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커헉.”
주먹이 제법 매웠다. 아니, 매서운 정도가 아니라 꽤 아팠다.
‘신성력을 일시적으로라도 개방한 덕분인가.’
명치를 맞은 데니스가 쿨럭거리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루스벨라는 비틀거리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왜, 왜 그래요? 많이 아파요?”
“네…… 많이 아프네요…….”
“……장난 아니고요?”
“정말 아파요, 루스벨라.”
데니스가 눈가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달고서 멈추지 않는 기침을 토했다.
‘별로 안 아플 줄 알고 그런 거였는데.’
굳이 명치를 때린 것은 정말 그녀가 화가 났음을 보여 주려고 한 행동이었다. 상해를 입힐 생각은 일절 없었다. 루스벨라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마른 뼈대가 드러난 주먹을 날려 봤자 얼마 아프지도 않다는 것도.
“신성력 때문에 그래요. 그, 푸른 기운.”
“아, 이것 때문에.”
푸르고 따뜻한 기운이 루스벨라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타지 않는 불 속에서 헤엄치는 기분이라 신기했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갈무리하는 거죠? 계속 이 상태로 남아 있을 수는 없잖아요.”
푸른 기운을 손으로 잡으려는 것처럼 휘적여 봐도 소용없었다. 원래 루스벨라와 함께 존재하던 것처럼 푸른 기운은 사라지지 않고 그녀를 맴돌고 있었다.
‘주위를 물렸다지만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좋을 게 없어.’
귀족이 기거하는 저택에 경쟁의식을 느끼는 다른 가문의 첩자가 들어와 있는 경우는 흔했다. 루스벨라는 그것을 염려하며 어서 푸른 기운이 들어가길 바랐다.
그러나 푸른 기운은 마개를 열어 버린 와인 병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허우적거린 손에서는 멋대로 기운이 창처럼 쏘아져 나와 돌바닥 위에 구멍을 냈다.
‘제어가 안 되잖아!’
“이것 좀 도와줘요, 데니스! 이러다 내가 연무장을 완전히 망가뜨릴 것 같아요.”
“괜찮아요. 연무장이야 제가 박살 냈다고 하고, 새로 지으면 되니까.”
데니스가 천연덕스러운 어조로 웃으며 말했다. 루스벨라는 어이가 없고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제어하지 못한 신성력은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태평하게 있지 말고 도와줘요!”
“명치 맞은 게 아직도 아파서요.”
데니스가 명치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에 넘어갈 루스벨라가 아니었다.
“그건 당신이 잘못한 일이었잖아요! 세상 어느 누가 자기 목숨을 그렇게 쉽게 버리려고 해요. 길거리 어디에 나가든, 누구에게 물어보든 다 당신이 잘못했다고 할 걸요!”
루스벨라는 자신이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데니스의 헌신은 고맙지만, 목숨을 걸면서까지 그녀를 도와주려는 행동은 비정상적인 것이 맞았으니까.
‘사람이면 자기 자신을 아껴야지!’
데니스는 그저 그녀의 말에 미동 없이 웃기만 했다. 아주 작게 무어라 읊조리면서.
“글쎄요. 나도 언제 그런 멍청한 사람을 보고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뭐라고요?”
“아니에요. 잠시.”
데니스가 루스벨라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향취가 코끝으로 느껴지니 어깨가 절로 움츠려졌다. 너울거리는 푸른 불꽃에 그가 행여나 다칠까 걱정했다.
“……뭐 하려고요? 그러다 다치면…….”
“괜찮아요. 그리고 실례 좀 할게요.”
데니스가 루스벨라의 심장이 위치한 위로 손을 올렸다. 가슴에 닿으려는 파렴치한 손길은 아니었다. 심장 가까이에서 멈췄을 뿐.
“신이여, 당신이 사랑하는 자를 보살피소서.”
낮고도 고운 목소리가 노래하듯 주문을 읊었다. 신전에서 가르쳐 주는 찬송가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편안하고, 기분 좋은 울림.’
당황스러움으로 경직되어 있던 몸의 근육이 스르륵 풀렸다.
“당신께서 내린 진정한 축복을 받은 자를 구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진정한 사명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붉은 기운이 데니스가 말하는 발음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잊힌 신을 그리워하며 힘을 빌려 달라는 노래에 섞인 신성력이 점점이 찍힌 음표가 되어 하나의 진을 연성했다.
그리고 그 진은 루스벨라의 심장 위로 이동했다. 붉은 진은 심장 위로 안착하여 푸른 기운을 빨아들였다.
“힘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야. 이건, 이 느낌은.’
진이 먹어 치운 루스벨라의 신성력이 다 모이자 그것은 산산이 부서졌다. 흩어졌던 신성력을 다시 그녀의 심장에 되돌려주면서.
심장이, 물그릇처럼 느껴졌다. 이전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힘이 차오르는 것이 선연히 느껴졌다.
찰랑찰랑. 심장이되, 심장이 아닌 것이 맥동하고 있었다. 푸른 불꽃을 담은 무언가가 그녀의 심장과 함께 있었다.
“다 됐네요.”
데니스가 루스벨라로부터 몇 발자국 멀어졌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를 의식했는지, 그의 뺨이 평소보다 붉었다.
루스벨라는 믿어지지 않는 힘의 원천인 자신의 가슴께 위에 손을 얹으며 데니스에게 물었다.
“오늘의 수업은 이대로 끝인 건가요?”
“네. 가장 중요한 힘의 개방을 해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괜찮아요. 더 배우고 싶…….”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시야가 흐릿해지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윽…….”
‘왜 이러는 거지?’
속이 메슥거리고 안에 있는 것을 토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헛구역질이 기어이 나왔다. 데니스는 그런 그녀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무리예요. 당신은 비각성 상태에서 신성력을 개방했어요. 더 하면 헛구역질로 위액이 아니라 피를 토할 수도 있어요.”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루스벨라의 몸에는 힘이 없었다. 데니스의 말마따나 무리하게 신성력을 운용한 탓인 듯싶었다.
“비각성이라…… 그 흰 머리 꼬마도 날 보고 그랬는데. 미성숙한 대체품이라고요.”
루스벨라가 채근하듯 데니스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힘이 없어서 찌르기보다는 살짝 눌렀다가 떼는 것에 불과했다.
“‘성숙’이 각성을 의미하는 거라면, 내가 각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투명한 녹색 눈이 붉은 눈동자를 직시하고 있었다. 데니스는 루스벨라를 한 번 고쳐 안고서 대꾸했다.
“거기까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당신은 각성을 한 신성력 보유자가 아닌가요?”
“아니에요. 저는 신의 예언을 받은 대리자로서, 당신을 인도하는 역할을 받아 신성력을 조금 나눠 받았을 뿐이에요. 각성을 거친 사람이 아니죠.”
그렇다면 데니스는 어떻게 이렇게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는 걸까. 루스벨라는 그것이 궁금했다.
옮기는 걸음 하나하나를 세다가 조심스럽게 루스벨라가 질문했다.
“예언 때문인가요?”
그가 올린 기도에 있던 단어, 사명감.
‘대가 없는 헌신의 원천은 이것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이유 모를 아쉬움이 차올랐다. 납득 가능한 이유인데, 심장이 지끈거렸다.
“……그렇죠. 편법을 거쳐 얻은 능력이지만, 잘 다룰 수 있어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편법이라뇨? 예언을 통해 얻은 힘이니 정당한 것 아닌가요?”
“저는 신성력을 잠깐 빌린 처지에 불과하니까요.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제 능력에는 한계가 있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
데니스가 루스벨라를 푹신한 소파 위로 놓아주려는 때였다.
“주인님. 밖에 초대하지 않은 손님께서 계십니다.”
집사가 닫힌 문을 두드려 고했다. 숨이 차는 것으로 보아 뛰어올라온 것 같았다.
“누구지? 누구길래 이리 급박한 걸음으로 왔나.”
“그것이…… 마님의 가족분들인 지펠론 백작 가의 사람들이 당도했습니다.”
지펠론 백작 가라니. 루스벨라는 머리가 하얗게 비는 감각에 멈칫했다.
‘결혼하고 난 뒤에는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두기로 하셨으면서.’
탐욕스러운 지펠론 백작이, 아버지의 모습이 우그러진 형태로 기억난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방문 목적은 뭐라고 하던가?”
“건국 기념일에 있던 사건으로 마님의 마음을 걱정하셔서 왔다고 하십니다.”
루스벨라의 가빠졌던 숨이 뚝 끊겼다.
‘걱정?’
아비인 지펠론 백작이 그녀를 순수하게 걱정하던 때가 언제 있었다고.
집사의 말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그리고…… 손님은 지펠론 백작님만이 아니십니다. 자제분들도 함께 오셨더군요. 꽃다발을 들고서요.”
“병문안이라도 온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집사는 데니스와 루스벨라의 눈치를 봤다. 후작 저에서 머무른 나날이 이제는 꽤 지나 이곳의 고용인들은 지펠론 백작 가와 안주인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어, 어찌할까요? 막무가내로 들여보내 달라 강짜를 부리시는데…….”
일개 집사는 귀족을 막을 수 없다. 모시는 주인의 축객령이 떨어져야 보낼 수 있었다.
“들여보내지 말아요.”
몸은 멈췄어도 목소리는 제대로 나왔다.
“그 사람들, 들여보내지 마세요.”
그녀는 가족이란 단어에 좋은 기억이 없었다.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그녀도, 나도 상처받지 않고 끝날 수 있을까.’
아슬란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루스벨라도, 그녀의 남편인 데니스도 윈블 영애의 일로 얼굴을 마주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강경하게도.
아슈라 윈블이 악다구니를 쓰는 것을 본 목격자는 많았다. 마땅히 북부의 책임이었다. 아슬란은 루스벨라에게 미안한 감정도 곁들여 최대한 보상해 주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을 전혀 달갑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딸을 잃은 윈블 자작이 선봉장이 되어 아슬란을 방해하고 있었다.
“제 딸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각하!”
“저렇게 갑자기 목숨을 끊을 아이가 아닙니다. 데벤테르 후작 부인, 그 여자의 흉계임이 분명합니다!”
자작 내외는 아슬란의 거처 근처에서 시위를 벌였다. 딸의 원한을 풀어 줘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루스벨라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지 못한 북부의 다른 귀족들도 윈블 자작의 편을 슬그머니 들었다.
“딸을 잃은 고통이 클 텐데, 무엇하러 보상까지 해야 한단 말입니까.”
“수상쩍은 자살 사건 아닙니까? 후작 부인이 앙심을 품고 저지른 일일지 누가 알겠어요?”
“이러다 북부에 피바람이라도 불면 전쟁이라도 불사해야죠.”
아슬란이 데벤테르 후작 가에 보상해야 할 금액은 결국 북부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아슬란 산하의 북부 귀족들은 그게 영 거슬렸다.
“공작 각하께서는 정의로운 분이시니 저희 마음을 이해하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