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59화 (59/166)
  • 59화

    카일과 레베카는 도로 지펠론 백작 저로 돌려보내지게 되었다. 다만, 가기 전에 둘과 거래를 했다.

    “아버지가 혹여라도 이상한 자들과 접촉하려는 기미가 보이거든, 곧바로 내게 연락하렴.”

    루스벨라는 카일과 레베카에게 이를 신신당부했다. 이란성 쌍둥이 동생들은 큰누이의 말을 듣고서 시선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돼?”

    “연락하는 거야 언니를 압박한다는 핑계를 대면 그만이기야 하지만…… 너무 쉬운 거 아니야?”

    쌍둥이는 의심하고 있었다. 조건이 너무 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 누이는 우릴 싫어할 만했잖아.”

    “언니의 유모 일을 비롯해서, 우리가 잘못한 것들이 많다는 걸 모르지 않아. 알면서도, 한 죄가 우리에게 있다는 거…… 알아.”

    두 어린아이는 살아남고 싶었다. 아버지인 지펠론 백작을 싫어하면서도 그의 애정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루스벨라의 고통을 알면서도 고통의 크기를 부풀리는 일에 동참했다.

    “……아버지가 이상한 짓을 할 것 같아서 걱정이라면, 그건 그냥 알려줄 수 있어.”

    카일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카일과 레베카는 적어도 더 큰 대가를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고작이라니.’

    누이가 부러웠다. 루스벨라 혼자서만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 미웠다. 그들을 도와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루스벨라가 그들을 외면했다면 화를 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번처럼 상식 밖의 행동을 저지를까 봐 두려운 거잖아. 누이를 구속하려는 거. 그게 무서운 거지?”

    “엄밀히 말하자면, 이제 아버지가 무섭지는 않아.”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을 막아야 하니까.’

    살해당할 수 있다는 위험 앞에서 지펠론 백작의 탐욕은 별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죽는 것과 남보다 못한 아버지 뜻대로 착취당하는 인생을 비교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아버지는, 지펠론 백작이 불쌍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거든. 딸이 자기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도록 억압하면서 키우는 사람이, 제대로 된 인간은 아니니까.”

    루스벨라는 쓰게 웃으며 카일의 물음에 답했다. 카일과 레베카는 둘 다 눈을 홉떴다. 그들의 누이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가벼이 넘기지 못했을 텐데.’

    “어째서? 어째서야?”

    “그토록 미워하던 아버지잖아. 뭐가 언니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든 거야?”

    두 아이가 다급하게 루스벨라를 채근했다. 카일과 레베카는 루스벨라의 치맛단을 붙들었다. 바르르 떠는 작은 주먹 두 쌍에서 간절함이 엿보였다.

    “우리에게도 가르쳐 줘. 그게 무엇이든 가르쳐 주면 배울게.”

    “……특별한 건 없어.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

    루스벨라가 데니스의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카일과 레베카는 어리둥절해져서 두 사람 사이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저으며 바라봤다.

    “이 사람 덕분이야. 날 무조건적으로 믿어 주고,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있어서. 그 덕에 나는 이제 괜찮을 수 있어.”

    “그게…… 다라고?”

    “너희도 그렇지 않니? 난 혼자였지만, 너희는 쌍둥이니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집에서 버틸 수 있었잖니.”

    루스벨라가 손가락을 들어 두 동생이 꼭 마주 잡은 손을 가리켰다. 카일과 레베카는 후작 저에 온 이후로 절대 맞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그런 너희들이 부러웠는데.’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그저, 결국 동생들도 그녀와 다른 처지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아. 너희들에게 쌓인 원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희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더 크다.”

    유모의 일은 쌍둥이 동생들의 잘못이 맞았다. 그 외에도 숱하게 아비의 환심을 얻으려 꾸며낸 자잘한 ‘사고’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잊는 건 아니야.’

    정말 잊었더라면 이 아이들에게 대가 없이 순수한 선행을 베풀었을 것이다.

    “……거짓말. 무슨 여유가 있어서.”

    아이들은 건방진 소리를 하면서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두 손을 꼭 잡고, 부러움과 질시에 찬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믿든 안 믿든 그건 너희의 자유야. 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남을 거고, 거기에 너희도 틈을 살짝 빌려주겠다고 말하는 거야.”

    “우릴…… 거둬 주겠다는 거야?”

    “아버지의 감시를 조건으로. 그리고 끝까지 너희를 데리고 있을 생각은 없어.”

    “그럼?”

    “방계에 너희들을 맡길 거야. 아버지, 지펠론 백작에게 그것보다 더한 복수는 없을지도 모르지.”

    루스벨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쌍둥이의 눈이 빛났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지펠론 백작 가가 아들만 예뻐라하고, 딸은 무자비하게 차별했다는 것을.

    ‘당장 카일과 함께 태어난 레베카만 해도 서러울 게 많은걸.’

    카일과 레베카는 운명 공동체처럼 서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남매였다. 지펠론 가가 아무리 아들 선호사상에 찌들어 있는 잘못된 가문이라 해도, 카일은 레베카를 아꼈고 레베카를 지키고 싶어 했다.

    “우리가 가문을 나서게 되면.”

    “지펠론 백작 가는 후계자가 없어서 명맥이 끊기겠네?”

    “방계의 이모님들은 이미 절연하신 지 오래라 연락이 닿을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끌리는 제안이야. 아버지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건…….”

    쌍둥이는 희열에 차서 둘이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작 십 대 초반의 아이들이 생각하기에는 무서운 소리였지만, 루스벨라는 이해했다.

    ‘저 아이들 나름대로 참은 게 많았겠지.’

    그들 삼 남매에게 조금 더 일찍 타개책이 주어졌다면, 지금처럼 사이가 갈라질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됐어. 다 지난 일.’

    돌이켜 봤자 과거의 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이다. 신은 없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정은 내렸어?”

    끄덕거리는 작은 머리통 두 개.

    “좋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너희들이 더 잘 알 것 같네.”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편지를 보낼게.”

    “아버지에게는 언니를 감시하려고 거짓으로 친한 척하고 있는 거라고 하면 좋아하실걸?”

    생존에 최적화된 영악한 아이들은 두뇌 회전이 빨랐다. 두 사람은 이미 준비된 첩자였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는 이의 몸짓은 절대 추하지 않다. 그 노력이, 절박함이, 사활을 거는 이가 가진 무게가 얼마나 무겁던가.

    그것을 아름답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비웃는 자가 있다면 목을 베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루스벨라가 희미하게 손 위로 신성력을 흘렸다. 푸른 기운이 작은 물방울처럼 맺혔다가 사라졌다.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게 된다면…….’

    더는 날 아무도 멋대로 노릴 수 없게 만들 수 있을 거야.

    ***

    ‘그게 며칠 전의 일이었지.’

    멍하니 생각하는 루스벨라에게 데니스가 경고했다.

    “루스벨라, 집중해요.”

    “윽!”

    슈욱. 뺨 근처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붉은 기운이 날아갔다. 데니스의 신성력이었다.

    “신성력을 하루빨리 잘 다루고 싶다고 한 건 루스벨라예요. 실전처럼 연습하고 싶다고 조른 것도 당신이고요. 그런데 이렇게 흐트러진 집중력이면…….”

    데니스가 루스벨라에게 다가와 손수건으로 뺨을 닦아 줬다. 살짝 피가 묻어 나왔다.

    “이건.”

    “제가 이렇게 다칠 것 같아서 걱정했던 건데. 절 죽일 기세로 임하겠다고 약조했으면서. 약속을 어기는 못된 어른이셨군요.”

    루스벨라를 비난하는 어조였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데니스는 자신이 다친 것이 더 나을 사람처럼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울 것 같은 얼굴. 자주 보는 것 같은데.’

    “이 정도는 괜찮아요. 이런 건 앞으로 무수히 날 상처 중에 하나…….”

    “그런 마음가짐으로 임한다면 실전 대련은 받지 않을 겁니다.”

    “……이러기예요?”

    “동생들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힘을 기르는 목적을.”

    “……그랬죠. 네.”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제게 말한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카일과 레베카를 데벤테르 후작 가에서 준비한 고급 마차에 태웠을 때, 카일이 그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누이는 아버지에게 복수하지 않을 거야?”

    “할 거야.”

    “후작님의 손을 빌려서?”

    카일은 흘끔 데니스를 쳐다봤다. 어린아이가 보기에도 데벤테르 후작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누이의 혼처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단한 곳이라고는 했지만, 내뿜는 기세부터가 다르잖아.’

    카일도 귀족 영식인 만큼 무예는 상식이자 교양으로서 배웠다. 자질이 뛰어나지 않아 많은 성취를 이룩하지는 못했지만, 매형이 된 후작은 쉽사리 건들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저 사람, 전쟁터에 던져 놔도 무사히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올 것 같은데……?’

    그러나 루스벨라의 앞에서만큼은 달게 익은 딸기처럼 구는 것이 퍽 기이해 보였다.

    ‘정말 사랑하기라도 하는 걸까.’

    그래서 그의 누이가 빠른 시간 내에 안정을 찾아 못된 동생들에게도 기회라는 것을 주는 것일까.

    ‘복수도…… 사랑하니까 다 해 주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카일의 머리를 루스벨라가 살짝 꿀밤을 먹였다.

    “아야. 왜 그래?”

    “내 손으로 할 거니까 그렇지.”

    “어떻게? 누이 혼자서 무슨 힘이 있다고.”

    ‘무슨 힘이 있기는. 신성력이 있지.’

    루스벨라가 데니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일이었다. 치유력이 사실은 각성시키기 전의 초라한 신성력의 모습이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테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루스벨라가 신전에게 이 힘을 노려 죽임을 당한다는 예언을 데니스가 받지 않았더라면 평생 몰랐을 사실이었다.

    “그런 게 있어. 너에게는 아직 알려 줄 수 없지만.”

    카일과 레베카가 자신들의 복수와 자유가 걸려 있는 만큼 허투루 일을 처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입놀림도 조심할 것이란 생각도 있었다.

    ‘그렇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잊힌 신의 신성력을 쓴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왜 없었겠는가. 신전이, 에덴이 기밀로 처분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도록 처신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죽은 사람들은 말이 없지.’

    루스벨라는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자신처럼 죽어 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비밀은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그녀는 신성력을 길러 생존을 꾀하면서 지펠론 백작을 향한 복수에도 이용할 계획이었다.

    “난 가문을 풍비박산 낼 생각이야.”

    “뭐?”

    “아버지를 박살 내는 건 패륜이니까, 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걸 망가뜨리는 게 최고의 복수가 되겠지.”

    쌍둥이는 가문의 명맥을 끊고, 장녀는 돌아갈 구멍조차도 없도록 가문을 지워낸다.

    “이게 내 복수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