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그런데 이걸 진짜 하시려고요……?”
“개소리에 개소리로 대응하는 게 뭐가 어때서? 어차피 그놈들은 날 거슬려 하고 있을 텐데 이 참에 열받아서 환장 좀 해 보라지.”
“저기, 고용주님. 귀족 치시고 되게 말투가 걸은…… 아니 거치셔서 되게 의외네요.”
“칭찬으로 듣지.”
데니스는 알렉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칭찬이 아니라는 건 알렉도 알고 데니스도 알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먼지도 알겠지만 고용주가 그렇다고 하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아, 예.”
‘이 사람은 뭐가 이렇게 양파처럼 까도 까도 뭐 나오는 게 많지.’
분명 병약한 도련님으로 골방에 버려져 있던 신세라고 들었는데, 데니스는 그런 세월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날 교단에 첩자로 밀어 넣은 것이나, 지금처럼 귀족답지 않은 면모를 보면 이상하단 말이지.’
재능을 숨긴 천재라고 해도 아귀가 맞지 않았다. 알렉은 데니스에게서 경험을 넘어서는 괴이한 인간의 향기를 맡았다.
‘대체 정체가 뭐야?’
알렉은 교단이 미친 사람들의 집합소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들에게 대항하려는 그의 고용주가 더 미친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인간은 맞으신 거죠?”
그래서였을 것이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불쑥 데니스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진 것은.
“내가 인간처럼 보이지 않나?”
데니스는 양손을 겹쳐 턱에 가만히 괸 채, 부드러이 웃으며 그 정신 나간 질문에 대답했다. 알렉은 이게 데니스가 ‘허락’해 준 것임을 알고 조금 더 용기를 냈다.
“뭐…… 그건 아니지만요. 후작님은 선망할 만한 외모와 재력을 모두 갖추신, 온전한 인간이시죠.”
“겉으로는?”
“네.”
건방진 소리라는 건 안다. 하지만 묻고 싶었다.
“정말 인간이 맞으십니까?”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해서 달라질 게 있던가?”
“그거야…….”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
‘……없네.’
데니스가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그는 여전히 알렉의 고용주일 것이고, 교단에 후작 부인인 루스벨라를 지키려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물론 나는 인간이야. 몸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고 맥동하는 심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지.”
물론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해도 괴물의 범주에 드는 사람은 있지만.
“그…… 아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런 부류들. 그리고 네가 나를 인간이 아닐까 오해한 이유는 아마도 그런 인간 같지 않은 자와 비슷한 느낌을 받아서겠지.”
“…….”
부정할 수 없었다. 알렉은 데니스를 의뢰로 만나면서 기묘한 느낌을 떨쳐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단에서 인정하는 신성력은 오로지 신으로 받드는 아벨의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신성력이라 알려진 사제들의 능력은 마력에 불과할 뿐이고, 그들은 마법사에 가까웠다. 그들은 몰랐겠지만, 축복은 걸 수 없고 맞지도 않는 상태 이상 회복을 단련하며 평생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 덕에 아무도 몰랐던 것이 있으니, 사제 출신의 사람들은 마력을 비롯한 기운들을 감지하는 데 더 예민해지게 되었다. 제대로 된 곳에 쓰이지 못한 마력이 축적된 까닭에 새로운 방식의 진화를 이뤄낸 것이다.
알렉의 집안은 대대로 고위 사제직을 이어온 독실한 종교적 집안이었다. 그래서 데니스에게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아니,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데 이 사람은 뭔가 이상해.’
……이런 직감적인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가 없지만, 어쨌든.
데니스는 그러한 것들을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는 알렉이 그를 꺼리는 것을 이해했다.
왜냐하면 그는 ……를 수없이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알려 줄까?”
“……아니요. 됐습니다.”
“궁금해했잖아.”
“됐어요. 들으면 뭔가 돌이킬 수 없이 고용주님 댁 사정의 소용돌이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거든요?”
“현명한 사람이네.”
“……뭔지는 몰라도 교단의 뒤를 캔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에요. 첩자질을 해내고 있는 저도 들킨다면 어떻게 찢겨 죽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교단이 이미 타깃으로 삼은 당신이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알렉은 데니스와 루스벨라를 아벨이 습격했다는 일을 몰랐지만, 아벨과 데니스와 맞붙는다면 데니스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다.
그만큼 푸른 보석의 힘은 위대했기에, 괴물인 아벨과 싸워 이길 승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감히 들지 않았다.
“전에는 나보고 반드시 교단에서 꺼내 달라고 애걸하더니 날 걱정하고 있는 거야, 지금?”
“아니…… 사람이니까 사람 걱정 좀 할 수 있는 거죠. 제 놀고먹을 보수를 약속해 주신 소중한 고용주기도 하니까요.”
“위험한 일에 목숨 걸 필요가 무어냐는 말을 하고 싶겠지. 그 사람만 넘기면 다 되는 일이라고.”
“그렇……죠?”
“그게 죽기보다 싫으니까 안 하는 거야. 나한테는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고.”
“그게 뭔지 물어봐도 되는 겁니까?”
“아니. 못 알려 줘. 믿지도 못할 이야기고. 그것보다 이 일에 더 얽히고 싶지 않다며. 네가 그걸 정말 바란다면 선을 넘으려고 하면 안 되지.”
데니스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조용히 바깥의 시종들에게 지시하여 알렉이 머물기 괜찮은 방을 주도록 했다.
“며칠만 보여 주기식 놀음에 어울려 줘야 하니까, 잠시만 여기 있어.”
“진짜 하신다고요? 이걸? 그 미친 교단의 누구도 믿지 않을 거라고요!”
“왜? 미친 헛소리에 미친 짓으로 보답하는 게 뭐가 어때서.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해서 의심을 사게 되고, 그래서 죽게 되는 것보다는 낫지. 뭐든 살고 나서야 도모하고 보는 거야.
“사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존엄성은 일단 버려. 살고 나서 존엄성이고 나발이고 주워도 늦지 않아. 진짜 소중한 게 뭔지 아직 몰라서 그딴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야.”
“그건 또 뭐야……. 어디 전쟁터에서 구르고 오신 탈영병 같은 소리에요…….”
알렉은 우는소리를 하며 그냥 지금 자신을 도피시켜 주면 안 되냐고 물었다. 데니스는 상냥한 웃음을 띠고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안 돼. 못 바꿔 줘. 나도 교단 측에 널 통해서 엿 좀 먹여 보고 싶게 되었거든.”
“아, 이런 미친…….”
“교단은 무섭고 눈앞의 난 덜 무서운가 봐?”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잘 생각했어.”
그리고 날이 밝고 난 뒤에 루스벨라는 기가 막힌 광경을 목격했다.
“후, 후작 부인!”
“……누구시죠?”
“저, 저랑! 딸꾹, 날이, 딸꾹! 좋은데! 나, 나가 보실래요?”
“……뭐라고요?”
백주대낮에 웬 못 보던 남자 하나가 무작정 루스벨라에게 데이트 신청을 냅다 한 것이다.
‘으아아! 으아아아아아아!’
물론 그 남자는 알렉이었다.
‘하, 하기 싫다고! 그랬는데!’
인생에서 역대급 흑역사로 남을 발연기를 하면서.
***
루스벨라의 아침은 여느 나날과 다르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데니스와 신성력 운용 훈련을 마치고 든든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선대 후작을 치유하는 일정까지 마치는 반복적인 일상이었다.
‘데니스에게 패널티가 무엇인지 물어봐야 해.’
한 마리 멧돼지처럼 그녀를 보고서 돌진한 알렉과,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고민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운 시종인가?’
데니스는 최근 들어 교단 측의 습격에 대비해 수상한 사람이 보일라치면 바로 물갈이를 감행했다. 자연히 사람이 금방 비어 새로운 인력을 충당하는 일이 잦았다.
루스벨라는 알렉도 그런 사람일 거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알렉은 그저 데니스에게 고용된 충실한 따까리였을 뿐이다.
데니스가 알렉에게 시킨 일은 간단했다.
“대놓고 내 부인께 개수작을 걸어라.”
“예?”
“불륜이든 뭐든 평판 낮출 짓을 하라고 시켰다며? 하라고.”
“……그렇게 쉽게 허락하셔도 되는 일입니까? 아무리 정략결혼 사이라고 해도…….”
알렉이 걱정하는 듯한 말을 하자 데니스가 픽 하고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일단 그걸 시킨 게 장로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만.”
“내가 보기엔 말이야. 그 장로는 너한테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냥 해 보는 말로 떠맡긴 거야.”
“그건 저도 압니다.”
“잘 생각해 봐. 난 데벤테르 후작이지. 그것도 얼마 전에 승계를 이어받은 젊고 잘생긴 후작.”
데니스가 과장되게 자기 금발을 살짝 손끝으로 흐트러뜨리며 눈웃음을 쳤다. 알렉은 우웩 하는 시늉을 했다.
아무리 미인에 가까운 미남이어도 여인을 좋아하는 사내놈 앞에서 매력 발산은 토하고 싶은 짓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요?”
전혀 동의하기 싫었지만, 우거지상으로 알렉이 간신히 그다음을 물었다.
“외모 되지. 재력 되지. 능력 되지. 이런 인간이 떡하니 남편으로 있는 상대에게 가서 유혹이라도 하고 오라고 했다고?”
“……어?”
“멍청해도 유분수가 있지. 그녀와 내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어도 멀쩡한 사람들이라면 다들 말할 거다. 나를 두고 다른 놈이 눈에 차려면 적어도 황태자급은 되어야 한다고.”
“어, 어어?”
‘그…… 그런가?’
“너, 시험당한 것 같다. 알렉.”
“……그런 거라고요? 정말로?”
“교단이 날 표적으로 삼았다면, 내 얼굴을 모를 리는 없겠지. 당장에 데벤테르 후작 가가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재정적으로 튼튼하다는 것도 알고.”
“그러니까 난…… 시늉만 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 네게 실질적으로 뭔가 성과를 바라진 않을 거야.”
그랬다. 장로는 알렉에게 아벨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도록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알렉은 나름 신임받던 고위 사제가 나오는 집안에서 데려온 추천자였다.
“끄응. 데벤테르 가문에다가 그를 따르는 귀족들까지 헌금을 거부하니 돈이 남아돌지가 않잖아.”
당장에 돈이 급한 것은 아니었어도 들어오는 수입이 적어진 일은 뼈아팠다. 장로는 그 일로 한층 데니스에게 원한을 품었다.
“아벨 님께 하소연할 수도 없고.”
스트레스는 쌓였다. 그러나 현재 제국 내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인 데니스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장로는 아벨을 핑계로, 알렉에게 충성심을 시험해 볼 기회라며 데벤테르 후작 가로 등을 떠민 것이다.
화풀이용으로는 적절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못 한다면 알아서 기어들어 올 테니 그때 질책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니까 넌 적당한 핑계만 있으면 되는 거지.”
그래서 현재에 이른 것이다.
‘뭐야, 이 사람. 어디 아픈 건가?’
루스벨라는 기가 막혔다. 웬 이상한 사람이 저택에 느닷없이 들어와 그녀에게 지나가던 개미도 거부할 뜬금없는 데이트 신청을 했으니.
개도 임자 있는 유부녀에게는 이러지 않을 것이다.
“좋은 말로 할 때 가시죠?”
‘교단의 사람이라면…… 여차하면 힘을 꺼내서 쓴다.’
루스벨라는 단단히 긴장하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알렉은 그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내가 왜 이런 쪽팔린 짓을…….’
“왜, 왜 거절, 하, 세요?”
“……그쪽이야말로 왜 그렇게 말을 더듬는 거죠?”
‘그거야 전 이성 앞에서는 숙맥이 되어 버린다고요!’
알렉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알렉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이나 연기를 잘 할 수 있는 뺀질거리는 한량은 맞으나, 그도 약해지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성이었다.
어이없어하는 루스벨라 곁에 데니스가 훌쩍 나타나더니 예의 환한 미소로 말했다.
“저 사람이 뭐라는 거죠?”
“모르겠어요. 미친 사람인 건지 확인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아뇨. 멀쩡한 사람 같으니까…… 제가 간단한 경고만 날리면 갈 거예요.”
“간단한 경고요?”
“네.”
알렉은 듣고 싶지 않았다. 웬 우스꽝스러운 인형극 속의 처참한 조연이 된 기분이었으므로.
“어디서 나보다 못생긴 게 루스벨라 앞에서 껄떡거리는 거야?”
효과는 굉장했다!
“으악!”
“네?”
알렉은 죽고 싶어 했고, 루스벨라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