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주인님, 마님이 설마 쓰러지셨습니까?”
“마님이 어디 아프신 건가요?”
“아니야. 멀쩡해. 쓸데없는 걱정들 하지 말고 다들 돌아가.”
‘아픈 건 오히려 내 쪽이지.’
데니스는 신성력을 쓰고 난 후 으레 느껴지는 심장 쪽의 통증에 무표정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가 신성력을 주입하는 것을 끝내자 루스벨라는 말린 지푸라기처럼 축 늘어졌다. 불길하게 느껴지던 각성의 징조는 깨끗이 자취를 감췄다.
[잘 틀어막았군. 하지만 명심해. 계약자야. 시일이 얼마가 걸리든 간에 터질 봇물이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빨리 진행되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조심해라.]
‘신의 사념 정도면 내가 걱정하는 사태를 예방할 수 있지 않나?’
[무리다. 나는 잊힌 신의 사념이지, 본체가 아니니까.]
무능하기도 해라. 데니스는 사념이 다 듣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으로 빈정거리는 것을 놓지 않았다.
[이익……! 그리고 계속 반말 찍찍 할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자식이 말이야.]
‘루스벨라나 챙기자. 숙면에 도움이 되는 향초라도 꺼내라고 지시할까?’
[이씨. 너 나 무시해……? 감히 나를?]
웃겼다. 신의 사념이라고 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할 때는 언제고, 막상 데니스가 공기 취급을 하자 사념은 울먹거렸다.
[인간한테 잘해 줘 봤자 다 소용없어. 계약자면 뭘 해. 싸가지가 바가진데.]
사념이 데니스, 즉 인간의 머릿속에 붙어 있는 탓인지 인간적인 감정을 보이고 사용하는 어휘도 점점 인간다워지는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데니스는 루스벨라가 자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사념과의 대화를 입 밖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싸가지 없는 거 이제 아셨습니까. 저한테 이 세상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요. 루스벨라가 먼저지.”
[흥. 그래 봤자 내가 준 신성력이 없었다면 너도 그 아이도 운용 방법은 깨닫지 못했을 것을.]
“고작 인간한테 잘난 척하면 퍽 기분 좋아지십니까?”
루스벨라의 이불을 덮어 주는 부드러운 손길과는 매우 상반된 받아치기였다. 잊힌 신의 사념은 보이지는 않지만 부들부들 떠는 것처럼 화를 내다 한마디 했다.
[그러고 보니 너도 나와 마찬가지인 신세로구나? 제 목숨 깎아 가며 인생을 바친다고 한들, 말하지 않는 이상 저 아이가 어찌 알겠느냐.]
“……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데니스는 혹시라도 루스벨라가 들었을까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색색거리는 소리는 안정되었고, 얼굴 가까이에 손을 휘적거려도 별 반응이 없는 것을 보아 푹 잠들어 있었다.
“그깟 페널티. 예전에 내가 겪은 상실과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난 신성력을 빌려 쓰는 걸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글쎄다. 과연 그 단호한 발언이 언제까지 유지될까?]
“유치한 소리 그만하시죠. 시끄럽습니다.”
[이런 고얀 놈이!]
“예, 예.”
데니스는 몰랐다. 그러나 신의 사념은 눈치채고 있었다.
루스벨라의 몸이 지친 까닭에 수면 상태에 빠지긴 했으나 그녀의 의식은 또렷했다는 것을.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야?’
데니스가 신성력을 지도해 줄 때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빌린 것이라 해도 데니스는 예언을 받은 자였으니까. 설마 신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내준 신성력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일어나면 꼭 데니스와 이야기를 해 봐야겠어.’
유지하고 있던 의식이 자고 있는 몸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몽롱한 잠기운이 밀려들었다.
데니스가 정말 자신을 희생하는 조건을 감수하면서까지 신성력을 빌린 것이라면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과연 그만두라고 할 수 있을까.
신성력을 조절하고 공격과 방어에 쓰는 방법을 익혀야 앞으로의 생존에 유리할 수 있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것 같았던 아벨이 다시 루스벨라의 심장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들어 버렸는걸.’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가장 중요시하는 법이다. 자기 목숨과 안녕이 위협받는다면 어쩔 수 없이 그때는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지성 뒤에 감춰 놓은 동물의 본성이었다. 살아남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구.
루스벨라는 선택해야 했다. 모른 척하고 자신의 생존을 꾀할 것인지, 아니면 데니스가 자처하고 있는, 자신을 위한다는 명목의 어떠한 희생을 그만두게 할 것인지를.
***
알렉은 데벤테르 후작 저에 들어가야 말아야 하나 엄청난 고민을 했다.
제법 번듯한 얼굴에 오랜만에 칙칙하고 밋밋하던 교단의 사제복을 집어던지고 멋들어진 사복을 걸치니 꽤 태가 났다.
‘하지만 어떻게 후작 가로 갈 수 있겠냐고…….’
알렉은 제 손의 통신 마도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거라면 고용주와 직통으로 바로 연락할 수 있었다.
걸리는 점은 장로였다.
“장로가 시켰는데 안 할 수도 없고.”
데벤테르 후작 부인을 겨냥한 난장판을 만들고 오라는 개소리라니. 하필이면 살벌하기로 소문난 데벤테르 후작이 저를 광신도 소굴에다 첩자질 하라고 처넣은 고용주라니.
진퇴양난이요, 배수진을 깔아 놓고 죽으러 가는 신세처럼 느껴졌다.
꼬여도 더럽게 꼬인 것이다.
‘신중하자. 신중해…….’
알렉이 제일 걱정하는 점은 그것이었다.
장로의 말을 따르자니 데니스에게 죽을 것 같고, 그렇다고 데니스에게 당신 아내의 평판을 망치고자 보내졌다고 토설하자니 장로한테나 데니스한테나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았다.
‘으아아악. 어쩌란 거야!’
“거기, 뭐 하는 거지?”
“흐허업.”
드, 들켰다!
알렉은 차마 곧장 데벤테르 후작 저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그 근처를 도돌이표처럼 맴돌고 있었다.
최대한 들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돌아다니고자 했으나 그게 쉽게 될 리가. 루스벨라의 일로 예민해져 있는 데니스의 지시로 인해 저택은 철통 방어를 자랑하는 요새와도 같았다.
“계속 후작 저 주위를 살피는 것 같던데.”
“아, 아뇨. 저는 그냥 지나가던 선량한 제국민…….”
알렉은 장로가 시킨 명 때문에 자신을 첩자로 의심해서 이런 일을 시키는 게 아닐까 위액이 쓰리도록 고민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알렉은 누가 봐도 수척해 보였다. 그래서 수상쩍은 사람으로 병사들이 의심했다.
‘아프면 의사를 찾아갈 것이지…….’
‘후작 저에 왜 저렇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배회하고 다니는 거지?’
심지어 본인은 떨지 않고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목소리가 염소 울음소리처럼 덜덜 떨고 있어서 교단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실례지만 잠시 같이 가 줘야겠습니다.”
“네?! 아뇨. 잠시만요. 저 수상한 사람 아니라니까요!”
“예. 조사해서 아무 문제 없다면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어어. 안 되는데에…….”
‘가, 가기 싫어!’
알렉은 도망치고 싶었다. 당장 후작 저의 기사를 뿌리치고 냅다 달려가서 첩자질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은 보수와 무서운 광기 어린 교단이 종아리에 뛰쳐나갈 힘을 없애 버렸다.
“네…… 갈게요…….”
흑흑. 내 인생 언제부터 이렇게 꼬여 버린 거야.
그렇게 해서 알렉은 하인들이 머물지 않는 빈방 하나에 갇혔다가, 웬 이상한 스토커 같은 놈을 데려왔다는 보고에 데니스를 다시 대면하게 되었다.
***
“정말 후작 저에 왔다니. 넌 지금 교단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데니스는 알렉을 보고 몇 초간 놀랐다. 그 이후로는 줄곧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저도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거든요. 고용주님……?”
“장로지?”
“헐.”
알렉의 입이 쩍 벌어졌다. 데니스는 그쯤이야 쉬운 추리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 장로 추천으로 들어갔으니 반쯤은 널 심복으로 삼으려는 속셈도 있겠지.”
“와. 진짜 싫다. 닭살 돋는데요. 그 광신도 집단에서 누구 좋으라고 심복을 삼아요. 토하고 싶네.”
“됐고. 본론부터 들어가지.”
꿀꺽. 알렉은 붙잡힌 지 몇 시간 만에야 데니스를 만나게 된 셈이라 늦은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볼이 미어져라 빵과 고기를 우물거리던 알렉은 간신히 목구멍 너머로 음식물을 삼켰다.
“장로가 뭘 시켰지?”
“그게……. 듣고 화내시지 마세요. 전 맹세코 이딴 짓거리 하고 싶은 적 없었으니까.”
“그러지.”
“그리고 이게 장로의 시험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제 안전을 보장해 줘야 해요. 목숨 날아가면 돈이고 뭐고 문제가 아니니까.”
“목숨 귀한 거라면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빨리 이야기나 털어놔.”
“아, 알았어요. 얘기하면 되잖아요.”
“무사히 네가 에덴에서 나오면 보상으로 보수를 두 배로 늘려 줄게.”
“사랑합니다, 고객님!!”
알렉은 돈에 홀려 복잡했던 마음을 홀라당 까먹었다. 그리고 미주알고주알 장로가 어떤 개소리를 제게 시켰는지를 바른대로 낱낱이 고했다.
데니스의 표정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화사한 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알렉은 불쾌한 표정을 짓거나 욕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상대가 평온하니 도리어 겁이 났다.
“저기. 고용주님. 화 안 났어요?”
“났는데.”
“어…… 별로 그렇게 안 보이셔서요.”
“났어. 그 X같은 새끼를 어떻게 죽여 버리면 내 기분이 풀릴까 고민하고 있었거든.”
“…….”
“살아 있는 채로 내장을 파다가 까마귀밥으로 던져 주면 어떨까. 흠. 역시 너무 관대한 처사 같아. 그렇지?”
‘와. 장로는 X 됐다.’
곱게 죽지는 못 하겠다는 것을, 그리고 눈앞의 남자가 불쾌감을 드러낼수록 독 향을 뿜어내는 꽃처럼 웃는다는 것을 알고 알렉은 자동으로 굽신거렸다.
“전 맹세코 후작 부인께 해를 끼칠 생각 1도 없었습니다. 믿어 주세요.”
뒤에 살려 달라는 말을 붙이지 않은 것은 나름의 마지막 보루였다. 알렉의 교단의 힘에 빌붙어 산 사제 가문이라 해도 어쨌거나 제국의 귀족이었으니까.
“믿어야지. 이런 상황에서 너처럼 유용한 패가 배신하면 내가 얼마나 번거롭겠어. 응?”
뭔데. 뭐가 번거로운 건데. 뭔 짓을 하려고 그런 건데.
하지만 돈으로 묶여 있는 처지의 알렉으로서는 절대 물어볼 수가 없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장로에 대한 건은…… 이렇게 해 두는 게 어떨까. 어쨌든 너를 의심하게 두면 안 되니까.”
데니스가 어떤 해결책을 알렉에게 제시해 줬다.
“오…… 이거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교단으로 돌아갈 수 있겠네요.”
“그렇지? 걱정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면 문제없을 거야.”
데니스가 제시한 해결책을 들은 알렉은 결심했다.
아내 빼고는 아무것도 뵈는 것이 없는 데벤테르 후작에게 절대 개기지 말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