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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54화 (55/166)
  • 54화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푸른 기가 도는 보석. 마력석도 아닌데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는 그 보석이 인간에게 있고, 그 인간이 고통을 받아야 완성된다니 이상한 이야기였다.

    태연하고 차분하게, 알렉은 장로에게 정보를 캐기로 했다.

    “고통이라고 하니까 가늠이 잘 안 되는데요?”

    “그렇겠지. 우리도 아벨 님이 알려 주신 대로 일정 조건 이상을 넘기면 된다는 것으로만 알고 있으니.”

    “그 말은…….”

    “될 때까지 보석을 품고 있는 자에게 해악을 가한다는 거지. 목숨이 위태롭지는 않은 선에서 말이야.”

    우리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접근하면서.

    ‘이 새끼들은 정말 미친 또라이들밖에 없어!’

    알렉은 오로지 보석을 얻기 위해 추악한 짓을 저지른다는 장로의 말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끔찍했다.

    그래도 속으로 구역질을 겨우 삼키며 웃어야 했다. 동조해야 했다.

    “하하. 그럼 장로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이 그건가요? 그 상대에게 더 큰 시련을 주어야 하는 거?”

    “그렇지. 아벨 님이 몸이 달아 직접 내려오시기까지 했는데. 반드시 성공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우린 다 그분에게 축복을 빼앗기고 얼마 후에 죽겠지.”

    “…….”

    알렉은 제발 장로가 실패하기를 바랐다. 보석을 품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덴이라는 범죄 집단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만을 빌었다.

    ‘하. 어차피 여기에서 믿는 신은 그 아벨이라는 괴물 같던데.’

    누구에게 기도를 빌어야 하는 거야?

    신을 믿지도 않지만, 막막할 때는 신의 그늘을 찾게 되었다. 알렉은 그의 위태위태한 첩자 노릇이 얼마나 갈지 몰라 걱정이었다.

    “흠. 그나저나 자네는 유난히 보석에 흥미를 가지고 있군 그래?”

    “예? 아…… 아벨 님을 모시면서 그런 굉장한 힘을 가진 보석이라니 정말 신기해서요. 밖에 있을 적에도 보석에 관심이 큰 편이어서 더 그렇네요.”

    호의적으로 꼬박꼬박 질문에 답변해 주던 장로가 떠보는 듯한 물음을 던지니 당황스러웠다. 알렉은 어영부영 의심을 피하기 위한 답을 내놨다. 사람 좋은 미소만 짓던 장로는 멀끔한 젊은 사람의 얼굴로 알렉에게 경고했다.

    “혹시나 해서 말이지. 에덴의 일을 바깥으로 물고 가려는 이리 떼가 있을 수 있거든.”

    “이리떼요?”

    비유적인 표현인 걸 모를 수가. 그럼에도 알렉은 순진한 척 되물었다.

    “에덴의 존재에 대한 냄새를 맡고 오는 작자들이 있었거든. 참으로 귀찮았지. 오는 족족 다 아벨 님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렇다면 그 어마어마한 해골 무덤에 묻혀 있을까.’

    “그렇군요.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알렉은 적당히 장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럼. 우리들의 성소에 들일 수 있는 인간은 한정적이어야지. 우린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선택받은 인간 좋아하시네.’

    선민사상에 찌들어 있는 에덴은 숨이 막혔다. 알렉은 괴로웠다. 어서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자네가 아벨 님께도, 에덴에도 적응을 잘해서 말이야. 심심함을 달래 줄 겸 특별 임무를 주려 하네.”

    “……예?”

    “자네가 아벨 님이 원하는 보석의 각성 기준을 맞춰 보게.”

    “가, 각성 기준을요?”

    당황스러운 난제가 떨어졌다. 보석을 품고 있을 인간에게 고통을 줘야 각성을 한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하란 말이야? 무슨 짓까지 해야 하는 거고?’

    이런 고민 이전에 절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거부할 수가 없었다.

    “왜, 싫은가?”

    “아, 아닙니다. 은총의 길에 가까워지는 방도인데 제가 싫을 리가요.”

    ‘설마 눈치챘나?’

    장로가 알렉의 첩자 노릇을 의심하게 된 거라면 큰일이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는다. 빼곡한 유골이 가득한 음습한 지하 동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가 맡아야 할 제물이 무엇인가요?”

    ‘젠장, 젠장!’

    누군가를 괴롭혀야 하는 일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사이코 같은 새끼들이나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이건 피할 수가 없어.’

    장로가 눈치를 챘든 안 챘든, 이걸 피한다면 알렉의 안위는 장담할 수 없었다.

    에덴이 보석을 갈취하려는 상대가 죽든가, 아님 알렉이 죽든가의 기로에 서 있었다.

    장로가 만족스럽게 입가를 끌어당겼다. 단정한 20대의 청년의 모습이었지만, 그 너머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에덴에 바친 늙은 광신도가 얼핏 보이는 환상조차 일었다.

    “제물이라, 단어 선택이 마음에 드는군. 그래. 자네가 맡아야 할 인물이 누군지 알려 주겠네.”

    장로의 웃음소리가 어떤 마귀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울며 겨자 먹기로 다가선 알렉에게 장로는 조그마한 쪽지를 보여 주었다.

    ‘……어?’

    그 종이에는 믿을 수 없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 사람에게…… 제가 접근해야 한다고요?”

    알렉이 경악하며 파랗게 질린 안색을 드러냈다. 알렉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장로는 뺨만 조금 긁적였다.

    “난감한 걸 나도 알지. 후우. 원래는 이렇게 접근하기 힘든 사람이 아니었는데, 최근 들어 힘들어졌어.”

    ‘아니…… 이 사람은…… 이건……!’

    할 수 없다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를 악물고 간신히 진정했다.

    루스벨라 지펠론.

    지금은 루스벨라 데벤테르.

    후작 부인.

    ‘고용주의 부인!’

    알렉의 손이 발작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떨렸다. 장로는 그를 이해한다며 주절거렸다.

    “하필이면 데벤테르 후작 가라니.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지. 윈체스터 공작에게 파혼당했을 때 처리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숙성이 되지 않아서…… ”

    일이 꼬여도 더럽게 꼬였다며 장로가 기분 나쁜 내색을 표했다. 항상 온화하게 웃던 것과 다르게, 은총과 관련하여 일이 틀어지면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건…… 제게 맡겨지기엔 너무나 중책 같습니다.”

    ‘이건 불가능하지!’

    알렉은 도망치고 싶어졌다. 데벤테르 후작 가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는 일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후작 가의 부로 안 되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웬만한 헛짓거리는 기사단과 고용한 용병들에 의해 무산되었다.

    “크흠. 나도 모르진 않네. 자네에게 아주 큰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럼 왜…….”

    “우리가 파고들 틈을 만들어 달라, 이거네. 에덴이 물심양면으로 과감하게 움직이고는 있지만, 영 쉽지가 않아서.”

    “…….”

    “데벤테르 후작 가가 건방지게도 신전에 헌금을 내는 일을 끊었지만, 사제가 내려가 축복을 걸어 주는 일을 거절할 사람은 없겠지.”

    “……제가 그 신관으로서 가면 되는 겁니까?”

    “물론이지. 가서, 후작 부부의 사이를 벌려 놓을 방안을 마련해 보면 좋겠어.”

    장로는 껄껄 웃으며 태연하게 남의 집 가정을 파탄 내란 소리를 하고 있었다.

    사이를 벌려 놓으라고?

    ‘고통이니 시련 운운했던 걸 보면 후작 부인에게…… 이혼당할 귀책사유라도 만들라는 소리잖아.’

    이미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혼 당한 전적이 있는 사람에게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알렉은 후작 부인의 파혼이 어쩌면 이 인간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품게 되었다.

    “작은 분탕질, 그거면 되네. 알겠나?”

    “……네.”

    명령에 수긍하는 말을 내뱉기가 너무 힘들었다. 머릿속이 물감을 다 섞어 버린 것처럼 혼탁해졌다.

    ‘이걸 어쩌란 말이야?’

    난감했다. 결국 알렉이 붙잡을 수 있는 끈은 고용주인 데니스밖에 없었다.

    ***

    루스벨라가 무복을 갖춰 입고 연무장에 들어섰다. 드넓은 연무장 안에는 데니스만 있었다.

    “왔어요?”

    데니스는 검을 휘두르다가 루스벨라의 기척을 느끼고 바로 검집에 넣었다.

    ‘붉은 기운.’

    신성력을 검에 실어 검술을 연습하고 있었으리라. 루스벨라에게 신성력을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어 하지 않았으면서.

    ‘왜 이것만 꺼리는 기색을 보였을까.’

    루스벨라는 데니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치유력이 신성력임을 알았으니, 차후 다시 습격을 받을 시를 대비해 그녀도 전투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좋을 터였다.

    효율성과 합리성을 따졌을 때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데니스는 나를 전투에서 배제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

    루스벨라는 그것이 의아했다. 아무리 예언을 통해 그녀를 구하라는 신의 말씀이 있었다지만, 닭이 막 낳은 달걀을 품듯이 그녀를 싸고돌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데니스의 의중은 무엇일까. 루스벨라는 그와 함께 있어도, 다가가는 것 같아도 멀리 있다고 느껴졌다.

    그건 외로운 감각이었다.

    “기초 훈련부터 시작하는 건가요?”

    “그건 다음날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지금은…….”

    데니스가 다시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검에 붉은 기운이 불을 뿜는 것처럼 올라오기 시작했다.

    “신성력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먼저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어색했던 분위기가 없었던 것처럼 데니스는 진중한 태도로 수업에 임하고 있었다. 루스벨라도 그의 말에 집중하고, 다른 모든 것은 잊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반드시 배워야 하는 기술이었으니까.

    “언뜻 오러로 보이지만, 이건 신성력을 검에 입혀 강화시킨 형태입니다.”

    그러더니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붉은 기운이 검격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폭발하듯이 쇄도했다.

    쐐애액― 펑.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 휘둘렀지만 그 힘은 대단했다. 적이 있다고 가정했다면 심한 관통상을 입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굉장한 위력이네요.”

    “이 경우는 한 곳에 집중하여 쏜 경우고, 여러 갈래로 분산시켜 적을 제압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지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루스벨라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만약 그녀도 이 기술을 배울 수 있다면, 혼자서도 다닐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이건 제 경우에 맞춰 단련한 방법이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무리일 거예요.”

    “방법이 아예 없나요?”

    “기초 훈련을 받는다고 해도, 당신은 전혀 검을 잡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어렵습니다. 당신에게 맞는 수행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하니까요.”

    데니스가 검을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붉은 기운 자체만을 이용해 검을 만들었다.

    “저의 경우는 검이 맞았고, 설령 검이 없더라도 이런 식으로 적과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루스벨라는 붉은빛으로 만들어진 검을 보고 조급함이 일었다. 동시에 걱정이 되었다.

    ‘내게 맞는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루스벨라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데니스가 말했다.

    “기본적인 힘을 끌어내는 연습은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주어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앞으로 찾아내야 하는 건 힘을 어떤 방식으로 쓰는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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