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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55화 (56/166)
  • 55화

    데니스의 설명은 너무 추상적이었다. 루스벨라는 난감했다. 망망대해 위를 떠도는 조난자가 된 기분이었다.

    “너무 어려워요. 단서를 더 줄 수는 없어요?”

    데니스는 루스벨라의 말에 붉은 기운으로 타오르던 검의 형태를 흡수하고는 대답했다.

    “글쎄요. 참고할 만한 비교군이 없어서 저도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 외의 다른 신성력 보유자는…… 오로지 신전의 사람들뿐이니까요.”

    루스벨라는 그 말에 침묵했다. 정보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신전 측에 가서 물을 수는 없었다.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이니까.’

    고양이 앞에 생선을 놓아도 유분수지. 루스벨라가 아무리 교묘하게 말을 돌려 신성력을 운용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들 위험했다.

    만일 에덴 측이 수상한 낌새를 눈치라도 챈다면.

    그것 때문에 예언으로 예정된 죽음을 더 빠르게 앞당겨지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오싹했다.

    ‘나뿐만이 아니야. 내 주변도 엉망이 되겠지.’

    데니스에게 신성력과 예언을 내려 준 ‘진짜’ 신은 이미 수백 년 전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에덴은, 현재의 국교는 제국의 건국부터 함께 했을 테니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그 흰 꼬마는 내게 대체품이라 말했지. 숙성이 덜 되었다고 했고.’

    루스벨라는 아벨이 말한 ‘성숙’의 조건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성숙’이 끝난다면, 에덴 측이 언제든지 다시 그녀를 찾아올 것이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지난 기억을 되새김질할수록 공포는 커져 갔다.

    인간 같지 않던 압도적인 힘. 막을 수가 없어 무기력하게 당해야만 했던 그녀의 모습.

    ‘두 번은 안 돼.’

    첫 번째 습격은 순전히 조건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없었다. 루스벨라를 노린 사냥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줄어들지 않는 공포를 삼켜내고 루스벨라가 데니스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알려 줘요. 당신이 어떻게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그다음은 제가 노력해 볼게요. 될 때까지 매달리는 거, 그거 하나는 잘 할 수 있으니까.”

    녹색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데니스는 루스벨라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입을 열었다.

    “제 경우는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지키려는 마음이라.”

    어쩐지 전설 속에 나오는 용사와 같은 계기였다. 용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하려는 기사를 지탱해 주던 기사도의 정신과 같았다.

    ‘데니스의 소중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루스벨라의 머릿속에서 기사에 데니스가, 공주에는 모르는 여자가 대입된다. 데니스가 사력을 다해 지키는 여자가 활짝 웃는다.

    열어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심장이 싸늘해졌다.

    “하지만 그것이 확실하게 힘을 사용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인지는 몰라요.”

    “어째서죠?”

    “이미 소중한 사람을 잃었으니까.”

    “아…….”

    “생전에는 소중한 줄도 몰랐으면서, 바보같이 잃은 후에나 깨닫다니. 얼마나 어리석어요?”

    “…….”

    루스벨라는 방금 전의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데니스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보낸 사람을 그녀는 질투하고 있었다.

    ‘응?’

    질투? 질투라니.

    ‘미쳤어. 루스벨라.’

    어떻게 은인을 상대로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거야. 지금이 그럴 때야?

    루스벨라는 상상 속에서 그녀 자신을 내려치며 데니스에게 말했다.

    “하지만 뒤늦게라도 그 사람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힘을 쓸 수 있게 된 것 아닌가요?”

    “맞아요. 잊힌 신으로부터 신성력을 받았을 때, 가장 강렬하게 든 생각이라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그 마음이 당신이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겠죠.”

    데니스가 말해 준 단서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웠다.

    “광기에 가까운 염원, 그게 저는 조건이 아닌가 합니다.”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힘인데도요?”

    “부드러운 마음가짐이 아니에요. 제가 느꼈던 건…… 모든 것을 바치고서라도 이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맹목적인 열망이었거든요.”

    자기 자신을 파괴해서라도 지켜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는 것.

    그것이 잊힌 신이 준 선물인 신성력을 일으키는 원동력 같다고 데니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 단서에 매달려 봐야 알겠죠.”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열망.

    ‘내게도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해.’

    루스벨라가 제 심장께를 내려다봤다가 소중한 사람이 누구일지를 생각해봤다.

    ‘아버지……는 절대 아니고. 카일과 레베카도…… 내 동생들이긴 하지만 그 애들이 목숨을 바치고 싶을 정도로 소중한가?’

    지펠론 백작 가에서 보낸 시간은 가시밭길을 걷는 나날이었다. 피가 이어진 혈육은 의미가 없었다. 그녀에게 진정으로 소중했던 가족은 돌아가신 어머니뿐이었다.

    ‘그럼 누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쉬이 내놓을 수 없었다.

    소중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데니스와 결혼하면서부터 그녀의 좁은 인간관계는 넓어졌다. 데니스도, 지아나도, 다이앤도, 엘렌도 다 소중했다.

    하지만,

    ‘내가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루스벨라의 사랑은 언제나 실패로 끝났다. 아버지에게 바친 가족의 애정은 이용당하기만 한 쓰레기가 되었다. 첫사랑이던 아슬란에게 보낸 애정은 닿지도 못하고 썩어 문드러져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마음은 텅 비게 되었다. 좁고, 작아져서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루스벨라의 사랑은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부끄러웠다.

    ‘이래서야 짚을 엮어 만든 인형과 내가 뭐가 다를까.’

    “루스벨라?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어요.”

    따뜻한 손이 다가왔다. 데니스의 것이었다.

    “……제게도 조건을 충족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조금 웃겼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한 마음이 없어서 죽게 된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 나오는 헛웃음이었다.

    “있을 겁니다. 있을 거예요.”

    “정말요? 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데.”

    루스벨라는 힘없이 웃었다. 데니스는 그녀에게 유독 상냥했다. 과분하리만큼의 말을 해 주었다.

    “제 경우가 그렇다는 거지, 당신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런 의미에서 실험을 좀 해 보죠.”

    “네?”

    “괜찮아요. 당신에게는 해가 안 되는 간단한 실험이니까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루스벨라가 경악해서 데니스를 막아 세우려고 했다. 그는 칼을 들고 자기 목을 노리고 있었다.

    “걱정 마요, 루스벨라. 난 다쳐도 괜찮아요.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바로 의사가 오도록 조치했고, 당신도 곁에 있으니까요.”

    “하지 마요!”

    ‘진짜 찌르려는 거야!’

    데니스의 목에 칼날이 닿았다. 피부가 긁혀 피가 나기 시작했다. 루스벨라는 경악해서 제발 그러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당신의 빠른 각성을 위해서입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그게 각성의 조건이라서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이건 아니야!’

    그녀 때문에 다치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힘을 얻으려는 까닭도 결국, 현재 자신과 가장 깊숙이 얽혀있는 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그런 것인데.

    “이런 식으로 하고 싶지는 않아요…… 제발, 제발 그만둬요.”

    설마 본인이 자해까지 하며 훈련에 진심일 줄은 몰랐다.

    이래서 그가 가르치기를 꺼렸던 것일까. 루스벨라의 동공이 불안하게 떨렸다.

    “죽지 않으니 걱정 놓으세요.”

    자해를 하고 있는 사람치고는 해맑은 미소였다. 루스벨라는 이제 두려움을 넘어 분노가 치밀었다.

    “미쳤어요?! 안 죽더라도 다치잖아요! 생살을 찢는 아픔이 별 거 아닐 리가 없잖아!”

    “이렇게 해서 결과가 좋으면 저는 만족해요.”

    “그만두라고요! 데니스 데벤테르!”

    “싫어요.”

    “당신 진짜 왜 이래요?”

    “제가 잘못하는 거 알아요. 미안해요. 끝나고 벌 받을게요.”

    “야!”

    칼날이 파고들기 직전이었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붉은 기운까지 더해진 검은 흉흉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루스벨라는 품위를 내던지고 기어이 데니스를 향해 절박한 소리까지 질렀다.

    ‘막을 수 없어.’

    그를 향해 뛰어들면서도 알았다. 루스벨라는 느렸다. 그에게 달려가는 것보다, 칼이 더 거리가 좁고 다가가는 속도가 빨랐다.

    ‘안 돼. 안 된다고.’

    칼날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었다. 피가, 붉고 진득한 피가 목에서 분수처럼 쏟아진다면, 그것을 그녀가 맞는다면 느낄 죄책감과 절망감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따위 짓 좀 하지 말라고, 데니스!”

    그는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목숨을 바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칼이 직격하는 순간, 다른 잡념은 들지 않았다.

    ‘저 사람을 살려야만 한다.’

    털끝 하나라도 손상되지 않고 지켜내고 싶다는 마음이 전신을 불태웠다. 푸른 불꽃이 심장에서부터 시작되어 혈관 전체를 뒤덮는 감각이 그녀를 뒤덮었다.

    쨍그랑. 검이 저 멀리로 튕겨져 땅에 박혔다. 데니스는 루스벨라에게 멱살이 잡혀 있었다.

    “이런 짓…… 하지 말라고요. 상의도 없이, 사람 겁나게 하면, 재미있어요? 네?”

    “대단해요, 루스벨라.”

    “뭐가 대단하다는 거…….”

    “성공했어요, 당신.”

    “……뭐라고요?”

    “정신 차리고 본인의 몸을 내려다봐요.”

    루스벨라가 천천히 얄미운 데니스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려뜨려 자신의 몸을 쳐다봤다.

    ‘어……?’

    손, 발, 몸통 곳곳이 푸른 기운으로 덮여 있었다. 더욱이 놀라운 점은, 그녀가 맨손으로 데니스의 검을 쳐냈다는 점에 있었다.

    “상처가…….”

    “없죠?”

    “조용히 해요.”

    “네.”

    어떻게 해낸 것인지는 몰랐다. 당장 데니스의 행동을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리고 몸을 움직였는데.

    ‘어떻게 가능했던 거지?’

    푸른 불꽃은 사라지지 않고 루스벨라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꼭 산 채로 태워지는 제물 같기도 했고, 죽어서 떠도는 원혼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따뜻해.’

    푸른 불꽃은 그녀를 불태우려는 작열감을 주지 않았다. 도리어 따뜻하게 몸을 감싸 주는 안락함을 주었다.

    “이게…… 이게 지금 각성한 건가요?”

    “네. 다행히 성공했네요.”

    데니스가 곱게 눈을 접어가며 진심으로 기쁜 미소를 지었다. 루스벨라는 그걸 보자 울화가 치밀었다.

    “웃어요? 웃음이 나요? 진짜 위험했다고요!”

    “압니다. 하지만 결과가 좋으니…….”

    “결과가 좋고 나발이고. 이리 와요.”

    “네?”

    퍼억.

    루스벨라가 데니스에게 주먹을 한 방 날렸다.

    그것도, 명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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