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나는…….”
“그쯤에서 그만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후작님?”
당혹스러운 질문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아슬란의 어깨 위로 손이 하나 턱 얹혔다.
“다니엘?”
“그래. 이 헛똑똑이 북부 강철아. 그냥 깡통이라고 해라. 깡통.”
아슬란의 친우인 다니엘 크렌베르 백작 영식이 와 있었다.
그는 건국 기념일 연회가 끝난 이후에도 수도를 떠나지 않다가, 윈체스터 공작과 데벤테르 후작을 동시에 입궐하라 했다는 소식을 주워듣고 달려왔다.
“네가 여기엔 어떻게 있는 거지?”
“뭐긴, 네가 여기에 불려와 있다는 거 듣고 궁금해서 와 봤지.”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
남들 가십에는 언제나 귀가 열려 있는 심심한 크렌베르 영식께서는 돌덩이 같은 친구의 돌발적인 행동이 아주 기꺼웠다.
“재밌을 것 같아서 온 거라면, 저리 가라.”
“알면 더 놔두지? 다른 사람에게 쩔쩔매고 있는 아슬란이라니 얼마나 희귀한 광경이야.”
다니엘이 경박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님에도 끼어든 것은 눈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크렌베르 영식, 대화 중에 끼어들다니 무례하시군요.”
데니스가 다니엘의 태도를 지적했지만 그는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 실례합니다. 후작님. 제가 어디든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한량인지라. 불쾌함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그걸 믿지는 않았다. 언뜻 자신을 깎아내려 예의를 차리는 성싶어도 속뜻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데벤테르 후작님이 제 친구이신 윈체스터 공작님께 보이던 호승심보다는 제가 더 낫지 않겠어요?”
“저와 우위를 겨뤄 보기라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뇨.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다니엘이 특유의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데니스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세상만사를 장난감을 바라보는 듯 하는 이 남자가 싫었다.
“서로 이야기를 더 나눠 봤자 좋은 일은 없겠군요.”
데니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가 버렸다. 아슬란은 데니스를 붙잡으려다 다니엘에게 저지당했다.
다니엘은 아슬란을 끌어다가 황궁의 휴게실로 데려갔다. 주위의 사람을 물리고서 다니엘은 아슬란의 멱살을 잡았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저걸 왜 잡으려고 해?”
아슬란으로서는 오랜만에 보는 친우의 걱정 어린 진중한 낯이었다.
“하지만 잘못한 것은 나고, 그녀에게 사과를 해야…….”
아슬란이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했다. 테라스에서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말이 귀에 꽂혀서, 달아나질 않았다.
‘뭐라고 생각했을까.’
파혼을 요청했던 전 약혼자가 결혼까지 한 이제 와서 얼쩡거리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이상하게 보였을까.
아슬란은 암컷을 차지하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무리에서 쫓겨난 늑대처럼 보였다.
‘패배한 졸병처럼 주눅이 들어 있기는.’
그를 보며 다니엘이 쯧쯧 혀를 찼다.
“그만하지? 아슬란 윈체스터? 너, 내가 정말로 할 일 없어서 여기 와 있다고 생각해?”
“아닌가?”
“하…… 네 어머니, 선대 윈체스터 공작 부인께서 내게 너 좀 지켜봐 달라고 당부하신 거야. 너한테 친구라는 놈이 나 외에 또 누가 있겠어?”
어머니. 선대 공작 부인이신 아슬란의 어머니.
아슬란은 얼음을 띄우고 소금까지 탄 찬물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은 듯한 차가움을 맛봤다.
“……어머니께서.”
“그래. 그러니까 공작님, 이제 추한 꼴 그만 보이시고 집으로, 북부로 돌아갑시다. 응?”
다니엘은 생각보다도 더 정신을 못 차리는 아슬란을 보며 그 나름대로 경악하고 있었다.
‘재미를 보고 싶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무너질 줄은 몰랐다고.’
강철처럼 어디에서나 무심하던 아슬란이 길 잃은 강아지처럼 헤매는 꼴을 보는 건 유쾌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무심한 태도로 손을 치워내길 바랐는데.
“……이렇게 가 버릴 수는 없어.”
“아, 진짜. 너 정말 이럴 거야? 네가 구질구질하게 구는 걸 네 어머니께서 바랄 거라고 생각해?”
“아니시겠지.”
“알면서 왜 그래? 너, 지금까지 잘했잖아. 저쪽도 굳이 너에 대해서 말 흘리는 거 없는 거 보면 걱정할 게 뭐가 있어.”
그냥 묻어!
아슬란은 다니엘의 말에 윈블 자작의 말을 떠올렸다.
‘이미 다 끝난 일이잖습니까.’
“끝난 일 아니야.”
고집스러운 친구의 말에 다니엘이 가슴을 쳤다.
“뭐가 아니야. 북부에 소문 쫙 퍼졌는데. 후작 부인이 너 안 보고 싶다며. 그런데도 네가 지금 매달리는 이 상황이, 너한테 좋을 것 같아?”
“…….”
“대답해. 아슬란 윈체스터. 네 대답 여하에 따라 널 네가 북부로 끌고 가야 할지 말지를 정해야 하니까.”
“네가, 나를?”
“그래. 이 자식아!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겠다.”
다니엘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팔자에도 맞지 않는 보모 노릇을 하려니 골이 당겼다.
‘선대 공작 부인께서 내게 당부할 때는 설마 싶었는데.’
다니엘은 친우의 어머니의 혜안에 감탄을 표했다. 소문이야 지나가는 바람이고, 아슬란은 북부를 지키는 일밖에 모르는 멍청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 아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려거든, 막아 다오.’
‘제가요? 그 녀석을 걱정할 게 뭐가 있다고…….’
‘나도 내 걱정이 쓸데없기를 바라지만.’
아슬란이 무언가에 진심이었던 얼굴을 보인 적이 드물었던 만큼, 걱정해서 나쁠 것이 없으니까.
‘선대 공작 부인께서 옳으셨어.’
올곧기만 하던 착한 아슬란이 변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웃었다. 아슬란을 여전히 속속들이 꿰고 있는 선대 공작 부인이 대단해서.
“이미 윈블 영애와 연회장에서 말썽을 일으킨 자들의 추문으로 북부에 대한 평이 좋지 않아. 네가 이럴 때일수록 체면을 세워야지.”
“알아.”
“알면 똑바로 해. 멍청한 감정놀음에 휘둘리지 말고. 알았어?”
너라면 그런 여자 따위는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잖아.
“다니엘.”
“내 말 안 끝났어. 후작 부인만, 그 여자만 아니면 돼. 다 끝난 사이에 누가 봐도 책잡힐 미련 갖지 마.”
“다니엘.”
“끊지 말라니까? 그게 설혹 네 진심이라고 해도, 뒤늦게 심지에 불이 붙은 거라도 해도 지워. 삼켜 버려. 남기지 마.”
“…….”
아슬란은 이번에는 다니엘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다.
“아슬란 윈체스터. 너는 나와 달라. 네 추문은 멈출 수가 없는 화마야. 불이 지펴지기 전에, 멈춰.”
“불이…… 이미 붙었다면.”
“뭐?”
“그래서 삼킬 수가 없게 되었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아슬란이 싸늘한 겨울바람 같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건조한 겨울은 산불이 일어나기 가장 쉬운 계절이었다. 봄을 빼면 상시 추운 곳이나 마찬가지인 북부에 와서, 그래서…… 불이 지펴진 것일지도 몰랐다.
***
“마님,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아. 걱정할 것 없으니 물러가 있으렴.”
“하지만 주인님께서…… 철통같이 지키라고 명하셨는걸요.”
“그에게는 내가 말을 해 놓을 테니, 염려 놓아도 된다. 지금은 혼자 있는 게 제일 좋은 치료책 같구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내세울 건 없지만, 치유사로서 내 한 몸 못 챙기겠니.”
데니스의 명을 받아 루스벨라를 간호하기 위해 모여든 시녀들은 결국 울상을 지으며 물러났다.
‘시녀들이 물러났어도 기사들이 문 밖에 대기하고 있지만.’
그야말로 철통 경비였다. 데니스는 아벨의 습격 이후로 굉장히 루스벨라의 경호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난 당신을 잃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데니스는 지푸라기로 만들어진 집 같았다. 사나운 늑대가 한 번 바람을 넣으면 날아가 버릴 것처럼 애처로웠다.
‘절대 혼자 있지 말아요. 잠깐만…… 아주 잠깐만.’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던 것을 기억한다. 붉은 눈, 유독 튀는 그 눈에서 눈물이 아롱졌을 때 루스벨라는 백기를 들었다.
‘그렇지만 너무 답답했는걸.’
간호에 열을 올리는 시녀들을 보니 없던 체기도 일어날 것 같았다. 그녀의 몸은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그 사람 같지 않던 흰 꼬마를 봐서 마음이 놀란 거지, 몸의 부상 문제는 아니니까.’
그래서 선대 후작의 치료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하던 일은 마저 해야 했으니까.
다만 루스벨라가 걸리는 것은 그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데니스와 나눈 이혼 서류가 무색하게도 루스벨라는 살아남을 궁리부터 해야 했다. 신전이 그녀를 죽일 거라는 예언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번은 없을지도 몰라.’
검붉은 눈, 흰 머리카락, 인간 같지 않던 힘을 발휘하던 악마가 잊히지 않았다.
힘을 길러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루스벨라에게는 쥐꼬리만 한 치유력밖에 없었다. 데니스가 이것을 두고 ‘진정한 신성력’이라 말하긴 했지만, 그 악마 같던 아이와 같은 궤라고는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남을 치료하는 데만 이용했던 힘인데.”
다른 누군가를 도울 수만 있는 힘이라 알고 있었던 치유력이 살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건 상상이 안 되었다.
‘데니스에게 물어보자.’
그래서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에게도 신성력이 있다고 했으니까.
데니스에게 자신의 신성력을 개발하고 공격용으로 힘을 운용할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할 결심을 세운 그녀였다.
“루스벨라, 저 왔어요.”
“왔어요? 데니스?”
“반갑게 맞아 주시니 감사하네요.”
“……무슨 일 있었어요? 얼굴이 왜 이렇게…….”
“이런. 기분 나쁘다고 티가 났나요?”
“조금요.”
데니스는 붓으로 그려 놓은 것 같이 온화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루스벨라는 그가 미처 감추지 못한 미묘한 분노를 잡아냈다.
“윈체스터 공작과 같이 폐하를 알현해서 그런 건가요?”
“음, 거기까지는 예상 범위 내였고 오히려 제가 성질을 긁었는데……. 공작의 친우인 크렌베르 영식이 끼어들어서.”
데니스는 루스벨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부 말했다. 일러바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루스벨라에게 절대 진심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차라리 밉상스런 크렌베르 영식이 끼어든 건 다행일지도 몰랐다. 아슬란의 뒤늦은 진심 따위는 역겨워서 황궁에 있다는 것을 잊고 욕을 했을지도 모르니까.
“아슬란과 아예 마주치지 못할 수는 없겠죠. 그와 관련된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하물며 윈블 영애의 사건이 터진 후로는 더 그랬다. 보상을 명목으로 하더라도 그들이 엮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루스벨라가 표면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할게요.”
“물론 그래야겠죠. 하지만…… 이 이상으로 얽히게 되는 일이 있다면 그때는 제가 확실히 그를 거부하는 의사를 표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루스벨라가 한숨을 쉬었다. 데니스로서도 마찬가지였다. 더는 아슬란이 그들을 귀찮게 하지 말기를 기도할 뿐.
“그나저나 데니스. 할 말이 있어요.”
“무슨 부탁인가요?”
“신성력의 운용을 도와줘요. 당신은 알고 있죠?”
루스벨라의 말에 데니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울 것처럼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