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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58화 (58/166)

58화

데니스가 잡아먹을 것처럼, 아니 씹어 먹을 것처럼 지펠론 백작을 위협한 덕에 백작은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다.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패배해서 도망치는 악당 같은 소리도 못하고 줄행랑을 쳤다.

자식인 쌍둥이를 챙길 정신도 놔두고서.

“아버지?”

“아빠! 같이 가요!”

카일과 레베카 또한 데니스의 흉흉한 살기에 짓눌려 도망치려 했으나, 아비인 백작이 워낙 빠르게 도망쳐 마차에 발도 못 들이고 남겨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모, 모르겠어.’

기세 좋게 후작 가 정문으로 들어왔지만, 그들은 아직 어린애에 불과했다. 게다가 지펠론 백작만 믿고 쳐들어왔는데, 그가 홀라당 아이들을 놓고 갔으니 귀족이라 해도 당장 갈 곳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를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 같은데.’

카일과 레베카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오기 전에야 누이인 루스벨라에게 어떻게든 집에서 빠져나가게 해달라는 도움을 요청할 계획이었지만,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는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어린아이니까 외면하지는 않을 거야.’

쌍둥이 남매는 힐끔힐끔 데니스를 곁눈질하며 눈치를 봤다. 지펠론 백작과 루스벨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어린아이인 그들을 내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긴 싫어.’

‘조금이라도 시간을 유예해야…… 누이가 우릴 만나 줘야 일이 조금 풀릴 텐데.’

초조함이 뒤섞인 눈으로 카일과 레베카가 겨우 모기만한 목소리를 냈다.

“저, 저기요. 후작님.”

“저희라도…… 언니를 볼 수 있을까요?”

“지펠론 영식과 영애인가?”

“네…… 네!”

최대한 가련하고 해 될 것 없다는 표정을 가장하여 카일과 레베카가 눈망울을 반짝였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어떻게 하면 애정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지 터득하며 자라온 영악한 아이들이었다.

‘백작인 아버지는 싫어해도 우리까지 들여보내지 말라고는 못 하겠지.’

루스벨라가 그들에게도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싫어할 만한 사건이 있다고 하기에는 애매하다고 판단했다.

“아픈 누이를 꼭 만나고 싶어요. 홀로 있을 누이가 걱정되어서요. 실례인 걸 알지만…… 누님과 만날 수 있도록 말씀이라도 전해 주세요.”

“저도 부탁드릴게요!”

앙증맞게 생긴 어린아이 둘이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여 가며 부탁하는 것은 안쓰러움과 동정심이 일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이 정도면 후작도 우리가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겠지?’

슬그머니 허리를 든 그들에게 보인 것은 차가운 눈빛이었다.

‘어……?’

‘왜…… 아무런 반응도 없지?’

카일과 레베카는 초조해졌다. 데니스 데벤테르는 귀여운 어린아이들의 호소에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너희들은 물러가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우선 데니스는 지펠론 백작의 방문으로 모여든 고용인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루스벨라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했지만, 가정사가 일일이 다 까발려져서 좋을 건 없지.’

그리고 다른 계산도 들어간 셈이었다. 이 어린아이들은 그녀의 동생들이 맞지만, 그녀가 ……하게 되는 데에 그들의 탓이 조금도 없다고 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지펠론 영식, 영애.”

데니스의 목소리는 차갑고 무감각했다. 쌍둥이는 그것이 무서웠다.

‘아버지의 기분은 말에서 바로 티가 나던데.’

‘이 사람은 전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네, 네.”

“두 사람은 정말 단순히 누이가 걱정이 되어 온 것이 맞나?”

내가 보기엔 아니거든.

“그, 그게 무슨 소리세요?”

“맞아요. 저희는 아버지와는 다른…….”

두 어린아이가 항의의 말을 꺼내려고 하자 데니스가 제지했다.

“루스벨라는 내게 결혼식 이후로 가족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어. 왜일까.”

“그건, 언니가 내성적인 성격이라 이야기를 꺼려서…….”

“그건 아니야, 영애. 루스벨라는 우리 가문에 소속된 후로 많이 밝아졌지. 나와 대화도 많이 나눴고.”

그렇지만 루스벨라가 동생들의 이야기를 입에 담은 적은 없었다. 데니스의 기억대로라면 분명 그러했다.

“이상하지 않아? 동생들이 단순히 누이를 걱정해서 온 거라면, 그렇다면 사이가 좋았을 텐데. 왜 내 부인께서는 심지어 가족들이 코앞에 온 상황에서도…… 영식과 영애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을까.”

“…….”

카일과 레베카는 기가 눌린 듯 얼굴이 새파래졌다. 두 아이가 잡고 있는 손이 거세게 맞물렸다.

‘알고 있었는데.’

‘누이가 우리를 반기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럴 위치가 되지 않음에도 서운함이 스쳤다.

데니스에게 그 둘의 감정은 관심 외의 것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사람은 오직 루스벨라뿐이었다.

“그녀에게 뭘 요구하러 왔습니까? 병문안을 핑계로, 부탁할 것이 있었겠죠.”

계속 하대를 하던 말투를 굳이 바꿔 존대로 해도 특유의 위압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 무섭기만 했다. 속이 이미 다 까발려진 그들 앞에서 그나마 예의라도 차려 주는 것이 마지막 배려라고 하는 것 같아서 거부감이 들었다.

“……저희가 그걸 알려 드릴 바는 아니잖아요.”

“들어야지. 내가 그녀의 보호자이자 남편인데. 그나저나 부탁할 게 있어서 왔다는 말을 부정하지는 않네.”

“다 알고 계신 것…… 같아서요.”

“당연한 것 아닌가. 지펠론 백작 가의 양육 방식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답은 금방 나오지.”

카일과 레베카는 입술을 짓씹었다. 둘의 방어적인 모습이 나오자 데니스는 루스벨라를 떠올렸다.

“마차는 빌려줄 수 있어. 지펠론 백작 저로 돌아갈 수 있게 조치는 취해 두지.”

“싫어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어, 언니에게 최소한 말이라도 꺼내게 해 주세요. 우, 우리도 집에서 나오고 싶어요. 이제 언니라면 우릴 꺼내 줄 수 있잖아요.”

절박한 목소리가 남매에게서 터져 나왔다. 커다란 눈 두 쌍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영식, 영애. 하나만 묻지.”

“……무엇인가요?”

“두 사람은 지펠론 백작 저에서 루스벨라와 있을 때, 그녀를 도와준 적이 있나?”

“…….”

“…….”

아교로 붙인 것처럼 두 아이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마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카일과 레베카는 루스벨라와 완전히 다른 외양이었다. 둘은 부친인 백작 쪽을 빼닮았다. 그리고 첫째인 루스벨라가 심한 통제 속에서 자라는 것을 보며 어떻게 해야 둘은 자유로울 수 있을지 터득한 아이들이었다.

백작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애교를 부려 누이보다 한층 나은 생활을 했다. 카일이 아들인 덕분도 있었다. 같이 태어난 레베카는 카일이 제 쌍둥이임에 감사하며 이 평안이 오래가길 빌었다.

‘그래서 우리는 누이가…… 오랫동안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랐지.’

두 아이는 영악하게 살아남았다. 루스벨라에게 아비의 모든 학대가 집중되도록 아주 조금, 손을 보탰다. 쫓겨난 유모의 일을 고발한 것이 그 예였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무서웠다. 잔뜩 가라앉은 기세로 그들을 노려보는 데니스에게 거짓말을 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대답을 못 하는 것을 보니 알 만하군.”

“우리는…… 고작 어린애였다고요.”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친 게 뭐가 나빠. 우리도,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상황이 이렇지 않았다면 우리도, 누이도 모두 괜찮았을 거라고.”

“그런 말은 의미가 없어.”

지나간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이랬으면 더 좋았을 것을, 이라는 가정 따위는 사람을 더 추하고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남매의 사정은 딱했다. 그러나, 죄 없이 지펠론 가의 희생양으로서 살아야 했던 루스벨라의 인생은 그렇다면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나.

“……우리를 전혀 만나고 싶지 않아 해요? 누이가?”

카일이 물었다. 데니스는 무표정한 낯으로 대답했다.

“그런 말 자체가 없었지. 두 사람을 잡아 둔 건, 단순히 내 변덕이야.”

“왜…… 요?”

“영애와 영식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를 바라서.”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카일과 레베카는 둘 다 한쪽 눈가를 찡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런 게 있어. 아, 이런. 루스벨라,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는데.”

루스벨라라는 소리에 카일과 레베카가 동시에 문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회색 머리에, 녹색 빛의 눈인 그들의 누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카일. 레베카. 너희로구나.”

“누이.”

“언니.”

카일과 레베카가 보기에 루스벨라는 이전보다 혈색이 좋았다. 병문안이라고 온 게 괜히 왔나 싶을 정도였다.

“누…….”

“그런데 여긴 왜 왔니? 나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는데.”

아이들의 가슴 위로 비수가 꽂히는 것 같았다. 두 아이는 자신들의 잘못을 모르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그래서…… 누이에게 부탁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집에서 나오고 싶었다. 한때 구박만 받고 살던 누이가 부러워서 도와 달라고 떼를 쓰고 싶었다.

“……미안해.”

“아, 아버지가 우릴 놓고 가셨어. 후작님께서 마차를 빌려주실 수 있다고 하셨어. 언니 얼굴을 봤으니까…… 됐어. 미안해. 얼른 갈게.”

둘을 보자마자 피로에 찬 눈을 봤다. 루스벨라에게 카일과 레베카는 가족 아닌 가족이었다. 같이 있으면 의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홀로 남겨지는 고통만 남겨두던 가족.

“……너희가 어떤 이유로 아버지와 동행해서 후작 가에 따라온 것인지는 알 것 같아. 하지만, 나는 너희를 책임질 여유가 없어.”

루스벨라의 초기 목표는 자유로운 삶을 얻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내 호불호를 따지기 이전에, 내 곁에 있으면 저 아이들도 위험해.’

데니스가 받은 예언에서 어디까지 미래가 비쳤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신전에 의해 살해당하는 미래가 나왔다면 필시 그녀의 가문인 지펠론 백작 가도 무사하지는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알아요. 죄송합니다, 누이.”

“미안해…… 언니.”

카일과 레베카가 작은 머리통을 바닥에 처박을 것처럼 떨궜다. 알겠다고 했으면서, 아이들의 목소리는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희들을 지금 받아 줄 수는 없어.”

“?!”

“지금…… 이라면…….”

루스벨라는 데니스와의 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저 아이들이 혹시라도 지펠론 백작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내게 되면 다가올 후폭풍을 감당키 힘들어지니까.

‘무엇보다 카일과 레베카는 내가 후작 부인이 되어 경제적으로 넉넉해졌다는 점을 보고 온 것일 텐데, 후작 가의 재산은 데니스의 소유지 내 것은 아니니까.’

데니스가 제게 세상을 바칠 것처럼 헌신적이다 하더라도 공사는 구분 지어야 했다.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도 아니면서 그의 어깨에 짐을 늘리고 싶진 않았다.

“나중에, 내가 일이 다 해결된다면…… 그리고 그때까지 너희들도 내게 했던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하여 용서를 구한다면 우리 같이 떠나자.”

“저, 정말?”

“정말이야, 언니……?”

“그래. 그게…… 우리가 아버지께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일지도 모르겠거든.”

루스벨라가 복수하고 싶은 건 아슬란 윈체스터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인 지펠론 백작에게도 한 방 먹여 주고 싶었다.

“그러니 너희들도 집에서 나오고 싶다면, 내게 믿음을 보여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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