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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63화 (63/166)
  • 63화

    “주인님, 마님.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루스벨라와 데니스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신성력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손님이라고?”

    “누가 이 시간에 온 거지?”

    “그것이…… 윈체스터 공작 각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신성력의 실체는 에덴과 데벤테르 후작 부부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정보 보안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종 중에 누구도 연무장 근처에 발을 디디는 자가 없었다.

    시종들은 궁금해하긴 했다. 젊은 새 주인님과 마님께서 몇 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그들은 차마 귀부인이 무예를 연마하며 흙투성이가 되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데니스와 루스벨라 사이에 무언가 이상하고 야릇한 일이라도 있었는지에 대한 괴상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가고 있었다.

    데니스는 보좌관이자 그의 수족인 제이크가 집안의 수런거리는 분위기를 잡아채고 간언하자 웃음을 빵 터트렸다.

    “아하하…… 그런 오해를 하고 있단 말이야?”

    “웃긴 일이십니까…… 저만 심각합니까?”

    제이크는 데니스를 나무랐다. 데니스는 이 상황이 유쾌하게만 여겨졌다. 그래서 제이크는 속이 터졌다.

    ‘왜 저러시지……?’

    영문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살얼음 위를 지나가던 것처럼 날이 서 있던 데니스였기에.

    그런데 그는 지금 배를 붙잡고서 웃고 있었다.

    “내가 부인과 연무장에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이곳에 오지 말라고 이야기한 게 이런 식으로 흐를 줄은 몰랐는데.”

    “웃을 일이 아니십니다. 사용인들을 엄중하게 단속할 필요가 있어요.”

    제이크가 십 년은 늙은 사람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믿고 일을 맡기는 보좌관의 불쌍한 얼굴을 보면서도 데니스는 웃기만 했다.

    ‘보통은 이런 낌새가 보이기도 전에 기를 잡아 놓으셨는데, 이번에는 왜 가만두고 보시기만 하는지.’

    실상을 모르는 제이크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제 말 진지하게 듣고 계시지 않으신 거죠?”

    “듣고 있어.”

    데니스는 나쁠 게 없었다. 신혼부부 사이에 있어 크게 문제 될 것도 없는 숙덕거림이었고.

    ‘오히려 좋지. 루스벨라와 나는 부부인 척 연기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

    사교계에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일, 그리고 아슈라 윈블의 죽음 때문에 데벤테르 후작 가에 쏠린 시선이 꽤 많았다.

    이런 때에 부부간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게 알려져 나쁠 게 없었다.

    ‘우리를 노리고 있는 놈들에게도 좋은 미끼가 되어 줄 것 같고.’

    그래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흠…… 뭐, 어쨌든 일이 그런 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날 도와주는 거라고 봐도 되겠지. 긍정적이야.”

    “전 후작님을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해하지 않아도 돼. 제이크 넌 일만 잘해 주면 되니까.”

    “예, 예…… 그러시겠죠, 암요.”

    “말투가 조금 건방지게 들리네? 내가 유하게 구니까 너도 나한테 그래도 되는 줄 아나 봐?”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서릿발처럼 섬뜩한 내용의 말이 제이크에게 꽂혔다. 제이크는 얼른 자세를 꼿꼿하게, 바르게 고치고 온몸으로 아니라는 티를 팍팍 냈다.

    “절대 아닙니다. 오해 마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방긋 웃는 데니스는 천사 같았다. 외면적으로는 자애로운 천사 같았고 내면적으로는 무시무시한 징벌을 내리는 천사 같았다는 소리였다.

    ‘거둬 준 은혜가 있는데 불복할 수 있을 수가.’

    제이크는 데니스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불만의 목소리를 낸 것은 단지, 주군으로 모시는 자의 안위를 걱정해서 그런 것일 뿐.

    제이크는 혜성처럼 집안을 장악하고 네가 적격이라며 보좌관 자리를 제게 건네준 데니스에게 감격했었다. 능력이 있어도 평민 출신이라는 한계에 갇혀 심부름꾼 일이나 도맡던 그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넌 내가 무얼 하고 싶은 건지 알고 있으니까.”

    데니스의 말에 제이크는 그의 보좌관으로 들어가던 날을 떠올렸다.

    그의 주군은 제이크에게 단 한 가지를 원했다.

    “난 한 사람을 구할 거야.”

    뜬금없는 소리였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후작 가를 뒤집어 놓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다정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기도 했다.

    “누구를…… 말씀하십니까?”

    제이크가 호기심에 물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데니스는 무시했다. 데니스는 자기 할 말만 이어 나갔다.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의 시작이 이 가문을 내가 삼키는 일이었지. 그러니까…… 너에게 물을게.”

    “말씀하십시오.”

    어떤 내용이 나오건 간에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내가 그 사람을 위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너는 그 똑똑한 두뇌로 나를 도와. 그러기 위해서 널 그 자리에 앉힌 것이니.”

    각오했던 내용보다는 맥이 빠지는 것이라 제이크는 당황했다.

    ‘고작 그걸로 후작 가의 보좌관이라는 자리를 내게 준다고?’

    데벤테르 후작 가는 남부의 실세. 후작 밑으로 딸린 가신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늘어져 있는데, 최측근의 자리를 평민에게 넘긴다면 반발이 거셀 것이 틀림없었다.

    “정말…… 그것만 따르면 되는 겁니까?”

    “응. 다른 건 필요치 않아. 간절한 너라면 날 배신하지도 않을 것 같고.”

    “배신이라뇨!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약조만 시켜 주신다면야 평생 감사하며 보필할 텐데요.”

    “그래서 널 골랐지. 가장 최선의 결말로 이어질 수 있도록.”

    ‘결말? 무슨 생뚱맞은 소리지?’

    그때는 그런 의문까지 해결할 여유가 없었다. 우선 눈앞에 드리워진 미끼에 달려들어야 했으니까.

    “믿고 맡겨 주신다면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절대 도련님을 배신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알아.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선택한 사람인데.”

    기묘한 대화 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데니스가 결혼한 이후로 알게 되었다.

    ‘무어라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데니스와 결혼한 영애, 루스벨라 지펠론.

    그녀 앞에서 데니스는 사람처럼 굴었다. 일에 미친 사람처럼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선대 후작이 맡던 일을 무리하여 흡수하던 것이나, 따르지 않던 가신들을 무자비한 힘으로 억누를 때 보이던 모습은 눈 녹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는 낯 뜨거운 소문이 나도 그러려니 하고 있으니 신기함을 넘어 소름이 돋았다.

    “부인께서는 싫어하실 수도 있을 것 아닙니까.”

    “루스벨라와는 이야기 된 것이 있으니, 그녀도 납득할 거야.”

    루스벨라나 데니스나 신성력 훈련을 숨기기 위한 핑계로 마땅한 것이 없어 고민 중이던 차였다.

    검술을 연습한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답이라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면 집안에 불안을 불러일으키겠죠.”

    루스벨라는 건국제 날의 연회에서 윈블 영애에게 난데없는 폭력을 당했다.

    여기서 데벤테르 가문이 약한 모습을 보여 줬다가는 애써 꾀한 이미지 변신이 물거품이 될 공산이 컸다.

    ‘기사단이 없는 것도 아니고, 데니스가 약한 사람도 아닌데 내가 무예를 연마한다고 한다면 이상하게 여기겠지.’

    루스벨라의 걱정은 그것이었다.

    귀족 태생의 아녀자 중에 무의 길을 가는 사람은 없었다. 있더라도, 그것은 가문에서 축출되어 살기 위해 잡은 생계 수단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데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집안의 부인인 루스벨라가 검을 잡는다는 이야기가 퍼진다면…….

    “데니스, 당신이 후작 가를 장악한 것에 무언가 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정적을 대비하기 위한 행위라고 볼 테니까.”

    루스벨라는 데니스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생겨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우선 황제만 하더라도 그를 노리려 할 테니까.

    ‘그것만은 안 돼.’

    데벤테르 가문이 거느린 것이 많은 탓에 나온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저는 상관없는데.”

    “제가 있어요.”

    “음…… 그러면 사실을 조금 변형시켜서 알려지는 건 나쁘지 않죠? 당신이 걱정하는 부분도 완전히 상쇄시킨 내용이라면요.”

    “그 정도야…… 그거라면 저도 괜찮아요.”

    그렇게 해서 데니스는 만족스러워하는 중이었다.

    “내가 부인을 너무 아껴서 보낸 시간 중에 검을 든 순간도 있다고 하면 되는 거지.”

    “그런 걸로 되겠습니까?”

    “될 거야. 여인은 오로지 보호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게는 말이지. 그들은 상상도 못 할 거야. 고작해야 내가 루스벨라를 뒤에서 끌어안고 장난 같은 검 들기 연습 정도나 했다고 여기겠지.”

    있는 사실에 없던 거짓을 섞어 농도를 흐리게 만든다. 아주 거짓은 아니지만 데벤테르 후작 가를 시기하는 인간들에게는 빈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에덴을 유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의도대로 되어 가는 상황이니 데니스는 배부른 사자처럼 만족했다.

    “하지만 설마 놓지도 않은 통발 속에 물고기가 걸릴 줄은 나도 몰랐지.”

    “후작님께서 통발도 아십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제이크. 원치도 않던 대어가 기어들어 온 게 문제라고.”

    ‘아슬란 윈체스터.’

    데니스는 골치가 아팠다. 아슬란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자식이 조만간 루스벨라에게 접근할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설마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급하게 후작 저로 올 줄은 몰랐지.’

    아슬란이 도망치듯 달아나는 것을 데니스는 테라스에서 봤다. 아슬란의 곰같이 둔한 마음이 루스벨라에게 흔들리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제이크가 데니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분위기를 읽어서였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후작님.”

    “문전박대하고 싶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데벤테르 후작 가의 위세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하나 결국 공작 가보다 못한 후작의 지위를 갖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영향력 면에서는 윈체스터나 데벤테르나 큰 차이는 없었지만, 데벤테르가 더 클 가능성도 있었지만…… 가진 작위 앞에서는 우선 어쩔 수가 없었다.

    ‘마음에 안 드시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일단 안으로 들이기라도 하세요, 제발……!’

    제이크는 위장약을 타 먹고 싶은 간절함이 일었다. 변방에서 마물이나 적의 습격을 막는 공을 황제도 인정한다는 북부의 공작.

    그를 소홀히 대한다면 제이크가 일하고 있는 이 가문이 눈총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걱정스러웠다.

    “아, 루스벨라. 나왔어요?”

    “네.”

    제이크가 고개를 들었다. 젊은 마님께서 씻고 깔끔해진 차림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루스벨라도 상황에 대해 전해 들었기 때문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사람이 왔다면서요?”

    “네. 무슨 염치인지는 몰라도 수행원 하나 없이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저택 앞으로 왔더군요. 기다리고 있던데, 당신 뜻은 어때요?”

    제이크는 루스벨라를 향해 제 텔레파시가 통하길 빌었다.

    ‘제발. 제발! 적어도 차 한 잔은 내주시는 너그러움을 가지신 분이기를!’

    “저는…….”

    ‘제발!’

    “문전 박대에 소금까지 뿌려 주고 싶네요.”

    제이크의 바람은 박살이 났다. 물론 제이크가 루스벨라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이미지도 와장창 깨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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