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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64화 (64/166)

64화

제이크가 충격으로 버벅거리는 동안 밖에 있던 아슬란은 기다림의 지루함에 질리고 있었다.

‘언제 나올 생각인 거지?’

윈체스터 공작인 아슬란은 어디 가서 기다리는 법이 없었다. 그가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게 했다면 모를까.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어 보니 시간의 흐름이 더없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전해 줄 것이 있어 찾아온 것인데.’

아슬란은 드물게 홀로 데벤테르 후작 저를 찾아왔다. 그의 두 손에는 윈블 자작 영애의 사건을 사과하고자 가져온 선물이 한 보따리씩 딸려 있었다.

건국제 연회를 위해 함께 북부에서 내려온 가신들이 이를 봤다면 기겁했을 게 분명했다.

북부에서나 나는 귀한 광물로 만들어진 장신구 세트. 그리고 대대로 윈체스터 공작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검을 급하게 주문하여 만들었다.

이외에도 성의 있게 보일 만한 진귀한 것들을 담아 경량화한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으나, 아슬란은 자신이 없었다.

“괜찮을까.”

아슬란은 본인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미친놈. 사과하러 가는 자리인데도 다른 생각이나 하고 앉았다니.’

그의 머릿속에서는 루스벨라가 떠나지 않았다. 테라스의 일이나, 기묘한 아이를 만났던 일이나, 가신들이 루스벨라를 우습게 알았던 일이나…… 그녀에 대한 생각을 줄이기는커녕 더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부채질을 했다.

그 과정에서 아슬란은 루스벨라에게 연민을 가지게 되었고, 호기심을 품게 되었으며, 미안하다는 감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만이 아니지.’

그녀의 생각을 계속해서 한다는 것은 독이었다. 착각하게 될 것 같았다. 이미 끝난 사이에, 해서는 안 되는 마음을 가져 버릴까 두려웠다.

‘오늘이야말로 복잡한 마음을 끊어 내는 거다.’

아슬란은 사죄의 뜻으로 가져온 선물을 내놓고 조용히 사라질 생각이었다. 그는 이 불편한 과제가 어서 해결되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곤란한 표정으로 들어간 하인이 아직도 나오질 않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이라는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은 알지만, 기다리는 이를 오랫동안 문밖에 두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음을 모르지는 않을 터.

슬슬 기다리는 것도 지쳐 문을 지키는 다른 하인을 채근하려던 찰나였다.

“오랜만입니다, 윈체스터 공작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데벤테르 후작.”

데니스가 직접 마중을 나왔다는 사실에 아슬란은 무심코 주위를 훑었다.

‘그녀가 없군.’

연회 이후 부부가 항상 붙어 다닌다는 소문에 혹시나 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슬란은 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시선을 거뒀다. 데니스는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고 안으로 들였다.

‘제발 부탁이니 공작 각하를 안으로 들이십시오!’

제이크의 눈물겨운 호소를 데니스가 흘려듣지 않은 덕분이었다.

“오신 용건이 짐작됩니다만.”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이걸 받으십시오.”

“북부에서 건네는 사과의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데니스는 아무런 동요 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는 감정사처럼 모든 물건을 꼼꼼히 공을 들여 살폈다.

“가져오신 물건들이 모두 최상등품이네요. 특히 검은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귀한 것이고요.”

“……내 휘하의 사람이 잘못한 일이니 책임도 내가 져야겠다고 생각해서 홀로 온 겁니다. 윈블 자작의 경우 지금은 뻗대고 있지만. 조속히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라도 그도 곧 사죄하러 오게 할 겁니다.”

“그러십니까?”

데니스는 심드렁하게 아슬란의 말에 겨우 말을 덧붙이기만 했다.

따뜻한 환대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상대가 아무 반응도 없으니 불편했다. 아슬란은 헛기침을 하며 대화의 주도권을 잡아보려고 했다.

‘……그렇지만 뭘 말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데.’

아슬란은 데니스가 불편했다. 그와 파혼한 전 약혼녀와 결혼한 사람. 그리고 그에게 뚜렷한 적의를 드러낸 사람.

벽돌집처럼 쌓아 올린 아슬란의 인생에 있어서 데니스는 미지의 생물과도 같았다.

“데벤테르 부인은…… 어디 있는 거지? 요양 중이라는 소식은 들었는데.”

‘물어봐도 되는 거였나?’

그나마 두 사람의 공통된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거라고는 루스벨라밖에 없었다. 아슬란은 그가 꺼낸 말이면서도 흠칫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한심하기 짝이 없군.’

안부 인사 정도는 건넬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아슬란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긴장으로 뛰는 심장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긴장할 일이라고는 드물던 아슬란은 그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를 외면했다.

“제 아내는 아시고 계신 것처럼 충격을 받아 쉬는 중입니다. 오늘은 날이 아니군요.”

“그렇……습니까.”

“네. 그리고 애초에 각하를 만나고 싶지 않기도 했고요.”

“……뭐?”

데니스가 웃는 얼굴로 폭탄을 던졌다. 말로. 아슬란의 단정하던 얼굴에 금이 갔다. 쥐고 있는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악! 후작님!”

“왜. 제이크. 어차피 내가 이럴 줄 알고 있었잖아.”

거의 엉엉 울려고 하는 제이크를 두고 데니스는 태연하게 아슬란을 쳐다보며 말했다.

“전 당신이 싫습니다, 각하.”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 겁니까? 부인의 일이라면 미안하지만, 내게 사과를 넘는 과도한 것을 바란다면 들어줄 수 없습니다.”

“아니요. 전혀요. 저는 각하께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바라는 것이 없다고요?”

“아, 한 가지는 있네요. 누누이 말했지만, 루스벨라는 당신을 전혀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군요.

“그게 무슨 말이지?”

아슬란은 루스벨라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다는 말에 상처받았다. 그리고 오기가 생겼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처음으로 그의 감정이 멋대로 뻗어 나갔다.

“존대를 놓으셨네요?”

“그대가 무례하게 구니까.”

“저도 놓을까요, 그럼?”

“나는 그대에게 시종일관 예의를 갖춰 대했는데, 그대가 그럴 명분이 어디 있지?”

“있지. 왜 없어.”

데니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햇살처럼 웃던 얼굴이 천둥이 치는 밤하늘처럼 어두워졌다.

“제이크, 넌 나가 있어.”

“네, 넷!”

제이크는 데니스의 분위기가 예전에 데벤테르 가를 엎을 때처럼 변하자 딸꾹질을 하던 중이었다. 제이크는 사람을 물리는 데니스의 지시에 감사하며 후다닥 자리를 빠져나왔다.

“데벤테르 가의 새로운 가주가 이토록 버릇없는 사람일 줄이야.”

“그래. 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좋겠네. 그렇게 마음 편하게 네가 잘못한 것 없는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어서.”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아직도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데, 너는 그러지 않아서 부럽다는 소리야.”

“……데벤테르 후작, 미쳤나? 영문 모를 소리만 해 대는 게 이상해.”

“난 미치지 않았어. 미친놈은 따로 있지.”

아슬란이 다음 말을 꺼내기도 전에 데니스가 아주 가까운 거리를 두고 성큼 다가와 있었다.

“뭐…….”

“가만히 있어. 내가 겪었던 지옥을 아주 짧게나마 경험시켜 줄 테니까.”

‘뭐야, 어떻게 된 거지?’

아슬란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졌다. 움직일 수 없었다.

고작 데니스가 검지를 아슬란의 이마에 올렸을 뿐인데 숨을 쉬는 것 외에 모든 움직임을 제한당했다.

데니스가 신성력을 이용하여 아슬란의 움직임을 붙잡아 둔 결과였다.

“이것도 ‘약속’을 이행하는 과정 중 하나니까. 이건 괜찮지?”

혼잣말이 아니었다. 데니스 내에 잔류하는 잊힌 신의 사념이 듣고 있었으므로.

[허용한다. 나의 계약자야.]

“그래.”

그리고 아슬란의 머릿속으로 정보가 쏟아졌다.

“아악……!”

방대한 양의 정보가 아슬란의 뇌에 강제로 주입되었다.

‘이게 뭐지? 기억? 기억인가?’

누군가의 시점에서 본 기억이 흘러들어온다. 괴롭고, 아픈 일투성이다.

끝내는 죽음으로 귀결되는 끔찍한 악몽 같은 기억에 아슬란은 몸부림쳤다.

[그만해! 내 아이를 더는 건들지 마라!]

아벨의 세뇌를 깨뜨렸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허억. 허억.”

‘뭐야.’

“내, 내게…… 뭘 보여 준 거지?”

아슬란은 부정하고 싶었다. 그가 본 기억은 그가 아는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었기에.

추정을 넘어,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게 뭐냐고 물었다! 데니스 데벤테르! 대답해라!”

“시끄럽게 왜 화를 내고 그래. 당신도 누구의 기억일지 이미 눈치챘으면서.”

“난, 나는…… 이런 적이 없다.”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지. 전부 나 때문에.”

“우욱…….”

아슬란이 구역질했다. 알 수 없는 목소리 덕분에 생생하던 기억 주입에서 벗어났지만, 충격이 잔류하고 있던 까닭이었다.

“보기보다 약하네. 북부의 소중한 공작님.”

“너…… 정체가 뭐냐.”

“그냥 인간이지. 죄책감을 느끼고 평범한 행복을 바라는 인간.”

“…….”

“그것보다, 이제 알겠어? 내가 왜 너를 보고 그토록 싫어하는지 말이야.”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진짜일 리 없다.”

“거짓말. 거짓말이 아닐 거라는 걸 네가 더 잘 알걸?”

“나는, 나는…….”

“‘이전’처럼 내게 협력해 주길 바라서 이렇게 했어. 네가 워낙 루스벨라를 귀찮게 하니까. 주제 파악 좀 하라고.”

시야가 일그러진다. 현실과 방금 주입당한 기억의 경계가 흐려지고, 의식이 과부하를 이기지 못해 서서히 잠들어간다.

“으으…… 으으윽…….”

아슬란은 고통스러워하며 소파 위로 상반신이 허물어졌다. 데니스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제이크를 내보냈던 것은 아슬란에게 기억을 주입하려던 것도 있었지만, 그를 옮겨야 한다고 부산을 떨 보좌관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말 네 인성은 썩었구나. 그 아이만 아니면 막 대하는 것이 아주 양아치 같아.]

“아시면서 저랑 계약하신 거잖습니까. 받아들이세요.”

[고얀 놈. 나쁜 놈!]

“네네. 저도 압니다.”

데니스는 그를 욕하는 신의 목소리를 피하지 않았다. 되레 긍정했다.

“그러니까 제 삶 전부를 바쳐서라도 루스벨라를 지켜낼 겁니다.”

설령 그 과정에서 그가 악당이 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세상 전부가 적이 된다고 해도 괜찮았다.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해서.’

[답도 없는 미친놈.]

“칭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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