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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70화 (70/166)

70화

‘나는 그런 식으로 루스벨라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하지만 정말 그 말에 양심을 걸고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야.”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그가 사랑에 대한 어떤 징조를 포착했건 간에, 데니스는 앞서 그가 말한 것처럼 그녀를 감히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너 때문에 그녀가 죽은 거야!”

듣기 싫은 말이 떠올라 머리가 아팠다. 데니스는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꾹꾹 눌렀다. 머리만 잘못된 것이 아닌지, 심장 또한 요동치고 있었다.

‘아파.’

언제나 익숙지 않은 고통이 해일처럼 차올라 그를 덮친다.

신의 사념이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건 너 때문이 아니다, 계약자야.]

‘압니다.’

그의 속에 있는 잊힌 신의 사념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렇지만 데니스는 절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설령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정말이라고 해도.

때로는 살면서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일들이 있었다. 그게 데니스에게는 루스벨라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었다.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내게는 없어.’

그렇기에 부정했다.

심장의 고동과 고통이 모두 그녀를 가리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시긴요. 두 분이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이셨는데. 평소에도…….”

“제이크. 아니라면 아닌 거야.”

“하지만,”

“두 번 다시 그런 소리 하지 마. 아니라면 아닌 거야. 알아들었어?”

“……예.”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에덴을, 신전 측을 무너뜨리는 일이야.”

데니스가 화제를 돌렸다. 제이크와 알렉은 어째서 그가 이렇게까지 거부 반응을 보이는 건지 알고 싶었지만, 불편해 보이기에 참았다.

‘괜히 남의 아픈 구석 건드려서 좋을 게 뭐가 있겠어.’

“좋은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있지. 아예 뿌리부터 뽑아내서 존재하지도 못하게 하는 것.”

“그게 가능할까요?”

현재 제국 내의 신전의 입지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과거, 몰락한 제국에서의 교황의 권력은 황제와도 대등했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지금은 미약한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신앙은 사람들의 믿음을 근간으로 스며드는 것.

몇백 년이나 흘러 당연한 삶의 요소처럼 자리하게 된 국교를 단기간에 몰아내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사제 가문 출신으로서 굉장히 무서운 발언인데요? 신전을, 나아가서 국교 자체를 무너뜨린다는 건.”

“무섭다니 다행이네. 난 신전 사제들이 실제로는 성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밝힐 거야.”

데니스의 무모한 말에 알렉이 눈을 번뜩였다.

“어떻게요?”

“증명을 해야겠지. 그들이 갖고 있는 힘은 성력이 아니라, 성력으로 위장한 마력일 뿐이라고.”

세상의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신전의 사람들이 부리는 정화나 축복의 권능은 신이 내려 준 것이 아니라 본래 개인이 가지고 있던 힘이라는 것을.

오로지 진실은 교단이 깊숙이 숨겨 놓은 에덴 소속의 사람들만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는 아니지.’

모든 것을 까발릴 것이다. 그들이 가진 야욕 따위가 아무것도 꺾지 못하도록. 종래엔 발을 디디고 서 있을 땅 한 뼘도 내주지 않을 각오로.

“그들은 쉬이 나서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신전에 소속된 평신관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오히려 반발할지도 모르죠. 기댈 수 있는 신전이라는 장소가, 집이 사라지는 셈이잖아요?”

고위 사제를 배출해 온 가문의 사람인 알렉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미래였다.

신전이 비록 예전과 같은 권위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하나, 귀족들은 여전히 헌금을 낸다. 평민들도 죽어서 내세에 천국에 가길 바라며 꼬박꼬박 주말에는 신전에 가서 기도를 한다. 죽은 사람은 신전의 기도 아래 묻히며 평온을 찾는다.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들은 신전의 고아원으로 들어가 사제로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신앙의 자비로움을 전파하고 다닌다.

한 발짝 권력에서 물러난 대신 신전은 사람들의 일상으로 녹아들었다.

‘그런데 그런 신전을, 현 국교를 몰아낼 수 있겠어?’

국교가 지탱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망가진다는 뜻일 텐데 사람들이 그것을 두고 볼 수 있을까.

익숙함을 잃는 것은 제 살을 떼어 내는 것처럼 아픈 일일 터인데.

“할 수 있어.”

데니스가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치 내일 날씨는 맑겠네, 라고 말하는 것처럼 평온한 어조였다.

“이 세상에서 할 수 없는 건 없어.”

“뭘 믿고 그런 말을……. 인간에게는 불가능이라는 게, 한계라는 게 명확히 존재하잖아요?”

“그 한계를 넘어 봤다면?”

“예?”

“그렇다면 믿을 수 있겠어?”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알렉은 괜스레 제 고용주의 그 말에서 오싹함을 느꼈다.

‘방금 뭔가…… 아벨 그 괴물 같은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데?’

착각이겠지?

다시 본 데니스는 그저 좀 성격 나쁜 고용주였다. 사람이란 소리였다.

그것이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됐어요…… 어차피 저 의뢰로 묶여서 도망칠 수도 없잖아요. 이렇게 된 거, 해야 할 일 어서 해서 찝찝한 기분 싹 날려 버릴래요.”

“좋아. 군말 않고 따라 준다는 것만큼 좋은 게 없지.”

데니스가 품속에서 동그란 유리병을 꺼냈다. 안에는 황금빛의 액체가 들어가 있어 햇빛을 받자 환하게 반짝거렸다.

“그건……?”

“포션 아니에요?”

매끄러운 유리병 위로 데니스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비쳤다.

“이게 신전의 존재 의의를 흔들어 줄 카드가 될 거야.”

찰랑이는 금빛 액체를 기쁜 눈빛으로 쳐다보는 데니스의 적안이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그러니 알렉 너는 돌아가서 루스벨라와 나 사이를 뚫을 틈은 없다고 말해.”

어이가 없어도 그런 것쯤은 생각도 안날만큼 당황하게 될 테니.

***

“마력을 증가시켜 주는 포션을 만들어 줄 수 있냐고요?”

“네. 부탁드려도 될까요, 루스벨라?”

“할 수 있어요. 많이 만들어 본 적 있는걸요.”

‘마력 증진제는 북부에서 질리도록 만들어 봤으니까…….’

아슬란의 약혼자로 있던 시절, 루스벨라가 언 손을 호호 불어 가며 대량으로 만들어 내던 포션 중에는 마력 증진제도 있었다.

체력 강화제와 상처를 빠르게 아물게 하는 회복 물약과 더불어 가장 많이 만들었던 포션.

북부의 역할은 경계선을 넘어 들어오려는 적에 대한 방어선이었다. 강인한 전사들은 언제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북부의 자랑스러운 전사라는 명예를 입고서 싸우는 병사들을 위해 숱하게 만들어 본 물약은 눈 감고도 만들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 왜 하필 그 포션이지?’

루스벨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흔한 포션이니만큼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대량으로 필요한 건가요?”

“음, 맞아요. 일단은, 한…… 백 개 정도?”

루스벨라는 서둘러 펜과 수첩을 꺼내 들었다. 오랜 시간 애용해 온 가죽 수첩은 반들반들한 손때가 타 있었다.

“어느 정도의 용량을 원하는 건가요?”

“포션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저기 저 향수 병만큼이면 충분할 것 같네요.”

“향수병이라면……?”

화장대 위를 가리킨 데니스의 손가락을 따라가니 수십 개의 향수가 브랜드별로, 종류별로 갖추어져 있었다.

“어느 것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제게 지나치게 모든 사치품을 많이 사 주기를 바라는 어떤 분 때문에.”

루스벨라가 데니스를 흘긋 쳐다보며 말했다. 데니스는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방싯방싯 웃었다.

“그분이 당신을 많이 아끼나 보네요.”

“이보세요, 후작님.”

“저 데니스라는 이름으로 안 불러 주실 거예요?”

“하아…… 그럼 저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물건을 마구 사들이지 않으신다고 약조해 주세요.”

루스벨라는 한숨을 내쉬며 조건을 걸었다. 이에 데니스는 서운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루스벨라에게는 무얼 사 줘도 부족한걸요.”

“안 부족해요. 이러다가 제가 응석받이 부잣집 외동딸처럼 사치를 당연하게 여길까 봐 무서울 지경이라고요.”

“그러면 어때서요?”

“제가 부담스러워요…….”

‘언젠가는 비워 줘야 할 후작 가 안주인 자리잖아.’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데도 주어지는 선물과 풍족한 환경은 루스벨라를 들뜨게 했고, 동시에 두렵게 했다.

언젠가 그녀가 떠나야 할 때를 잊고 분수를 넘어 행동하게 될 것 같아서.

‘그건 안 돼.’

그렇게 된다면 아슬란에게 내쫓겼던 것처럼 두 사람의 끝이 비참하게 날까 봐.

“알았어요. 저기, 아기 주먹만 한 크기면 될 것 같아요.”

“용량이 굉장히 적은데요? 괜찮겠어요?”

마력 증진제는 흔한 만큼 큰 용기에 넣고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루스벨라는 데니스의 요구 사항에 되물었다.

“이건 마력 증진제로서가 아니라, 신전 사제들이 찾는 성력을 높이는 비약으로 팔면 어떨까 해서요.”

사기를 치겠다는 말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시장의 점유율이 높은 상단을 가진 데벤테르 후작 가문의 가주가.

“……괜찮은데요?”

그리고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 납득했다.

“신전에 한 방 날리려는 계획이죠? 아마도…… 제가 가진 신성력을 이용해서.”

루스벨라가 손끝에 조용히 힘을 줬다.

화르륵, 어디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푸른 사파이어를 녹인 것처럼 정순한 푸른 불꽃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언제나처럼 방 안에는 데니스와 루스벨라만이 있었고, 그렇기에 그녀는 편한 마음으로 그간 단련해 온 신성력을 보여 줄 수 있었다.

“맞아요. 정답이에요.”

데니스가 한없이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전편이라고 해 둘까요? 응용을 좀 해 보려는 시도죠.”

알렉이 첩자로서 전해 준 정보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에덴에서 아벨만이 유일하게 그 보석의 힘을 사용하는 건 아니었어.”

아벨이 대부분의 성력석을 독점하는 것은 맞았다.

‘그렇지만 그 엄청난 힘의 부스러기라도 쓰는 인간들이 있게 마련이지.’

“나를 추천하고 후작 저로 보낸 장로를 뺀 나머지는 ‘바깥’, 신전의 업무도 겸하는 모양이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은 허용할 수 없다는 주의겠지.”

푸른 보석. 성력석의 부스러기 같은 기묘한 힘을 뿜어내는 푸른 모래 알갱이.

그것이 들어 있는 로켓 등의 장신구를 아벨에게서 하사받는 것을 목격했다고 알렉이 말했다.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루스벨라.”

아슬란의 약혼자로 있었던 적, 그토록 헌신하고 노력했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연금술이었다.

“당신을 위해서 신전을 부숴 보지 않겠어요?”

내가 그 길의 초석이 되어 당신의 걷는 길을 받쳐 줄게요.

‘내 힘으로…….’

푸른 염화가 아지랑이처럼 루스벨라를 감쌌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신성력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그녀의 통제 아래 따르고 있었다.

‘마력 증진제에 신성력을 섞은 것이 핵심 사제들에게 들어간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 줄 것인가.

“바라던 바예요.”

그녀에게 지옥을 보여 주려는 이들에게, 기꺼이 악마가 되어 지옥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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