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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72화 (72/166)

72화

제이크는 그 사이에서 들은 내용은 차분히 정리하여 데니스에게 물었다.

“그럼, 내일부터 바로 마님과 성력 증진제 생산 공정에 들어가면 될까요?”

“그래. 되도록 빨리.”

“알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로 공방을 마님께 만들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루스벨라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최상급으로, 아낌없이 예산을 퍼붓도록.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후작님께서 가장 먼저 숙지하라 내린 사항이시니까요.”

제이크는 익숙하게 데니스의 명을 받아 움직일 채비를 했다. 해가 저물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바로 마차를 불러서 이동할 태세에 알렉은 혀를 내둘렀다.

“좋아. 그럼 여기까지 하고…… 우리는 이만 들어가지.”

알렉은 저도 후작 저에서 하루 묵는 것인 줄 알고 따라서 일어서려 했다. 데니스가 그런 알렉을 저지했다.

“넌 지금 당장 에덴으로 이동해야지.”

“네? 자고 가는 거 아니었어요?”

“창피한 꼴을 당했는데, 더 붙어 있으면 의심의 여지만 더 주게 될걸.”

그건 그랬다. 데니스의 말대로라면 알렉을 감시하던 사람들은 아직도 후작저 근처를 맴돌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처음 알렉이 손가락만 빨며 주변을 돌아다녔던 것처럼 허술하진 않겠지만.

“으, 밤중에 돌아다니는 거 질색인데.”

알렉이 데니스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지만, 어쨌든 그도 고위 사제 가문 출신이었기에 곱게 자란 도련님 축에 속했다.

데벤테르 후작 가문만큼은 아니어도 풍족하게 삶을 살아왔던 터라 알렉은 대동하는 하인 없이 혼자서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하는 이 상황이 어색하고도 불편했다.

마음껏 투덜거리는 알렉을 데니스는 신기하게 바라봤다.

“……사랑받고 자란 자식인가 보네, 넌.”

“뭐, 그런 편이죠. 한량으로 나돌아 다닐 때도 집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며 포기하지 않으신 집안이니까.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말하고 나서야 알렉은 조금 후회가 들었다.

‘어…… 예민한 사안이던가, 이거?’

데니스 데벤테르가 선대 후작 부인의 장자로 태어났어도 사랑받고 자라지 못한 것은 유명했으니까.

“저 괜한 말을 한 겁니까.”

“아니, 상관없어. 이제는 딱히. 들어도 아무 감정도 안 드니까.”

‘아무 감정도 안 들면 그런 말도 안 하지 않나.’

그렇지만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당장 해야 하는 일부터 처리해야 하기도 했고.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성력 증진제의 일로 더 지시할 사항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통신구로 말씀하시고요.”

“가기 전에 충분히 핍박받고 탈출한 것 같은 교단의 개 이미지가 맞는지 점검 한 번만 해라.”

“……이만하면 되지 않았어요?”

“진짜 맞은 것처럼 보이는 게 제일 믿음직스러운데.”

“……저 때리지 마세요. 맞는 건 진짜 사양합니다. 이래 봬도 저도 귀하게 자란 아들입니다…….”

알렉은 필사적으로 매는 피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했다. 반은 농담, 반은 진담으로 한 말이었던 데니스는 피식거리며 알았다고 알렉을 안심시켜줬다.

“그, 그 포션! 그거 주십쇼.”

“아, 성력 증진제? 뭐에 쓰려고?”

“데벤테르 후작 저 탈출기 설정에 그 포션을 넣어 보려고요. 마침 후작 부인은 치유사고, 치유 포션을 만들 줄 아는 분이시니 도망칠 때 그걸 마셔서 회복되었다고 말하면 되겠죠.”

“성력 증진제는?”

“허니버터 상단에서 수입한 걸 데벤테르 상단이 더 비싸게 팔려는 조짐이 보인다고 살짝 귀띔하면 되지 않을까요?”

데벤테르 후작 가문으로 인해 약이 오른 신전의 충동 구매욕을 올리겠다는 소리였다. 데니스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보기 싫은 인간들의 무거운 엉덩이를 걷어차서 움직일 수 있는 계책이었으니까.

“나쁘지 않은 시나리오네. 좋아. 가져가.”

데니스는 알렉에게 빈 포션 병 하나와 성력 증진제를 줬다. 알렉은 품속에 그것들을 잘 갈무리하고 심호흡하더니 과장스러운 태도로 뛰어나갔다.

그에 맞춰 데니스와 제이크도 호응해 줬다.

“신전의 끄나풀이 도망친다, 놓쳐서는 안 된다!”

“죽이지 말고 생포해라. 독한 놈인지라 빼내지 못한 정보 투성이야.”

물론 미리 말을 해 둔 덕에 병사들은 알렉을 단숨에 잡아 왔던 때보다는 설렁설렁 움직였다. 표정만 야차 같았지, 움직임은 다소 굼떴다.

‘으아아! 대사를 왜 저렇게 현실감 있게 날리는 건데!’

……불쌍한 알렉의 입장에서는 진짜 잡히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순간이었지만 말이다.

다행히 그 덕에 감시역들이 속았는지, 맨몸으로 도망치는 알렉의 뒷덜미를 낚아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컥. 누, 누구냐!”

‘에이씨, 무슨 짐승 낚아채듯 잡는 건데?!’

잔뜩 억울해졌지만 겉은 정말이지 침착한 낯을 유지한 알렉이었다.

“알렉 사제. 에덴의 장로님께서 보낸 사람입니다.”

“다소 거칠고 무례하게 잡은 점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곧 잡힐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겁이 나서. 죄송합니다.”

무뚝뚝한 감시역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가 없었다.

‘내가 정보를 빼앗길까 봐 그게 두려웠겠지. 내 안위는 신경 쓰이지도 않을 거면서.’

알렉은 아벨을 떠올렸다. 사람 목숨을 파리보다 못하게 여기던 그 괴물 밑의 사람들이 정상적일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사람을 기물로나 보지 않으면 망정이지.

“……아닙니다. 도망치던 중에 구세주 같은 등장이었는걸요.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가식적인 소리에는 똑같이 가식적인 소리로 응수했다. 부러 구세주라는 단어도 사용하니 감시역들의 어깨가 조금 으쓱해진 것 같았다.

“에덴으로 돌아갑시다. 장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임무에 실패했는데, 괜찮을까요?”

“장로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니 걱정은 마시길 바랍니다.”

‘자비롭기는 개뿔이.’

에덴이 유지되는 원동력이 영생에 대한 욕망이란 것을 안 이상, 장로는 알렉에게 있어 추악한 인간일 뿐이었다.

“아아, 우리의 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분이라 그런 걸까요? 감사하기도 해라.”

진심이 전혀 섞여 있지 않은 말이었지만 감시역으로 온 사제 둘은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럼요. 저희도 장로님과 같은 영광을 누리며 살고 싶을 따름입니다.”

‘아, 네. 그러시겠죠. 광신도 새싹들아.’

구역질을 삼켜 가며 알렉은 웃었다. 기왕이면 고용주인 데니스의 미소를 따라 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리 충성스러우니 머지않아 꿈을 이루실 겝니다.”

반어법이었다. 그런 무서운 꿈 따위는 개나 주라고 저주하는 말이었다.

***

“루스벨라, 받으세요.”

“……이게 뭔가요?”

루스벨라의 손 위로 열쇠 하나가 떨어졌다. 이윽고 서류 하나도 같이 주어졌다.

“건물 열쇠에요. 루스벨라 명의로 되어 있는 거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볍기만 했던 열쇠가 퍽 묵직하게 여겨졌다.

‘이젠 건물로 승부를 보는 건가?’

“누누이 말했지만, 저는 부담스러워서 더는 이런 것 받지 않겠다고…….”

“음? 이건 전에 말했던 성력 증진제를 만들 공방 열쇠에요.”

“……아.”

“이번만큼은 부담 주려는 선물이 아니라 공적인 일 해결하자고 드리는 업무용 전달이었는데.”

내가 루스벨라를 기대하게 만든 건가요?

그렇게 묻는 데니스의 잘 익은 딸기 같은 붉은 눈동자야말로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창피하다.’

루스벨라는 어느새 데니스로부터 등을 돌리고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 있었다.

‘이렇게 받기만 하는 생활이 얼마나 되었다고 잔뜩 풀어졌지?’

당연히 그가 그녀를 위해 또 준비한 선물이라고 착각해 버렸다. 데니스는 불쑥 선물을 준비하기를 좋아했으니까.

그리고 루스벨라의 말을 귀담아듣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은 적었기에 그가 그만할 거라는 기대를 걸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기에.

“미, 미안하…….”

“기뻐요.”

‘……어라.’

왜 저렇게 그는 가끔씩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저렇게 애처롭게,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는 표정과 눈빛으로 그녀를 뒤흔들었다.

낯설어서, 그래서 더 놀라운 얼굴.

‘아, 알았어.’

저건 상대에게 무한한 애정을 가진 자의 얼굴이었다.

루스벨라가 지펠론으로 살 때는 저런 표정으로 그녀를 보기를 갈구했으나, 본 적이 드물어 마음이 아팠던 행복한 얼굴이었다.

“당신이 나로 인해 무언가를 기대하는 나날을 얻었다는 게 정말 기뻐요.”

데니스가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따뜻한 봄바람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사르르 녹여 버리는 미소에 루스벨라도 얼떨결에 웃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

“……저도 그래요.”

손에 든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열쇠조차 귀한 것이었다. 금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녀의 눈동자 색과 맞춘 것이기라도 한 것인지 작은 에메랄드 하나가 장식되어 있었다.

“저도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루스벨라 소유의 공방은 처음이었다. 그녀에게 치유사의 자질과 더불어 연금술의 재능이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쥐꼬리만 한 재능이라 하여 관심을 두는 이들은 없었다.

아슬란의 약혼자로 있던 시절에는 없는 것이 나은 취급을 받았다. 약혼자가 아니라 포션을 찍어내는 일꾼으로서 부당한 대우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3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공방으로 쓰라며 열쇠를 건네준 데니스의 호의가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그가 웃어서 그녀도 웃었다.

써준 씀씀이의 여부를 떠나서 그녀를 챙겨 주는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나와 결혼해 줘서 고마워요, 데니스.”

‘……아.’

밝은 태양빛 아래에서 푸르게 빛나는 녹색 눈을 휘며 활짝 웃는 루스벨라는 정말 아름다웠다.

‘나, 잘하고 있구나.’

그녀가 웃어서 기뻤다. 그리고

[그래. 잘하고 있다. 계약자야.]

잠잠하던 잊힌 신의 사념도 어쩐지 벅찬 감정을 실어 데니스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아이가 저리 환하게 웃으니 행복하구나. 고맙다.]

‘그쪽이 고마움 느끼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가 좋으니 되었다. 우는 얼굴이 아니라 웃는 얼굴을 기억할 수 있어서, 망막에 선명하게 새길 수 있어 그도 행복했다.

‘당신이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해요.’

“열심히 해 볼게요. 성력 증진제 생산. 저도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된 이상 게을리하지 않을 거예요.”

“너무 무리하지만 말아요.”

루스벨라가 무리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걸 위해서 3층짜리 건물에 공방 말고도 호화롭게 꾸민 휴게실을 비롯해서 채워 넣은 것들이 많으니.

거기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실력 좋은 호위까지 붙여 두었으니 부족할 것은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비슷한 생각을 했다.

‘살아 있길 잘했다.’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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