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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66화 (66/166)

66화

데니스는 아슬란을 내쫓아 버린 뒤 바로 문을 열었다. 아슬아슬했던 타이밍이었는지, 집사는 무진 땀을 흘리며 살았다는 표정이었다.

루스벨라는 황급히 데니스를 향해 달려왔다.

“데니스! 괜찮아요?”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윈체스터 공작과 저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루스벨라.”

“하지만…… 싸움이 일어난 것 같았는데.”

“그쪽이 무례했거든요.”

“물론 그랬겠죠!”

“어어. 루스벨라. 지금 제 편을 들어주시는 거예요? 기뻐요. 오늘 무슨 날이에요?”

“어물쩍 장난으로 넘어가려고 하지 마요. 들었어요. 분명한 소리를.”

“뭐, 저는 그 인간을 싫어하거든요.”

“저도 싫으니까, 걱정되니까……. 저를 위해서였다고 해도 당신이 혹시라도 아슬란에게 해를 입었으면 어쩌나 싶었어요.”

“……그랬어요?”

“네. 그랬어요.”

“당신을 다치게 했다면 그 사람을 더욱 미워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루스벨라는 아슬란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따져 보면 아슈라 윈블의 책임을 지고자 북부의 수장이 직접 올 필요까지도 없었다.

그래서 데니스가 그녀를 위층에서 기다리게 하고 아슬란을 홀로 맞이했다.

단순한 배려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아슬란이 아무런 수행원도 없이 데벤테르 후작 저까지 왔다는 게 의아했다.

그의 곁에는 늘 항상 사람이 따랐고, 독단으로 움직이는 적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온다는 건 이상하잖아.’

주변 환경에 일일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던 버릇은 분석하기를 밥 먹듯이 했다.

루스벨라는 아슬란의 약혼녀로서 그가 얼마나 관심 밖의 사건에 무심했는지를 알았다. 알고 있는 만큼 보이는 법.

‘이상하단 말이야. 자기 인생의 오점을 무마하려는 일이라고 해도, 왜 이렇게까지 날 끈질기게 찾아올까.’

예전이라면 기뻤을 것이다. 작은 관심 한 톨이라도 황금 덩어리를 대하는 것처럼 소중했으니까.

하지만 인연을 잘라 내고, 마음을 끊어 내니 근사하게 여겨졌던 아슬란 윈체스터의 그 어떤 것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미웠다. 싫었다.

루스벨라는 명확한 의사 전달을 했다. 그를 더는 보기 싫다고.

‘그럼에도 아슬란은 꾸준히 나를 마주치는 일을 피하지 않았어.’

왜, 왜 그런 귀찮은 일을 감수했을까.

이제는 유부녀가 된 전 약혼녀 따위를 만나 봤자 아슬란에게 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는데. 한없이 고고하던 그에게도 추문이란 오물이 슬금슬금 떨어지려고 할 텐데.

‘설마……. 아닐 거야.’

아슬란이 루스벨라에게 미련이 남았을 거라는 가정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이제 와 후회한다며 사랑을 속삭인다면 그 야속한 입을 때려 주고 싶을 것이다.

때려 준다는 것뿐이랴. 서러웠던 약혼 시절에 참고 또 참았던 쌓인 원망을 폭죽처럼 아슬란의 앞에서 터트리는 우를 범할지도 몰랐다.

‘싫어!’

그것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루스벨라? 괜찮아요?”

“싫어요…… 더 이상은 상처받기 싫어요. 나한테 그만 다가오란 말이야.”

루스벨라는 패닉에 빠진 것처럼 중얼중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데니스는 곧바로 그녀의 이상을 눈치채고 집사에게 고갯짓해 따뜻한 담요와 차, 마음을 달래 줄 달콤한 요깃거리를 가져오게 했다.

‘날은 점점 무더워져 가고 있는데.’

루스벨라의 마음은 언제나 혹한에 머물러 있었다. 이미 추운 북부를 벗어나 있음에도 항상 끊이지 않는 눈 폭풍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데니스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루스벨라를 자기 어깨에 기대게 했다. 루스벨라는 움직임 없이 그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따뜻한 사람의 온기…….’

그것만큼 루스벨라에게 효과적인 것이 없었다.

혼자가 아니야.

‘나는 나를 아껴 주는 사람과 같이 있어.’

더는 춥지 않아.

외롭지 않아.

‘견딜 수 있어.’

루스벨라의 곧 멈출 듯이, 아니면 그와 반대로 극단적으로 몰아쉬던 숨이 천천히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

그녀는 조용히 데니스에게 물었다.

“데니스.”

“네.”

“모든 게 괜찮아지면 좋겠어요. 나는 죽지 않고, 윈체스터 공작과는 영원히 마주치지 않고, 당신은……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괜찮아졌다고 느낄 즈음에 다시 스스로의 약함에 치를 떨게 된다.

‘분해. 강해지고 싶어. 단단해지고 싶어.’

루스벨라는 아슬란을 마주해도 미동 없이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고 싶어졌다. 단단한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심장이 가지고 싶어졌다.

“어서 신성력을 모두 깨쳐 각성하면 좋겠어요.”

“……금방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이라면.”

‘너무 이르지 않기를 바라지만.’

“더 빨리.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넘어서라도 빠르게 해내고 싶어요.”

루스벨라의 고운 옷자락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가장 값비싼 재질의 드레스가, 화려한 자수가 엉망이 되는 데도 데니스는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다만 그는 그녀를 걱정했다.

‘너무 몰려 있어.’

죽음의 공포만큼 사람을 고통 속에 밀어 넣는 것이 어디 있으랴. 게다가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이를 마주하는 것 또한 스트레스가 컸다.

‘이대로 가게 된다면 아마도 각성은 수월하겠지만.’

데니스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타인에 의해 고통받아 얻는 힘이라니. 루스벨라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흐르면 그는 기겁을 할 텐데 각성의 과정은 피눈물을 넘어 뼈를 깎는 고통을 요구했다.

“괜찮을 거예요. 내가 그렇게 되도록, 반드시 그렇게 도와줄게요.”

“……고마워요.”

루스벨라는 힘없이 대답했다. 데니스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면서 자신 안에 있는 신의 사념에게 질문했다.

‘이봐요. 들립니까.’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 그래. 듣고 있다. 무슨 일이냐.]

‘각성을 이룰 방법이 이것밖에는 없습니까? 정녕?’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너도 겪어봤으니 알 텐데. 내가 왜 이런 시련을 조건으로 내걸었는지는.]

‘아…… 망할 에덴. 다 박살 나서 지나가던 똥개 먹이나 되어 버렸으면.’

[욕은 나쁘다. 계약자야.]

‘할 만한 인간들에게 하는 건 정당한 사유입니다. 참작해 주시죠.’

[그건 맞는 말이지.]

데니스는 고민했다. 비밀 통로를 빠져나간 아슬란이 전처럼 그녀를 위해 도움을 줄 것은 자명했다.

‘꺼지라는 말은 했지만, 아마 안 듣겠지.’

[그러니까 왜 기억을 살렸지? 더 귀찮아지기만 하지 않았느냐.]

‘아뇨. 잘한 것 같아요. 루스벨라의 불안이 제 생각보다도 더 큽니다. 그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어서 아벨을 처리해야 하니까요.’

아슬란이 못마땅한 것과 별개로 그가 가진 전력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경계선을 넘어오는 마수를 처리하는 오래된 전통의 북부. 그 땅이 가진 강력한 군사력.

세월이 흘러 북부의 귀족들이 광산 등을 발견하며 얻은 부로 조금 나태해졌다 하더라도 아슬란이 가진 힘은 귀한 전력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슬란 그 자체가 아벨에게 대항하기 좋은 열쇠이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놓칠 수는 없는 계륵 같은 존재인 아슬란을 앞으로 어찌 대해야 할지가 관건이었다.

데니스의 문제가 아니라, 루스벨라의 상태가 악화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그때였다.

데니스의 머릿속에 멋대로 머무르고 있는 잊힌 신의 사념이 소리쳤다.

[막돼먹은 계약자야! 저기, 저기를 봐라!]

‘갑자기 머리 아프게 무슨 짓을……. 어?’

루스벨라의 그림자 밑으로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붉은색도, 파란색도 아닌 진한 검은색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감지한 데니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건.’

[각성의 징조다. 생각보다 이르군.]

‘그런 건 나도 알아요.’

데니스가 잔뜩 당황한 낯으로 루스벨라를 잘게 흔들었다.

“루스벨라? 내 말 들려요?”

“……네.”

대답이 느렸다. 그리고 내려다본 루스벨라의 가슴팍에는 희미한 검은빛이 돌고 있었다.

‘……안 돼.’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알게 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가지지 못했던 행복을 알게 해 주고 싶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의를 주었잖나, 계약자야.]

‘하지만.’

[거대한 운명의 파도를 한낱 인간인 네가 막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너만 망가진다. 기대가 큰 만큼 인간은 무너지지.]

신의 힘을 빌어도,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제 몸을 깎아 가며 돌아와도.

‘그녀가 다시 아파하는 것을 두고만 봐야 한다고?’

[반말 쓰지 마라. 대답은 하지 않아도 짐작하고 있겠지.]

환멸 나는 세상. 빌어먹을 사람의 운명.

“모든 게 끝나 버린다면 좋을 텐데.”

“……루스벨라?”

순간 데니스는 자신이 하려던 말을 입 밖으로 내민 줄 알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것은 혼몽한 정신 상태에 놓여 있는 루스벨라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항상 녹음을 닮아 깨끗하던 녹색 눈동자는 검은빛이 스며들어 탁해져 있었다.

“다, 사라진다면 좋겠어. 나조차도. 재가 되어 멀리 날아갔으면.”

“……안 돼. 안 돼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제발.

[이대로라면 에덴과 맞붙게 되었을 때 각성은 확실시되는구나. 큰 계기만 주어진다면 잠긴 문을 열리듯 모든 것이 순조로울 거다.]

신의 사념은 조금 놀랍다는 평을 했다. 이번에는 그래도 비교적 편안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각성이 너무 빠르다면서.

[이전에는 억누른 건가? 아니면……]

‘닥쳐요, 제기랄.’

데니스는 루스벨라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쥐면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붙들면 녹아 버릴 눈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끌어안고 손에 신성력을 끌어당겨 그녀의 심장으로 부었다.

[막으려는 건가? 일시적인 것밖에 되지 못해.]

“그게 어디야.”

[또 반말을…….]

“꼬우면 나중에 부활해서 현세에 강림하실 때 나 죽이던가.”

데니스의 손끝에서부터 붉은 신성력이 흘러나와 루스벨라의 심장을 적셨다.

“하지 마. 어차피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괜한 희망을 심어 주지 마.”

루스벨라는 여전히 멍한 눈빛으로 심장이 저며 드는 소리를 했다. 데니스는 슬픈 도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건 그녀의 본심일까?’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녀가 가장 바라는 것이라면.

‘나는 그녀를 놓아줘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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