”

    “저, 저는 보상금도 넉넉히 넣어 직접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잘못이 있으나 넘어가려던 귀족들은 앞다투어 자존심은 내려놓고 루스벨라에게 참회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서, 왜 바로 하지 않았나?”

    그대들은 그녀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던가?

    “나도 우습게 보인 것 같군. 나는 홀로 데벤테르 후작 저를 찾아가 어찌하면 그녀에게 죄를 갚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달려갔는데 말이야.”

    “헉.”

    “세상에.”

    “북부의 수호자이자 우두머리로서 자존심이 있으시지, 어찌 그런……!”

    용서해 달라 매달리던 것도 잊고 귀족들이 아우성을 쳤다. 참새가 짹짹거리듯, 그들은 저들이 모욕당한 것처럼 성을 냈다.

    “공작 각하께서는 체면을 땅에 던진 셈이 되시는 겁니다! 북부를 대표하는 분께서 구차하게 홀로 후작 저를 찾으시다뇨. 선대 공작 부인께서 보셨다면!”

    “보셨다면, 뭐 어쩔 텐가.”

    현 북부의 윈체스터 공작은 바로 나인 것을.

    아슬란에게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위압감이 스멀거리며 공간을 장악했다.

    ‘숨이…….’

    ‘잘 안 쉬어질 정도잖아.’

    제국이 세워진 이래로 북부의 공작들은 강인하기가 철과 같고, 그 위상이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는 평이 기록으로도 자자하다.

    하지만 세월은 흐르고 흘러 그런 이야기는 옛날에나 통하는 것이라며 흘려듣는 이들이 많아졌다.

    여전히 북부의 공작은 건재하고, 무력 또한 녹슬지 않았으나 그의 밑에 변함없는 충성을 약속했던 이들의 후손은 해이해진 것이다.

    썩 성실한 편은 아니었던 선대 공작인 아버지의 자리를 메꾸려던 아슬란도 업무에나 냉정한 편이었다. 그의 사람들이라 판단한 북부의 가신들에게는 유한 포용력을 보여 주었다.

    이는 선대 공작 부인의 입김 또한 없지 않았다. 그녀가 남편인 선대 공작의 바람으로 절망했을 때, 공작의 내연녀가 죽도록 협조한 것이 북부의 가신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좋은 주인이 되도록 하세요.’

    아슬란은 아버지보다 좋은 영주가 되겠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해서 그는 어머니의 말을 절대 무시할 수 없었고, 가신들을 웬만하면 감싸 데려가는 방향으로 북부를 이끌었다.

    ‘그 결과가 지금 이렇게 우리 발목을 잡게 된 것인가.’

    식은땀을 흘리는 귀족들 위로 서늘하고도 낮은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억울한가? 내가 지금 강압적으로 구는 것이?”

    “……이런 분이 아니셨잖습니까. 갑자기 왜…….”

    “갑자기, 왜라. 그건 그대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아둔한 저희들의 머리로는 공작 각하의 심기가 어째서 어지러워졌는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한 귀족이 조심스레 말을 얹었으나 아슬란의 신랄한 비판이 바로 이어졌다.

    “말은 잘하는군. 기름칠한 뱀의 혓바닥처럼 유려하기 그지없어. 그대들은 내가 그토록 다루기 쉽게 보였던가?”

    “아, 아닙니다.”

    “아니긴. 어린 나이에 공작의 지위를 받은 나를 길들인 짐승 취급하며 그대들 뜻대로 움직이도록 유도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인데.”

    아슬란은 공작의 핏줄만이 다룰 수 있는 거대한 대검을 한 손으로 가볍게 허공을 휘두르며 말했다.

    “예를 들면 내 전 약혼녀의 일이 그렇지 않나. 이제는 데벤테르 후작 부인이 되어서도 그 사람에게 반성조차 하지 않고 있어 그대들이야말로 북부의 체면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을 정녕 모르나?”

    “저희는……!”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는 소리는 그만하지. 듣자마자 역겨워서 실수로 검을 휘두를 것 같으니까.”

    피를 볼지도 모른다는 협박은 무시무시했다. 귀족들의 입이 싹 다물렸다.

    ‘진심이시다.’

    진정으로 아슬란은 귀족들을 베어 버릴 것처럼 화가 나 있었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아슬란의 분노 대상에는 그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가 엉망으로 북부에서 쫓겨나게 해서는 안 되었어. 더 큰 잘못을 저지르기 전이라서 다행이지만, 이토록 엉망인 줄은 몰랐군.’

    아슬란은 깊이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었다. 공작으로서 아랫사람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죄가 통렬히 그의 심장을 헤집어놓았다.

    식지 않는 불과 같은 감정을 억누르고 아슬란은 겁에 질려 떠는 북부의 귀족들에게 말했다.

    “내가 직접 데벤테르 후작 저를 찾아갔으나, 그들은 나를, 북부를 신뢰할 수 없다며 사죄의 물건들을 받아 주지 않았다.”

    ‘아니, 뭐 그런?’

    이 대목에서 귀족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뻔했다. 윈체스터 공작이 혼자 찾아갔거늘 냉랭하게 대했다니 그들의 뺨을 세 대는 처맞은 것처럼 분기가 끓었다.

    “조용. 나와 그대들이 데벤테르 후작 부인이 북부에 있을 적 끼친 누를 생각한다면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마땅히 벌어져야 할 일이었다.

    “감수해야 할 절차이기도 했다.”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끼어들면 큰일 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으니까.

    “이제야 우리가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건데…… 그것을 망치려고 한다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 그렇다면 저희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공작 각하?”

    그나마 베짱이 있는 사람 하나가 아슬란에게 손을 들고 질문했다. 아슬란은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더니 대답했다.

    “데벤테르 후작이 하는 일에 협조해라. 그의 발언에 힘을 실어 주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든 힘을 보태라.”

    그게 그대들에게 내가 바라는 바다.

    “그리고…… 윈블 자작 영애의 일 또한 재조사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작성해 주었으면 한다.”

    구석에 앉아 있던 윈블 자작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자작은 있는 용기와 없는 용기 모두를 끌어다 애원하듯 소리를 질렀다.

    “이미 제 딸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조사가 결론지어졌습니다. 딸을 두 번 죽이는 짓은 아비로서 할 수 없습니다!”

    “자네야말로 딸이 그러지 않을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그건…….”

    윈블 자작은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신전과 결탁한 황제의 압박에 못 이겨 재조사할 의지가 없다고 서류에 사인해야만 했다. 욕심 많고 야망 넘치던 딸이 허망한 결말을 택할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부모인 그가 잘 알았다.

    “이대로 영애의 죽음이 묻히기를 바라나? 누가 진짜 원수인 줄도 모른 채로?”

    북부의 인간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나약해졌지?

    윈블 자작이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자식을 죽인 자가 있다면 그의 목덜미를 뜯어 죽이고, 내 부모를 해친 자가 있다면 그자의 목을 단칼에 베어 성문에 걸어 놓고, 내 이웃을 겁박한 자가 있다면 다 함께 뜻을 모아 그를 물리치는 것이 북부의 정신 아니었나?”

    “……공작 각하.”

    “썩어 빠진 정신은 내려놓고 들으라. 북부의 가신들이여. 그대들이 정말 우선으로 여겨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나?”

    “……아닙니다.”

    아슬란의 말에 더는 반박할 자는 나오지 않았다. 북부의 귀족으로서 잊고 있던 긍지를 주인 된 자가 되새겨 주니 부끄러움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외부인을 꺼린다고 해도, 우리가 각하의 약혼녀 되는 분을 그렇게 배척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지?’

    컴컴한 밤하늘과 같던 마음이 조금씩 개고 있었다. 이제껏 묻지 않았던 질문들이 차차 의식의 수면 위로 기어올라 그들에게 답을 요구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녀에게 잔인하게 굴었는지를.

    ‘모르……겠다.’

    윈블 자작은 특히 극심한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작은 딸인 아슈라 윈블이 언제부터 표독스럽게 굴기 시작했는지 찬찬히 짚어 보았다.

    ‘신전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났다고 했던 것 같았다. 흐릿해진 기억 속에서, 이젠 죽은 딸은 누구를 만났다고 했던가.

    “으윽.”

    떠올리려니 극심한 두통이 일었다. 자작이 고통에 머리를 붙들고 몸부림치자 자작 부인이 놀라 도움을 요청했다.

    “여기! 여기 의사를 좀 불러 주십시오! 제 남편이 아픕니다.”

    딸을 잃은 후로 자작 부인은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날카로워진 그녀의 신경은 남편마저 잃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슬란은 그것을 보더니 거침없이 자작 부부에게 다가섰다.

    “공작 각하! 어서 의사를…… 각하?”

    “의사를 부를 필요는 없다. 그의 문제는 아마 내가 해결책을 줄 수 있을 듯하군.”

    아슬란이 검을 치켜들었다. 검날이 우중충한 날씨와 더불어 더욱 무섭고 서늘하게 느껴졌다.

    ‘설마 죽이시려는 건가!’

    “안 됩니다, 각하!”

    귀족들이 일어나 아슬란을 말리려고 했다.

    촤악, 하고 검이 살갗을 베는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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