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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60화 (60/166)

60화

‘그랬었지.’

그래서 지금 루스벨라와 데니스는 신성력을 다루는 훈련에 맹렬히 돌입하고 있었다.

루스벨라 쪽이 무리하게까지 실전처럼 연습하고 싶다며 봐주지 말아달라고 하면서.

저번처럼 루스벨라에게 내재된 신성력을 끌어올리는 단계를 넘어서, 이제는 그 기운을 방출해 내 공격이나 방어의 수단으로 써먹을 수 있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실전에서는 멍 때리면 바로 큰일 나요.”

한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진 틈을 타 붉은 기운이 루스벨라의 뺨을 날카롭게 긁었다.

“피가…….”

“이 정도는 생채기 취급도 안 하는 건데.”

“피 나잖아요. 그런 식으로 자기 상처는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하면 버릇돼요.”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네요.”

“알긴 아십니까?”

루스벨라가 카일과의 일을 떠올리며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을 인정하자 데니스가 입을 삐죽거리며 툴툴거렸다.

‘아까는 무서운 스승님이 따로 없었는데.’

그 점을 상기하니 데니스가 조금 귀여워 보였다. 데니스는 심각한 낯으로 훈련에 임할 것을 요구했다.

“집중할게요. 다시 해 보죠.”

“당신이 가능하면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그게 조건이었다. 데니스가 루스벨라의 부탁을 떨떠름하게 여기면서도 들어준 까닭은.

“전 당신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니까요. 루스벨라 당신이 최대한 죽음을 피할 수 있도록 도울 겁니다.”

“알아요. 예언을 받았으니까. 그게 당신의 사명 같은 거죠?”

“……그렇죠.”

데니스는 어떤 예언을 받았는지는 루스벨라에게 전부 털어놓았으면서, 정작 신관이나 사제도 아닌 그가 어떻게 예언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경위는 설명하지 않았다.

‘먼저 물어보는 건 실례겠지.’

루스벨라는 그가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몹시 궁금했지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엇이든 털어놓는 사람이 꺼내지 않는 주제라는 건 반드시 피하고 싶은 이야깃거리라는 말이니까.

‘언젠가 일이 전부 끝나면 알려 주겠지.’

데니스를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루스벨라의 생존을 보장하려 애쓰고 가능하면 그녀의 모든 부탁을 들어주려는 남자였으니 신뢰는 이미 탄탄히 쌓여 있었다.

‘그러니 내가 어서 강해져야만 해.’

루스벨라의 조급함에는 데니스로부터 받는 무한한 헌신을 그만 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언제까지 신세만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녀를 재촉했다.

“조심하세요. 이번에는 피하기 어렵게 들어갑니다.”

“그런 거 일일이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붉은 기운을 두른 데니스의 신형이 멀리 서 있다가 쏜살같이 코앞으로 튀어왔다.

‘빨라!’

그리고 검에 두른 붉은 기운이 더욱 진하게 피어올랐다. 데니스가 휘두르는 검은 평소 들고 다니던 것이 아닌 평범한 목검이었다.

“이 거리에서 공격을 피하긴 어렵습니다.”

공격을 흘린다는 목적, 그것에 집착하십시오. 살아남겠다는 절박함을 붙들고 신성력을 방패 삼는 것입니다.

‘데니스가 신신당부했던 내용이야.’

다소 극단적인 연출을 통하여 루스벨라 안에 잠들어 있던 신성력을 깨우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운이 좋았던 듯했다. 루스벨라는 좀처럼 신성력의 기운을 몸에서 밀어내어 응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기 어려워했다.

“왜, 왜 안 되는 거죠?”

“아무래도 당신의 신성력이 변화에 적응을 못하는 것 같아요.”

“적응이요?”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온 생각을 고정관념이라고 하지요? 그런 것처럼, 루스벨라의 신성력도 오랜 시간 치유력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가 방출되려니 외부로의 노출을 꺼리는 것 같군요.”

“그 말은 꼭 힘의 주인인 저의 영향을 받는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맞아요. 그러니 전과 같은 충격 요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설마. 루스벨라는 기겁하며 데니스의 허리춤에 매여 있던 검을 빼앗았다.

“지난번처럼 목에 칼날을 대고 협박을 할 거라면 절대 안 돼요. 내가 허락 못 해요.”

“제가 실험대에 오르는 쥐도 아니고. 이번에는 다칠 생각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은 정말 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후우. 데니스가 답답하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검을 어딘가 던져 놓고는 연무장에 세워져 있는 목검 하나를 가져다가 덤벼들 자세를 취했다.

“제가 당신을 향해 공격하는 적이 되도록 하죠. 실전처럼 환경을 갖춰 당신의 잠재력을 끌어내도록 노력해 보는 겁니다.”

“그럼 저도 공격을……!”

“공격이 성공한다면 다행이지만, 우선은 수비부터 도전해 봐요.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지만, 우리는 생존을 위해 싸우는 입장이니까.”

“알았어요!”

“이미 시작했습니다. 전력을 다해 주세요.”

데니스와 루스벨라의 신성력 끌어내기 연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루스벨라가 며칠 기초 훈련을 받았다지만, 격투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귀족 영애의 몸은 마음처럼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그도 이 정도는 예상했는지 아주 죽일 듯한 움직임은 보여 주고 있지 않아.’

초보 중의 초보인 루스벨라가 다치는 일은 없었다. 신성력을 두른 목검은 루스벨라가 힘을 끌어내는 데 실패하면 공격을 멈추고 바로 돌아갔으니까.

‘이번에는 꼭 해내야 해!’

데니스의 붉은 기운을 두른 주먹이 쇄도한다. 맞지 않아 봤지만, 파괴적인 속도로 봐주지 않겠다는 기세로 밀려드는 것을 눈 깜짝하지 않고 바라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선을 돌리면 안 된다. 똑바로, 눈을 부릅뜨고 날아오는 공격을 주시한다. 머릿속으로는 냉정하고 차분하게 데니스가 가르쳐 주었던 신성력을 끌어내는 방법을 되짚는다.

[저를 죽여야 할 적처럼 생각하시고.]

‘강렬히, 염원한다.’

[정말 죽임당하기 일보 직전처럼 갈망하세요.]

기필코 살아남겠다고.

눈앞에 닥쳐오는 공격을 꺾을 수 있도록,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적을 섬멸하고 그녀를 지킬 수 있도록.

‘다른 건 바라지 않아.’

“나를 이기게 하소서.”

길고 미사여구로 채워진, 보호해달라는 신에 대한 기도는 하지 않는다.

‘내가 운이 좋은 사람임은 알아.’

하지만 그게 그녀가 가장 절망적일 때 기도가 닿지 않던 신에게 매달리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를 승리하게 하소서.”

심장에서부터 따뜻한 고동 소리가 몸의 혈관을 타고 흐른다. 강렬한 단 하나의 염원.

살아남고 싶다.

어떻게든, 본래대로라면 예정되어 있을 불행 따위 짓밟고 나아가고 싶다.

심장이 거세게 몸부림쳤다. 가장 화려하게 불꽃을 피워 올리는 순간처럼 푸른 기운이 사납게 살과 피를 타고 분출했다.

이전처럼 온몸에서 신성력이 방출되었으나, 그것은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느껴진다. 전에는 몰랐던 힘의 존재가!’

심장에 샘처럼 고여 있는 신성력을 느낄 수 있다. 치유력이라고 알고 있던 그것은 마치 물컹한 젤리처럼 루스벨라의 심장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얼음 같던 그 힘이 물처럼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몇 초도 안 되는 찰나에, 루스벨라는 심장의 신성력을 뽑아내 두 손과 팔로 이동시켰다.

콰앙.

두 사람이 격돌했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희뿌연 먼지가 일어났다 사라지자 풍경이 제대로 보였다.

“허억. 헉. 허억.”

“……해내셨군요.”

“저, 정말이에요?”

“네. 합격입니다. 제가 원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전개되었지만요.”

루스벨라는 두 손으로 데니스의 목검을 쥐고 있었다. 푸르게 빛나는 신성력을 담은 손에는 두 동강 난 목검의 잔해가 들려 있었다. 목검에는 다 꺼져 가는 붉은 기운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아…… 이런.”

‘원래 목적대로라면 신성력으로 방패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이기겠다, 살겠다는 욕망으로 힘을 움직인 탓인지 다소 과격한 방향으로 힘을 썼다. 공격이 아니라 수비라고 했는데, 이래서야 반쪽의 성공이었다.

“합격이라뇨. 이건 실패인데요? 거기다 제 손과 팔에만 한정해서 힘을 일으킬 수 있었어요.”

풀 죽어 어깨를 늘어뜨리는 루스벨라였다. 잠시 감격에 차서 쥐고 있던 목검 조각을 꽉 잡았다. 살갗에 부러진 나무의 거친 결이 닿아 상처를 냈다.

“이리 주세요. 그 나뭇조각. 그리고 실패 아닙니다.”

“그렇지만.”

“훌륭하게 제 공격을 막으셨습니다. 거기다 제가 가진 신성력이 담긴 목검을 부러뜨리셨다는 건, 루스벨라가 가진 신성력이 저보다 월등히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셔도 괜찮습니다.

데니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루스벨라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폈다. 그는 무기였던 목검 조각에 어떤 미련도 보이지 않고 그것을 빼내 가루로 만들었다.

“마음 아프게 또 생채기나 입고.”

“저 잘했나요?”

루스벨라의 다급한 물음에는 신성력을 심장에서 일으킬 때만큼이나 절박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데니스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이로써 당신의 신성력을 움직일 키워드도 알아냈고, 여러모로 성공적인 연습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수련할 일만 남았어요.”

‘해냈다!’

루스벨라의 얼굴 위로 햇살보다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신성력을 끌어내려는 대련을 데니스와 한 뒤라 그런지 꼬질꼬질해져 있었지만, 데니스의 눈에는 어떤 드레스와 보석을 한 차림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데니스가 웃으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루스벨라의 얼굴을 닦아주며 그가 물었다.

“그리 좋은가요?”

“얼굴에 티가 났나요?”

“아주 많이요. 이것도 실전이었다면 적들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표정이었습니다. 너무 여유롭게 보이니까요.”

“그러면 안 되는데. 방심시켜 일망타진을 해야죠. 표정 관리도 해야겠어요.”

루스벨라는 웃던 얼굴을 내려놓고 정색하며 싸늘한 표정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봤자 지금은 귀엽게만 보일 뿐인데.’

데니스가 속으로 쿡쿡 웃음을 삼켰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고 있는데, 도도한 표정을 지으려고 하니 말괄량이 공주님의 시중을 드는 시종이 된 것 같은 기분만 들었다.

‘응? 귀여워?’

그에게 그런 낯간지러운 단어가 허용이 되는 말이던가.

데니스가 갑작스럽게 떠올린 감상에 대해 의아해할 때, 루스벨라는 목검을 막았을 때처럼 손에 일어나지 않는 푸른 기운에 속상해하고 있었다.

“왜 안 되는 걸까요? 기껏 성공을 했는데…… 제가 무언가 부족한 건 아닐까요.”

“아니에요. 하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법이 있으니, 너무 조급해하진 마세요.”

“얼른 배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신성력을 깨우치고 반격의 용도로 움직인 것만 해도 대단한 겁니다. 이 진도라면 저도, 루스벨라도 원하는 수준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데니스는 안심하고 있었다.

[나와의 계약대로 성실히 임해 주고 있구나.]

‘당연한 거죠.’

그의 머릿속으로 잊힌 신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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