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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69화 (69/166)

69화

“제가 이렇게 예쁘고 화사한데 저를 버리고 저런 인간에게 루스벨라가 눈길 돌릴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어떻게 저런 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할 수 있지?!’

일타이피의 명대사였다. 데니스는 알렉과 루스벨라 두 사람의 영혼을 저세상으로 보낼 것처럼 상큼한 얼굴로 맞는 말이지만 헛소리를 지껄였다.

“설마 제 얼굴이 저 인간보다 못하다고 하려는 건 아니시죠?”

데니스가 재량껏 가엾은 척을 떨며 얼굴로 공격했다.

“오 이런 미친.”

알렉은 기겁했다. 그 말 이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저기, 데니스……? 왜, 왜 그래요? 맞는 말이긴 한데, 제가 그럴 리 없긴 한데…….”

알렉은 쥐구멍을 찾고 싶었고 루스벨라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공격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얼마나 놀랐나면, 데니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패널티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깜빡 잊어버릴 정도였다.

지나가던 사용인들도 저게 무슨 해괴한 난장판이냐 싶어 두 눈을 씻고 다시 상황을 부릅뜨고 지켜봤다.

‘이래서 하기 싫었다고!’

알렉은 장로의 명령을 어느 정도 수행하는 데 성공했다. 헛소리로 인해 만들어진 난장판이라면 그것도 어쨌든 난장판이었으니까.

“루스벨라도 제가 훨씬 낫죠?”

평소보다 더 낮고 부드럽게 감기는 목소리, 거리낌 없이 목과 어깨에 팔을 두르며 다가오는 데니스에 루스벨라는 깜짝 놀라다 못해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루스벨라의 머릿속에서 알렉의 존재는 자취도 남기지 않고 떨어져 나갔다. 데니스의 교태 어린 훌륭한 연기는 쓸데없이 너무 힘을 줬다.

“어, 어, 네.”

“기뻐라. 저를 좋아해 주신다면 저런 말린 버섯 같은 놈에게는 가지 않을 거죠?”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그나저나 이게 무슨 일이에요?”

“음, 그게, 저 사람이 사실 제가 교단 측에 심어 놓은 따…… 첩자거든요.”

“네?!”

“그런데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아서, 저희가 지금 이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좀 하는 거예요. 미리 말 못 해서 정말 미안해요. 저도 어제야 안 거라, 협조 부탁할게요. 미안해요.”

하마터면 알렉을 따까리로 부린다는 말을 할 뻔했다. 그러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루스벨라 앞에서 험한 소리를 할 수는 없지.’

당연하다는 대답. 그것 때문이었다. 그를 더 좋아한다는 말은 사심 따위는 없었겠지만 듣고 나니 마음이 간질거리면서 행복함이 차올랐다.

염치없게도 데니스는 이 행복을 더 누리고 싶어졌다. 그럴 때가 아님에도,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 같은 기쁨에 그의 시간을 고정시키고 싶었다.

“너무 갑작스럽지만…… 어떡하겠어요. 미리 알려 주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요.”

“……미안해요.”

쓰다듬을 받던 강아지에서 깨갱거리며 혼나는 강아지가 된 데니스는 시무룩해졌다.

“괜찮아요. 그보다 지금은 필요하다는 그 연기를 하는데 집중하는 게 좋겠어요.”

“네!”

루스벨라의 말에 일희일비하던 데니스는 싱글벙글하다가 돌연 망부석이 되었다.

“어, 어어.”

“이렇게 하면 되나요?”

루스벨라가 데니스의 목덜미 부근의 옷깃을 가볍게 잡았다.

‘멱살? 멱살을 쥔 건가?’

데니스가 황금빛 머리통으로 제가 잘못한 게 무엇이 있나 빠르게 고민하는 사이 부드러운 감촉이 뺨에 내려앉았다.

촉.

“어?”

“……이거면 되겠죠?”

뭐가. 방금. 닿았는데.

“어, 어어? 어어어어?”

‘혹시 나, 죽었나?’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데니스는 연신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삐걱거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말랑한 감촉이 닿았던 자리부터 시작해서 열기가 피부를 태우는 것 같았다.

“더 해야 할까요?”

침착한 목소리와 반대로 루스벨라의 얼굴도 새빨갰다. 그녀에게도 열꽃이 옮겨붙은 것 같았다.

“그, 그, 아닙니다! 됐어요!”

“혹시 싫으셨는지.”

“아뇨! 그게! 너, 너무 좋아서. 그만…… 기뻐서! 기뻐서 그랬어요!”

“……네?”

“아니. 이게 아니라. 그러니까…… 으아아.”

‘얼굴을 못 들겠어…….’

원래 계획은 루스벨라와 가벼운 스킨십을 하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 부부 사이는 돈독하다고 알렉을 통해 교단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목에 팔 두르는 것 정도를 생각했는데.’

데니스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뜨끈한 볼의 온도가 느껴졌다. 노련한 연기가 아니라 날것의 풋풋한 감정이 터져 나왔다.

무릎을 꺾고 풀썩 주저앉은 데니스였다. 루스벨라는 그에 놀라 등을 토닥이면서 달래 주려 했다. 그녀도 부끄러웠지만.

“설마 이게 첫…… 키스예요?”

“이건 키스가 아니라 뽀뽀라고 하는 거예요! 루스벨라!”

데니스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부여잡고 울먹거리며 주장했다. 그 얼굴을 보니 루스벨라는 괜히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이라고만 여겼는데.’

예상치 못한 면모를 보니 귀여웠다. 샤내에게 웬만하면 붙이지 않는 수식어라 해도 아름다운 남자가 발갛게 익은 얼굴로 울먹이니 그것보다 어울리는 말은 없었다.

“귀여우세요. 데니스.”

“왜, 왜 그러세요. 진짜.”

“거울 보면 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단박에 갈걸요?”

연기는 필요치 않았다. 두 사람에게서는 자연스럽게 연인의 향기가 났다.

그걸 두 사람만 몰랐다.

“저기…… 그래서 저는 언제까지 이렇게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인 것인지.”

그리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저기요? 부부시면 다예요?”

부부라고 하기도 애매한 풋풋한 남녀 한 쌍에게 알렉이 낄 자리는 없었다.

“씨이.”

알렉은 문득 서러워졌다. 데니스의 계획대로 부부 사이에는 전혀 낄 틈이 없다는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마음이 헛헛해졌다.

‘빨리 돈만 받고 외국으로 가고 싶다.’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염병천병을 봐야 하는 건가.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도 미친 광신도 집단의 장로가 이런 상황을 납득할 것인가.

‘모르겠다…… 에덴으로 갔을 때 죽기라도 하면 유령이 되어서라도 돈 내놓으라고 하자.’

알렉은 더 이상의 생각을 하기를 포기했다.

***

한참을 데니스를 놀려먹던 루스벨라는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생기면 꼭 알려 달라고 당부한 뒤 들어갔다.

데니스는 알렉을 끌고 다시 지하실로 들어갔다.

“됐고, 저 이제 교단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알렉이 지친 상태로 데니스에게 물었다.

“음, 너무 멀쩡하게 가면 의심 살 테니까…… 좀 꼬질꼬질하게 가 봐.”

“제 의사는요?”

“목숨이 중해, 위생이 중해?”

“둘 다 중요한 거 아닙니까?”

“답을 알면서 물어보지 마라.”

아, 예. 답을 하나만 원하실 텐데 제가 잘못했군요.

알렉은 눈을 홉떴다. 데니스가 루스벨라의 귀엽다는 말 앞에서 어떻게 흐물흐물 녹아내렸는지 보고 나니 두려움이 한결 가셨기 때문이었다.

“간덩이가 조금 부었네.”

“후작 부인께서 상냥하신 덕에.”

“그래…… 그런 루스벨라에게 에덴 그 찢어 죽일 것들이 감히 이딴 임무나 시키고 말이지.”

뿌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데니스가 검에 신성력을 실어 돌을 내리쳤다.

‘지하실에 저런 돌은 왜 있는 거야?’

무슨 용도의 돌인지는 모르나 어린아이 몸뚱이만 한 돌은 쩍 갈라지다 못해 푸스스 먼지로 변해 버렸다. 압도적인 무력에 알렉은 입을 떡 벌리고 제발 저 힘으로 교단이나 쳐부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그래서 애꿎은 제가 이 고생을 하는 거잖습니까.”

“그거로는 모자라지.”

“뭐 저지르시게요?”

“신전의 똥줄을 타게 만들어야겠어. 헌금 끊기만으로는 역시 약한 것 같더라고.”

데니스가 특유의 상큼한 미소로 살벌한 소리를 했다. 알렉은 데니스의 이중적인 면모에 익숙해져서인지 딴지나 걸었다.

“저기, 고용주님. 얼굴이 아까우시니 제발 좀 말 곱게 쓰시면 안 되겠습니까?”

생긴 건 웬만한 왕자님 뺨칠 정도의 곱상한 미남이 어디서 굴러먹다 온 용병처럼 말을 하니 부조화가 심했다.

이에 데니스를 따라 차를 준비하던 보좌관 제이크도 동의했다.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데니스 님. 루스벨라 님 앞에서는 세상 얌전하시면서 왜 말을 그렇게…….”

“쓰면 안 되냐고? 내 맘이지.”

“…….”

“…….”

말을 잘라먹은 데니스를 제이크와 알렉이 동시에 째려봤다. 두 사람은 잠시 마음이 통한 서로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쪽이 고생이 많습니다.”

“네. 그쪽도요.”

“후작 부인을 위한 사랑이 대단하신 주인 때문에…….”

“예에. 아주 대단하더라고요……. 이게 신혼의 뜨거움일까요.”

“애정이 뚝뚝.”

“꿀보다 진하더라고요.”

제이크와 알렉이 공통된 고충을 토로하자 데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 다 무슨 소리야? 나는 루스벨라를 경애하긴 하지만, 그녀에게 감히 이성적인 감정으로서의 사랑을 품지는 않았다.”

“예?”

“뭐라고요?”

제이크와 알렉이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가 그렇게 놀라운 거야? 난 루스벨라와 이미 이혼장도 교환한 사이라고. 정략결혼으로 이루어진 사이인데 사랑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너희들 왜 그래?”

데니스가 말하다 말고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주춤했다.

제이크와 알렉의 얼굴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라는 말을 대놓고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렇게 좋아죽겠다는 티를 냈으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요?”

“상사지만 방금 발언 정말 쓰레기 같았습니다. 이혼장은 대체 언제 교환한 겁니까? 설마 그걸 데니스님이 먼저 내미신 것은 아니죠?”

“그럼 진짜 쓰레기다…….”

“날 뭘로 보는 거야. 이혼장은 루스벨라가 원해서 준 거라고.”

숙덕거리는 두 사람을 못 이기고 데니스가 한마디 던지니 더 불이 타올랐다.

“세상에. 부인께서 먼저 이혼장을 내미셨다니.”

“얼굴과 돈이 되어도 부하들 함부로 굴리는 인성은 못 감추셨나 봅니다.”

“……아니거든?”

루스벨라 앞에서는 곱디고운 말씨만 사용하는 데니스였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녀 앞에서는 험한 말투가 나올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어째서 루스벨라 님을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겁니까?”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눈이었는데.”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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