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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53화 (54/166)

53화

“물론 도와 드려야죠.”

데니스가 선선히 웃었다. 울 것 같았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정말인가요?”

“네. 언젠가는 가르쳐 드려야 하는 거였고…… 시기가 앞당겨졌으니 더 서둘러야겠네요.”

언제나처럼 따뜻한 호의였다. 이상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기초적인 것부터 하려면, 체력부터 길러야 하겠네요.”

“음, 지금 당장은 어려울까요?”

“……맛보기만 하는 거라면 가능해요.”

그렇게 말하는 데니스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 것 같았다. 루스벨라는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데니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몸을 돌렸다.

“연무장을 열어 둘 테니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들어가 봐요. 저도 금방 갈게요.”

“……알았어요.”

루스벨라는 뻗었던 손을 도로 가져왔다. 데니스에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감이 그녀를 지배했다. 찰나에 보았던 서글픈 낯빛은 씻어 내기 힘들었다.

‘혼자 있게 해 달라는 표정이었어.’

항시 다정하던 사람이, 웃는 모습만 보여 주려던 사람이 보인 틈의 깊이는 무거웠다. 그게 설령 아무리 작은 단서라 해도 가볍게 넘어갈 수 없었다.

“데니스.”

“왜요, 루스벨라?”

다시 웃는 얼굴.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

“내가 직접 나서는 게 꺼려지나요?”

“…….”

데니스가 문고리에 손을 올리고 멈칫했다. 루스벨라는 불안했다. 그의 머뭇거림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연회장에서 당신은 나를 뒤로 물러서게 만들고 당신 혼자 일을 전부 처리하려 들었어요.”

그게 걸렸다. 처음에는 데니스의 친절함에서 빚어진 과보호라고 생각했다. 보호받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날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주려는 사람은 이 사람이 유일했으니까.’

대가 없는 헌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귀한 애정이 떨어지니 안락했다. 의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헌신에 의존하기만 해서는 성장할 수 없다.

“당신을 따돌리려는 게 아니에요.”

“알아요. 내가 아무것도 모르길 바라는 건 아닌 것 같았어요. 그랬다면 신전이 날 죽일 거라는 예언을 받은 사실도 말하지 않았겠죠.”

오로지 당신만 알고 처리하고 싶었을 거예요.

“난 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내게 이유 없이 베푸는 친절만큼 당신을 믿고 있어요.”

다만.

“내가 다치는 게 싫은가요?”

데니스가 땅 위에 우뚝 박힌 말뚝처럼 뻣뻣해졌다. 루스벨라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고, 안도했다.

그가 속마음의 틈새를 벌려 줘서 다행이었다.

“그 흰머리 꼬마 아이를 마주친 이후 당신이 더 민감하게 군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금방 사라질 사람처럼 구니까, 나도 덩달아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고요.”

본래대로라면 데니스가 황제를 알현하려 입궁했을 때 루스벨라도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반대했다.

‘당신이 또 다치게 되는 게 무서워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목소리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손의 진동.

루스벨라가 크게 다치지 않았음에도 데니스는 그녀가 중상을 입은 것처럼 분노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죽음을 알린 예언을 막기 위한 힘도 가지고 있으면서, 데벤테르 후작 가의 넘치는 부도 가진 사람이면서.

그는 막지 못할 미래를 겁내는 사람처럼 다음을 의심하고 있었다.

“대답해 줘요. 내가 다치는 게 싫어서 불안한 모습이 튀어나오는 건가요?”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을 감돌았다. 그리 오래는 아니었다.

“……네. 맞아요. 사실 저는 당신이 신성력을 운용할 방법을 배울 날이 없기를 바랐어요.”

데니스의 손이 꽉 말아 쥐어졌다.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누구에게? 그 자신에게.

“제가 더 주의하고 신경 써야 했는데, 늦어서…… 그래서 당신이 습격당한 거 같아서 화가 나요. 저의 무능에 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무능이라니. 그렇게까지 여기지 않아도 되잖아요.”

루스벨라는 데니스의 과민한 반응이 의아했다. 그는 그녀를 보호할 수 있는 최대치를 이미 해냈다. 혼약을 맺어 후작가라는 든든한 방어막을 쳐 주고, 예언을 알려 주고 그녀를 살리려 하고 있었다.

“아니요. 제가 더 준비를 철저히 해놨어야 합니다. 제 어쭙잖은 욕심 때문에…….”

‘욕심이라니?’

“그게 뭐죠?”

“……아닙니다.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해요. 연무장에서 봐요.”

데니스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평상시의 여유로운 그답지 않게 서두르는 발걸음이 눈에 띄었다.

“그 욕심이 뭐길래.”

그는 그녀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약해진 모습을 보인 것일까.

의문을 해결하고 싶었으나, 당장은 연무장으로 도망친 그를 잡으러 가야 할 듯싶었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한 시녀에게 시중을 맡겼다.

“대련용 무복이 있다면 가져와 줘.”

데니스가 숨기고 있는 게 더 있는 것 같았다. 신성력을 기르는 겸 그의 마음을 알아갈 시간이 절실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어.’

예언으로 엮인 사이. 지금은 그것이 그들을 정의하는 단어였다. 데니스라면 몰라도, 루스벨라는 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이런 사람이 당신을 믿는다고 했다니, 부끄럽네.’

데니스가 루스벨라에게 맹목적으로 굴고 있으니 그녀가 그에게 물러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 죽음의 손길이 다가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고민은 사치일 수도 있지만, 그녀는 그에 대해 알고 싶었다.

‘날 도와주는 사람이니까. 그래서야.’

홀로 속삭이는 다짐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면서.

***

아벨은 심통이 나 있었다. 알렉은 도저히 ‘심통이 났다’라는 귀여운 단어를 괴물과 연관 짓고 싶지 않았으나,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아벨에게는 그만한 표현이 또 없었다.

“왜 숙성이 안 되어 있었지?”

‘숙성은 또 뭐야.’

알렉은 이 숨 막히는 하얀 괴물을 모시는 일이 불편했다. 고용주인 데니스에게 이 일이 언제 끝나는 것이냐 물어도 아직 때가 아니라는 말만 들으니 답답했다.

‘속이 너무 쓰리다.’

나는 여기 왜 데리고 와서 수발을 들게 시키는 걸까. 알렉은 망연히 생각했다. 한 세트로 다니고 싶지 않은 장로도 함께였다.

“이만하면 다 완성된 거 아니었어? 여태까지 발견한 대체품 중에 가장 양질의 것을 가져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부풀린 볼, 발갛게 상기되어 있는 뺨, 공들여 빚은 인형처럼 아름다운 얼굴.

그 모든 것이 무섭게 느껴지는 살기가 장로와 알렉을 감쌌다. 알렉은 딸꾹질을 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장로가 고개를 조아리면서 대답했다.

“저희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벨 님.”

“난 죄송 소리보다 확실한 원인을 알고 싶은데?”

장로는 아벨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던 참이었다. 정갈하게 식탁 위로 올려진 그릇 하나를 아벨이 힘을 써 깨부쉈다. 쨍그랑, 하고 산산조각 나는 접시 소리가 섬뜩했다.

“기존의 보석이 공명하는 것으로 봐서는 이미 기준을 충족했다고 봤는데…… 이상하단 말이지. 정말 몰라?”

“아, 아벨 님도 모르는 것을 천한 저희가 어찌 알겠습니까. 직접 행동하게 만들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장로는 아벨에게 싹싹 빌었다. 알렉은 그것을 적당히 눈치 보는 척 보면서 주워들었다.

‘대체품…… 잘은 모르겠지만 그걸 얻는 데는 실패했나 보네.’

그 점은 다행이었다. 아벨이 잃은 하나의 보석을 제외하더라도 그에게는 여럿 보석이 있었다. 괴물의 힘이 커지는 것을 알렉은 바라지 않았다.

‘저 괴물의 힘이 커지면 여기서 빠져나가는 일도 더 힘들어질지 몰라.’

알렉은 아벨이 대체품을 얻는 데 실패하길 빌었다. 가장 양질의 것이라니. 그렇다면 아벨이 쓰는 푸른 기운의 힘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이니 끔찍했다.

기도의 힘인지, 아벨은 짜증에 차 있었다. 애꿎은 식기와 음식만 박살 내면서.

“이러면 수도까지 내려온 수고와 보람이 없잖아? 기분 좋게 돌아가고 싶었는데.”

쨍그랑. 쨍그랑. 시원한 사과청 음료를 담아 놓은 잔과 고소한 수프가 담긴 그릇이 깨졌다. 아벨은 정말이지 까다롭고 사나운 폭군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장로는 음식물이 튀는 데도 꼼짝하지 않았다. 알렉은 당연히 피했지만.

“어떻게 할 거야? 응? 장로. 내가 여기까지 온 고생을 어떻게 해야 깔끔하게 씻어 낼 수 있을까?”

아벨이 검붉은색 눈동자를 치켜떴다. 장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맹수를 눈앞에 둔 것처럼 몸이 벌벌 떨렸다.

“저, 저를 포함한 에덴의 무리들이 완성된 대체품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확실하게 일처리 할 거지? 황제랑 접촉한 것처럼, 날 만족시켜 주지 않는다면 네게서 축복을 거둘지 몰라.”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장로의 옆에서 알렉도 건성인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허리를 굽혔다.

‘완성된 대체품을 얻는 조건이 뭘까?’

라는 생각이나 하면서. 데니스에게도 짬이 나면 보고할 마음만 꽉 차 있었다.

“잘해. 내 힘을 허투루 쓰는 일은 정말 질색이니까.”

아벨의 경고에 마지막까지 장로는 굽신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알렉은 장로를 따라가며 그의 기운 없는 넋두리를 들었다.

“후. 이래서야 원…… 걱정이군.”

“무슨 일이길래 그러십니까?”

“흠. 자네에게도 공유해도 되는 일인지는 모르겠군.”

장로는 거리낌 없이 젊음의 축복을 찬양에 가득 찬 눈으로 말할 때와는 반대로 선을 긋는 태도를 취했다. 알렉은 그의 행동에서 정보를 캐낼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어차피 제가 현재 아벨 님을 모시는 수습 사제이잖습니까. 장로님께서도 저희 집안이 신전에 봉사한 세월을 모르시지는 않고요.”

“흐음…….”

“에덴에 들어온 이상 뼈를 묻을 각오를 하였으니 저에게도 신성한 임무가 무엇인지 들을 기회가…… 주어지면 안 되는 것일까요?”

반드시 살아남고 싶은 생존형 혀는 기름칠을 바른 것처럼 술술 아부성 짙은 말을 내뱉었다. 장로도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하긴, 몇 대나 신전에 자기 핏줄을 보내는 집안이 얼마나 되겠어.’

에덴은 보안에 무척 주의했다. 알렉의 집안은 아들을 에덴에 보내는 것에 동의한 정도로 신앙심이, 충성심이 깊은 혈통의 가문이었다.

‘이 젊은이라면 도망칠 허튼 생각은 않겠지.’

장로는 알렉이 첩자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의 가문에서 신전의 숨겨진 심층부에 들어갈 영광을 얻기 위해 아들의 한량 같은 모습을 숨긴 덕분이었다.

“아벨 님이 원하시는 대체품의 숙성이 완료되지 않았다네. 거참. 이쯤이면 될 줄 알았는데, 최근 호강을 한 탓인지 일이 꼬였어.”

“호강…… 이라뇨?”

보석이 호강을 한다니. 괴이쩍은 표현이었다. 알렉은 장로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을 한 것인지 몰라 갸우뚱했다.

“아벨 님이 찾으시는 대체품은 인간에게 있다네.”

“그렇다면 그 사람을 찾아가서 가져오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알렉의 상상은 기껏해야 어느 비밀스런 동굴에나 있을 광산에서 푸른 보석을 채취하는 것이었다. 극단적으로 상상의 부피를 키우면, 사람을 죽이는 저주 따위를 통해 만드는 물건인가 싶었다.

‘아니, 애초에 숙성한다는 게 무슨 말인데?’

보석을 숙성시킨다는 말도 이상했다. 컷팅을 한다는 말인 걸까?

“인간에게 있다는 말은 그 인간의 체내에 있다는 말이거든.”

“예?”

“그 인간 안의 보석이 힘을 가지게 될 만큼 소유주가 고통받아야 가능한 일이라, 이 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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