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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61화 (61/166)

61화

데니스가 루스벨라에게는 잊힌 신에게 예언을 받았노라 말을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약간의 진실에 거짓을 섞어 대답을 내놓은 것이었다.

‘제가 알아서 잘할 수 있습니다만.’

[안다. 그러니 너를 선택한 것이지. 하지만 예언이라는 보기 좋은 핑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심은 사념 덕택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사념 주제에 말이 많기도 하군.’

속으로 말하는 건 사념이 다 듣게 되는 것을 알면서도 데니스는 귀찮다는 감상을 숨기지 않았다. 신의 조각난 파편인 사념은 길길이 날뛰었다.

[네, 네 이놈! 어떻게 구원자이자 조력자인 나를 그렇게 평가하느냐!]

‘제 구원자는 루스벨라입니다. 그쪽한테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끄응…… 싹수가 노란 인간 같으니라고. 한마디도 져 주질 않는구나. 내가 어쩌다 이런 자를 택해야만 했는지.]

잊힌 신의 사념은 한탄을 퍼부었다. 데니스는 그 가여운 푸념 한 점을 들어주지도 않고 깔끔히 무시했다.

“루스벨라, 오늘은 이쯤까지만 하고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어요.”

“더 하고 싶은데…… 이제야 겨우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간 거잖아요.”

루스벨라가 드물게도 아쉬워하는 티를 내며 입술을 비쭉였다. 데니스의 공격을 막아 냈다는 짜릿함을 아직도 그녀의 두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더 해 보면 안 될까요? 단순히 손으로만 공격을 막는 수준이 아니라 공격도 방어도 시도해 보고 끝내고 싶어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초록색 눈동자가 데니스를 향했다. 데니스의 안에 들어 있는 신의 사념은 그에 바로 마음이 흔들려 그를 재촉했다.

[저렇게 말하는데 들어주는 게 좋을 듯한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데니스의 계획은 오늘 일정은 여기서 끝이었다.

‘더 하면 몸에 무리가 올 거야.’

데니스는 자신이 신에게서 신성력을 빌려 쓸 수 있게 된 순간을 잊지 않았다. 본래 그의 운명으로서 낙찰된 힘이 아닌 것을 받아들여 원래부터 제 것인 양 쓰게 되는 데는 고된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루스벨라의 욕심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을 말려 줘야 한다는 것을.

“루스벨라, 마음은 이해해요. 첫 단계를 밟았으니 그 다음을 노려보고 싶겠죠. 인간이니까요. 그리고 당신이 처한 상황적인 측면을 고려해 보면 조급하다는 걸 압니다.”

“그렇다면!”

“그러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요. 이것도 무리하게 신성력을 끌어낸 터라, 당신 몸에 과부하가 올 겁니다. 여기서 끝내고 휴식을 취해야, 내일도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있어요.”

데니스가 루스벨라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이 떨리죠? 몸은 아픈 게 아니라 오히려 고양감이 들고 붕 뜬 듯한 상쾌한 기분일 텐데.”

정말 그랬다. 루스벨라가 제 손을 내려다보니 수전증이 온 것처럼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까 신성력을 이용해서 공격을 막은 게 몸에 영향을 준 건가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아직 미각성의 상태. 각성한 이후라면 신성력을 한계치까지 끌어내야 과부하가 오겠지만, 현재로서는 무리죠. 더 하게 된다면 다음날은 몸살이 걸린 것처럼 몸이 쇠해 훈련을 할 수 없을 거예요.”

고집을 부려 무리를 한다면 손이 아니라 몸 전체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었다. 루스벨라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데니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알겠어요. 생존이 걸린 상황에서 몸 상태는 조심해야 할 사안이니까요. 데니스가 내게 안 좋은 말을 할 리도 없고.”

“들어줘서 고마워요.”

데니스가 싱긋 웃으며 루스벨라와 함께 연무장에서 나와 저택으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하루빨리 강해지고 싶은데……. 각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각성만 하면 더 빠른 성장을 이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데니스가 시종을 시켜 흙먼지를 닦아 낼 물 묻힌 수건을 받아 들다가 멈칫했다.

“……각성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

‘당신에 한해서라면 더더욱. 절대로.’

루스벨라에게 말할 수 없는 말은 꺼내지 않고서. 데니스는 겨우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루스벨라로서는 그런 그의 말이 이상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어째서요? 각성하는 게 저의 안전 확보에도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

“그들도 ‘성숙’한 대체품을 원했죠. 당신이 빠른 각성을 이루어 낸다면, 득달같이 달려와 당신을 해칠 족속들입니다.”

‘그 끔찍할 참상을 조금이라도 더 뒤로 미루고 싶어.’

데니스가 막을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벨, 그 괴물만 제외한다면.

‘윽.’

심장이 욱신거렸다. 익숙해진 통증과 함께, 아벨만 떠올리면 치솟는 분노가 올라와 그를 괴롭혔다.

[저 아이에게도 이젠 말해 주는 게 낫지 않겠나?]

‘됐어요.’

[너, 나와의 계약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 터인데. 저 아이의 도움을 받으려면 어서 각성을 이뤄내야 하는 게……]

‘됐다고요. 난 내 몸뚱이가 걸레짝이 되어도 그 꼴 못 봐요.’

[미련하기는. 그러다 죽는다.]

‘저 사람만은 지키고 죽을 거니까 염려 마시죠.’

아프다는 감각은 데니스의 인생에서 아주 친근한 것이었으므로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의 삶에서 고통과 불행은 악우와도 같은 것이라 가렵지도 않았다. 눈물은 사치였다.

그는 루스벨라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기꺼이 웃으면서 그 죽음을 삼킬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이 제가 각성하면 눈치채게 되어 있나요?”

루스벨라가 겁에 질린 창백한 얼굴로 데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겨우 진정한 심장이 다시 아픈 것 같았다.

‘괴로운 표정 하지 말아요.’

그걸 막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는 거니까.

“……애석하게도 맞아요. 당신이 각성하게 된다면, 저들도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각성을 미루고 그 안에 당신이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거예요.”

“어서 잘 해내고 싶었는데. 어렵네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옆에서 최대한 도울 테니.”

데니스가 루스벨라에게 다가가 더러워진 그녀의 얼굴과 손 등을 닦아냈다. 아이처럼 세심한 손길에 루스벨라는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이리 줘요. 제가 할 수 있어요.”

루스벨라가 데니스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아 갔다. 빼앗아 간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왜 저한테서 당신을 돕는 수고로움을 앗아 가려고 하세요? 속상하게…….”

보송보송한 하얀 솜털 같은 수건이 단단하게 손에 붙들려 있어 빠지질 않았다. 순수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악력이라 루스벨라는 당황했다.

“제가 가까이 있는 게 싫으세요?”

“그게 아니라…… 도와주는 건 감사하지만, 너무 세세한 것까지 챙겨주니까. 그게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해서 그렇죠.”

“뭐든 챙겨 주고 싶다 보니.”

해사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말하는 데니스를 보며 루스벨라는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어졌다.

‘……좋아서.’

나쁘게 여겨서가 아니었다. 낯간지러워서였다. 상냥한 그가 좋아서였다.

자신에게만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반칙이야.’

이게 한 편의 로맨스 소설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루스벨라는 준비된 왕자님인 데니스와 기꺼이 사랑에 빠져 해피엔딩을 맞는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그래, 그녀에게 정해진 운명이 장밋빛이었다면 감히 은인을 상대로 연심을 키웠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수혜자에 불과해. 가진 것도 없고.’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들떴던 마음이 푸시식 부피를 줄여 오므라들었다. 위축되어 작게 찌그러진 마음만이 루스벨라에게 허용되는 선인 것 같았다.

‘신성력이 없었다면, 예언이 데니스에게 내려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난…….’

흐릿하게 끊어진 뒷말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루스벨라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을 가능성을 짚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목줄이 매인 개처럼 헐떡이는 영혼을 가리고자 욕심에 찬 말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데니스.”

“네. 루스벨라.”

“내가…… 주제넘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루스벨라에게 주제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아요. 누가 그런 말을 주입한 거람.”

‘당신만이 내게 그렇게 말해 줄 거예요.’

루스벨라는 쓴웃음을 삼켰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맥박이 거세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진동이 그녀를 타박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지나친 의미 부여이리라.

“대답해 줘요. 내게는 과분한 욕심인데도, 그것을 원한다면 안 되는 걸까요?”

모호한 질문. 목적어를 알 수 없는 문장. 허술한 언어의 구조 사이에 숨어 있는 루스벨라의 사랑.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 하는구나.’

누군가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고 우습다며 조롱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두 번 다시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면서, 결국 또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고작 그녀를 도와줬다는 이유만으로 아득한 사랑의 늪에 던져졌다.

‘동정과 연민은 사랑의 시작일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사랑이 아닐 텐데.’

사랑하고 말았다. 돌이킬 수 없었다.

“당신에게 과분한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 이런 점 때문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리될 운명인 줄 알고 그에게 거부감을 표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올곧게 응시하는 그의 눈이 애정과 신뢰로 남김없이 채워져 있어서. 루스벨라라는 여자를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하게 바라보는 듯한 그의 시선이 못 견디게 달콤해서.

“무엇이건, 가지세요. 루스벨라.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어요. 없다고 하는 인간이 있다면 내가 그 입을 다물게 만들어 줄게요.”

“불법적인 수라도 쓰는 건 아니죠?”

“만약의 경우지만 필요하면 쓸지도 모르겠네요. 돈은 많은 걸 가능케 해서.”

“당신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그건 좀 참아 줬으면 좋겠네요.”

“저는 진심인데.”

“알아요.”

장난스럽게 던진 말, 억울하다는 듯이 지은 표정이지만 진담이라는 것을 알았다.

데니스가 루스벨라에게 허튼소리를 하는 적은 없었으니까.

“제가 원한다고 하면 들어줄 거잖아요. 그게 뭐든.”

“그게 제 역할이니까요.”

‘그가 말하는 역할이라는 건 아마 예언으로 본 나의 죽음을 막는 것이겠지.’

그것뿐만이 아니라 계속 그녀의 옆에 함께 있어 달라고 한다면 그는 뭐라고 답할까.

무엇이든 원하는 바를 이뤄 준다고 말하지만, 루스벨라는 그것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고마워요, 데니스.”

“별말씀을.”

넘쳐흐를 것만 같은 마음이 새어나가지 않게 억누르는 것만이 그녀의 최선이었다.

루스벨라는 여전히 사랑이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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