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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65화 (65/166)

65화

아슬란은 억지로 갖게 된 기억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내가 한 짓이 아니야.’

그렇게 넘기기에는 데니스가 아슬란에게 넘긴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다. 현재의 아슬란의 모습에서 몇 년은 흐른 모습이라는 점이 이상했지만.

기억 속의 아슬란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미안해. 루스벨라. 당신을 죽게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야.”

나는 그런 적 없어. 이건 기분 나쁜 꿈일 뿐이야.

이상한 꿈이…….

[당신의 끝이 그렇게 비참할 줄 나는 몰랐어.]

“아니야…….”

거짓이 아니야.

‘이건, 만들어진 기억 따위가 아니라…….’

진짜로 있었던 일이다.

이제는 사라졌을 시간의 이야기였다.

그것을 인지하자 아슬란의 의식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인성은 갖다 버린 계약자야, 저기 저 아이 일어나는구나.]

“잘됐네요. 제 집에 오래 두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으니까.”

[매정하긴.]

“제가 저놈에게 상냥하기를 바라는 신이 더 매정하십니다.”

데니스는 소파에 엎어진 아슬란을 툭툭 건드렸다. 손길은 거칠었고 자비가 없었다.

“일어나, 아슬란 윈체스터.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으윽……. 데니스? 데니스 데벤테르?”

“징그럽게 내 이름 부르지 마. 기억은 무사히 되찾았나?”

“……그래. 빌어먹게도 말이지.”

깨어난 아슬란은 데니스에게 더는 예의 운운하지 않았다. 지독하게 메마른 눈빛으로 데니스를 노려보기만 했다.

“왜 내게 기억을 주었지?”

“말했잖아. 네가 너무 거슬렸다고. 답답하게 주인 잃은 개새끼처럼 루스벨라 주변을 도는 게 꼴같잖았거든.”

“성질은 여전히 더럽군. 주제 파악을 하라, 이건가.”

“그래. 넌 여전히 깐깐하고 상종하기 싫은 놈이라서. 자, 받아.”

데니스는 아슬란에게 그가 이곳에 오며 가져왔던 것들이 들어 있는 아공간 주머니를 던졌다.

“내가 가져온 것들이잖아.”

“가져가. 루스벨라와 나는 네게서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다.”

“설령 그것이 너와 그녀가 받을 정당한 몫임에도 말이냐?”

그 말에 데니스는 코웃음을 치며 아공간 주머니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준 게 없는 사실이 되지는 않으니까. 도로 가지고 어서 꺼져.”

“싫다.”

“뭐 이 새끼야?”

둘의 대화는 격식을 버린 지 오래였다. 높은 작위가 있는 귀족의 대화라기보단, 허물없는 용병 둘의 이야기 같았다.

데니스가 아슬란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시선이 정말 아슬란을 갈기갈기 찢고 싶어 하는 것처럼 사나웠다.

“그녀를 만나고 가고 싶다. 단 10분이라도 좋아.”

“1분도 아까워. 너랑 내가 만나게 해 줄 것 같냐? 애초에 기억 머리에 처넣어 준 거, 너 주제 파악 좀 하고 알아서 네 발로 나가라고 한 거야. 더 우릴 성가시게 하지도 말고.”

데니스의 표정에서 아슬란과 같이 있기 싫다는 감정이 대놓고 드러났다. 그러나 아슬란은 개의치 않았다.

“현재의 내가 그녀를 보고 헷갈리더군.”

“뭔지는 몰라도 확인하지 마. 저리 가. 꺼져.”

“날 질색하는 건 알겠지만 이런 작은 부탁 하나도 못 들어주나?”

“젠장. 이럴 거면 기억 따위 네게 주입하지도 않았어! 현재의 아슬란이 거슬리니까 얌전해지라고 널 부른 건데. 이래서야 더 귀찮아졌잖아.”

데니스가 짜증을 내며 고운 머리칼을 잔뜩 흐트러뜨렸다.

‘왜 내게 손을 안 대는 거지?’

아슬란은 적어도 데니스가 멱살잡이라도 하거나 뺨이라도 주먹으로 내리칠 줄 알았다.

사라진 시간대 속의 데니스는 미친개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성질을 죽이려 하는 것을 보니 의아함을 넘어 수상했다.

“뭘 쳐다봐. 눈깔 안 돌려?”

“말하는 것만 보면 뒷골목 왈패 같은 게 역시나 네가 맞는데…… 왜지? 왜 가만히 참고 있나?”

“뭐. 내가 앞뒤 안 가리고 다 때려 부수길 원하냐?”

“그런 걸 누가 바라나? 단지, 네가 많이 달라졌다는 감상에 놀라서 그렇다. 좋은 쪽으로.”

“너한테서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데니스가 쩍쩍 갈라진 밀가루 반죽처럼 인상을 구겼다.

‘내가 그런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건 오직…….’

그녀뿐인데.

그때였다.

집사가 달려와 데니스를 뵙기를 청했다.

“무슨 일이지?”

“저어, 주인님. 마님께서 응접실 문 앞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뭐?”

“주인님과 공작 각하께서 나누시던 대화의 소리가 컸는지 마님이 들으셨고, 무슨 일이 있는 거냐며 불안해하십니다.”

“루스벨라가……?”

“그녀가 이 앞에 있나?”

“넌 빠져. 꺼져. 저리 가. 루스벨라 앞에 털끝만큼도 보이지 마. 그녀는 너 보기 싫다고 했어.”

“만나게 해 다오. 부탁이다.”

“싫어. 내가 뭐하러 너 좋은 일을 해? 이 세상 인간들이 다 죽어서 너만 남아도 그건 못 해.”

“……알고 있다. 네가 날 얼마나 싫어하는지 정도는.”

“알면 꺼지라고.”

“그래도 너도 알 것 아닌가. 살아 있는 그녀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내가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무릎이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데니스가 눈을 부라렸다. 아슬란이 무릎을 굽혀 맨바닥에 앉고 머리를 숙이는 수치를 스스로 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젠장. 안 일어나? 뭐 하는 짓이야?”

“제발 한 번만 만나게 해 다오.”

아슬란의 간절함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음을 데니스도 모르지 않았다.

모르지 않았기에 더 끔찍했고 잔인하게 여겨졌다.

“어느 염치라고 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그럴 수 있어.”

“……미안하다.”

“미안하면 정신 차려. 내가 네게 기억을 돌려준 게 너에게 주는 호의라고 착각하지 마. 역겨우니까.”

너에게 할애할 애정 같은 달콤한 건 남김없이 그녀에게 다 줘도 모자라니까.

데니스는 아슬란은 증오하고 있었다. 그가 버린 여인이 얼마나 외롭고 고달팠는지를 알고 있기에.

아슬란이 그녀를 사랑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거라고 믿었기에 그를 증오하는 마음은 줄어들지 못하고 몸집을 불려서 숨을 틀어막았다.

‘왜…….’

네가 아니라 내가 선택받았을까.

아니, 처음에 그녀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다시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는 신은 대체 무슨 생각인가.’

데니스는 그런 생각을 수백 번, 수천 번이고 했다.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이 시련이라 하더라도 세상은 그녀에게 언제나 가혹했다.

운명이라는 것이 있을까. 있다면 그녀가 어째서 불운한 운명의 별 아래서 고통에 신음해야 하는가.

번데기가 된 순간을 넘어 나비가 된 애벌레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달가워할까?

‘나는 못 받아들이겠어.’

주어진 운명 따위 개나 주라지. 나는 운명을 거스르고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

설령 그것이 나를 죽여 그녀를 살려야 한다고 한들 나는 기꺼이 그리하겠다.

그 과정에서 아슬란의 되지도 않는 후회 따위는 방해만 되었다. 데니스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사랑놀음 따위는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넌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어.”

……어떻게 보면 그것은 데니스 그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기도 했다.

“데니스! 무슨 일 있는 거예요? 걱정되어서 내려왔어요!”

튼튼한 데벤테르 후작 가의 문은 방음이 잘 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작게나마 귀를 울리는 루스벨라의 목소리는 잊을 수 없게 선명하게 데니스의 귓가로 들렸다.

“주인님. 마님께서 이러다 들어오실 것 같습니다만.”

“금방 해결하겠다.”

데니스가 굳은 얼굴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집사에게 루스벨라가 이곳에 들어오지 않도록 약간의 시간을 더 벌어 달라고 부탁하면서.

“시위라도 하는 거냐?”

아슬란은 흡사 참회하는 죄인처럼 저자세로 앉아 있는 것을 그만두지 않고 있었다. 데니스는 그런 그를 힘으로 일으켜 세우고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커헉.”

“……피할 수 있으면서 안 피하는 징그러움 좀 보게. 이런다고 내가 네 간절함에 반응할 것 같아? 어리석기는…….”

“약간의, 희망에 기대어 기적 같은 기회를 가진 이를 보았는데……. 이까짓 주먹 몇 대를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기회라면 응당 시도는 해 봐야 할 것 아닌가.”

“재수 없는 새끼. 넌 시작부터가 글러 먹었어.”

“……안다.”

“알면 염치라는 걸 챙기지 그래. 꼴사납고 짜증 나는 꼬라지 그만 보이고.”

데니스는 아슬란을 내팽개치듯이 일으켜 세워 벽 한 면에 박았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문인 것인지, 비밀 통로가 드러났다.

“……이런 통로가 있었나?”

“돈 많고 의심도 많은 귀족 저택이니까. 루스벨라가 오기 전에 이리로 꺼져. 그리고 그녀 앞에 나서지 마.”

“내가 거절한다면?”

“네가 거절할 처지는 돼? 루스벨라 앞에서 더 추한 모습 보이고 싶으면 그러던가.”

“…….”

“너를 사랑했던 여자는 네가 죽였잖아, 멍청아. 나는 네게 속죄할 기회를 준 것이지, 신처럼 네게 모든 죄를 되돌리라는 기회를 준 게 아니야.”

‘그럴 자격도 없고.’

데니스가 문 앞으로 아슬란을 밀어 넣었다. 아슬란은 허탈함과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얼굴로 데니스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해야만 하는 건 지난번처럼 그녀를 돕는 일이야. 단, 이번에는 복수가 아니라…… 그녀의 생존을 위해서.”

“그건 네가 말하지 않아도 할 것이었다.”

“그래? 엄하게 도움을 대가로 그녀를 만나려는 거지 같은 생각을 해서 충고 좀 했어. 대가를 바라는 도와주기는 웃기잖아. 그렇지?”

신랄하게 아슬란을 비꼬는 데니스는 짐짓 신난 악동 같은 어조였지만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아슬란은 제 발로 통로를 걷겠다고 말하고 들어서는 순간 말했다.

“……너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나?”

“뭐?”

“사랑하지도 않는 이를 위해 이렇게까지 네가 헌신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너의 대답을 듣고 싶다. 너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나?”

사랑. 덧없고도 영원할 것 같은 한철 아름다운 꽃 같은 이름.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냐고?’

“듣고 싶다. 너는…… 이전의 그녀가 나를 바라보듯 사랑하고 있나?”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불쑥 치솟아 데니스를 덮쳤다.

‘……언제부터?’

심장이 아프게 뛰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날카로운 바늘로 찌르듯 느껴지는 고통이 아니었다.

죄책감과 환희가 뒤섞인 사랑에 대한 자각이었다.

감히 그가, 그녀에게 품어서는 안 되는 감정을 가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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