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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51화 (52/166)
  • 51화

    카일과 레베카는 첫째인 루스벨라의 고통을 방관하던 아이들이었다.

    ‘누이는 너무 인생을 복잡하게 살아.’

    ‘아버지의 비위만 그럭저럭 맞추면 살기가 편해지는데.’

    지펠론 백작의 성질머리는 세 남매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직 루스벨라만이 아이들 중에서 가장 고통받으며 자랐다. 첫째라는 이유로 주어지는 중압감, 그리고 보기 드문 치유사로서의 재능은 지펠론 백작의 탐욕에 불을 붙였다.

    불행히도 미약한 능력인지라 조금 더 좋은 조건의 결혼 시장 매물로밖에 팔지 못했지만. 기대하던 것이라도 있었는지 백작은 자신의 기대치 이하인 딸에게 가혹하게 굴었다.

    그 불똥이 튀지 않도록 쌍둥이 동생들은 필사적으로 아비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다. 이란성 쌍둥이 남매의 경우 한 명은 아들에, 백작을 고스란히 닮았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래서 그들은 루스벨라의 빈자리가 아쉬웠다.

    “누이만 행복해지면 안 되잖아.”

    “우리도 이 답답한 백작가에서 나가고 싶어.”

    아이들은 지펠론 백작이 헛된 기대를 품으며 후작저를 찾아가려는 행동에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벨라는 필시 내 위로가 필요할 거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아버지를 말리지 않는 게 아이들에게는 이득이었다.

    ‘누이를 찾아가면 우리도 여기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몰라.’

    쌍둥이들 역시도 루스벨라에게 매달릴 생각이었다.

    그 모습을 데니스가 붙여 놓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

    “어서 오게, 데벤테르 후작.”

    “강녕하셨습니까, 폐하.”

    데니스가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 독대는 아니었다. 옆에는 윈체스터 공작인 아슬란이 함께 서 있었다.

    ‘고약한 노인네.’

    데니스는 웃음을 유지하며 이를 갈았다. 신전 측과 접촉했다는 사실부터가 짜증스러웠는데, 하는 짓도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그대들을 이리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의 흉측한 사건 때문이라네.”

    황제는 데니스와 아슬란을 불러 아슈라 윈블 영애의 사건을 적당히 묻어가고자 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려나.’

    “이미 가해자인 윈블 영애는 죽었으니 후작 부인에게 용서를 빌기도 어려워졌지.”

    “하오시면?”

    “듣기로는 윈블 자작의 맘고생이 무척 크다더군. 멀쩡하던 딸을 그렇게 허무하게 보냈으니 말이야.”

    “……저희 부부도 그 사안이 무척이나 의심스럽습니다만. 갑자기 멀쩡하던 영애가 자살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것도 황궁의 지하 감옥에서…….”

    데니스가 가장 신경 쓰이던 부분을 끄집어냈다.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묻어가려는 의도를 모르지는 않았을 터. 그럼에도 삽으로 꾸역꾸역 파내는 것이 아주 거슬렸다.

    “지금 그대는 황실의 처사를 의심하고 있는 겐가?”

    ‘후작가가 돈이 많다고 해서 방만하게 굴려는 걸 지금 밟아놔야 한다.’

    황제는 에덴의 장로와 만났던 것을 기억하며 진정했다. 그 장로는 자신들과 손을 잡아 후작가를 멸문시킬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짐이 왜 그런 수고를 들여야 하지?]

    [폐하께서는 데벤테르 후작가의 세력이 느는 것을 경계하시고 그 부를 국고로 환수하고 싶어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하. 그런 욕망은 선대도, 선선대도 가지고 있던 것 아니냐. 네가 뭘 안다고 내게 겁도 없이 제안을 하는 거지?]

    심지어 이번 대의 새로운 후작인 데니스는 어릴 때와 달리 무력이 출중하여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었다. 또한 황태자와의 인연도 있어 제거하기 힘들었다.

    ‘사고사로 위장하기도 힘들거늘.’

    [저희에겐 그를 죽일 확실한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는 후작을 배척할 구실을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내가 손해 볼 것은 없지.’

    장로는 약속했다. 후작가를 지워낼 수만 있다면 후작가 소유의 재산은 모두 황제가 가져가도 괜찮다고.

    [그럼 너희들은 무엇을 원하지?]

    [저희는 딱 한 사람만 데려가면 됩니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말이 찜찜했지만 사람 하나를 대가로 후작가를 털어 낼 수 있다면 나쁜 장사는 아니었다.

    그래서 황제는 일부러 데니스의 심사를 거슬리게 하여 폭발하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다.

    ‘못 참고 건방지게 구는 때가 되면 그것을 빌미로 압박을 가하면 될 테지.’

    역심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조사까지만 가면 흡족한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 제국에 강력한 세력은 북부의 윈체스터 공작만으로도 충분했다.

    “영명하신 폐하께서 일을 그르칠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소신은 그저, 윈블 자작 영애와 관련된 삿된 자들이 저지른 것이 아닐까 우려되어 한달음에 달려온 것입니다.”

    오해 마시길.

    싱긋 웃는 데니스의 얼굴은 화사했다. 너무 멀쩡해 보여서, 황제는 조금 움찔했다.

    “삿된 자라니. 황실의 견고한 경비를 뚫고 침입한 자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제가 신원이 확실하게 보증된 정보원에게 들은 바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허, 그게 누구이길래?”

    “베네딕트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황태자의 이름이 불릴 때 황제는 얼음으로 만든 망치로 맞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황태자 전하께서 무언가를 보셨단 말씀이십니까, 후작?”

    아슬란이 끼어들었다. 데니스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지만 도움이 되는 질문을 던졌으니 대답해 주었다.

    “네. 제가 연회장을 나가기 전에 황태자 전하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는데, 그분께서 수상한 자를 봤노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베네딕트가 나를 보았나!’

    황제는 비지땀을 흘렸다. 이 영악한 데벤테르 후작이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바는 명확했다.

    괜히 나를 건들지 말고 제대로 사실을 파헤쳐라.

    “황태자 전하께서 잘못 보셨을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폐하?”

    웃는 낯이 얄미웠다. 황제는 베네딕트가 잘못 봤다고 우길 수도 없었다.

    베네딕트 황태자는 성품이 유순하고 다정하여 거짓을 뿌릴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언비어를 퍼뜨린 자가 있으면 잡아들여 진실을 토하게 만드는 자가 베네딕트였다.

    “그래…… 황태자가 잘못 보지는 않았겠지.”

    “하니 전하께 요청하여 수사를 다시 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곤란한 황제가 아슬란에게 눈짓을 주어도 그는 알아먹지 못하는 곰 새끼였다.

    “후작의 말이 옳습니다. 무고한 아녀자인 후작 부인이 죽은 윈블 영애로 인해 상해를 입은 사건입니다. 이것을 가리려는 자가 있다면 필시 후작가를 노리려는 불온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공작과 후작이 합심하여 황제를 몰아붙이니 곁에 있는 시종들도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공정하신 황제 폐하시라면 어떤 선택이 중요하신 줄을 아시겠지요. 소신은 폐하의 선택을 믿습니다.”

    필요하다면 후작가의 자산을 투자해서라도 범인을 잡는 게 이롭지 않겠습니까?

    ‘도망칠 구석도 없게 만드는군.’

    황제는 곤란했다. 그를 찾아온 장로는 아슈라 윈블의 시체를 반드시 소각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 뼛가루를 모아 윈블 자작에게 보낸다면 저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보겠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들었는데……!’

    이대로라면 그들의 제안은 없던 것이 되어 더욱 강한 황권을 누릴 기회가 박탈될 것이었다.

    “……내 재조사를 황실의 수사청에 명하여 범인을 잡아내라고 지시하겠네. 범인을 잡는 것으로 후작 부인의 마음을 달랠 수 있겠는가?”

    데니스는 기다렸던 답이 돌아오자 기뻐하며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그리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젊은 놈이 능구렁이를 수백 마리는 잡아먹은 것 같군.’

    “되었다면 돌아가게. 공작도 같은 건으로 찾아왔으니 함께 나가도록 하고.”

    “하오나.”

    “난 지금 쉬고 싶네. 경사스러운 날에 벌어진 일로 나 또한 몹시 경악스럽고 지친 상태이니.”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아슬란은 황제의 축객령을 더는 거부하지 못하고 문을 나서야 했다.

    데니스는 나란히 아슬란과 걸음을 같이 하며 나오자마자 그에게 따졌다.

    “굳이 저와 같은 시간에 폐하를 알현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후작 부인이 앓아누운 데에는 명백히 내 책임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후작. 내 사람의 잘못은 곧 나의 잘못이니까…….”

    데니스가 아슬란의 덤덤한 척하는 말을 쳐냈다.

    “그러면 왜 루스벨라가 고통받을 때는 모른 체했으면서, 이제 와서 고뇌하는 용사 역할을 자청하시는지.”

    “후작. 말이 심하군. 내가 언제 용사 역할을 자청했다고 그러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데니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슬란은 항상 웃고 있던 자의 본모습이 이러했던가 하고 놀랐다.

    “윈체스터 공작, 아슬란. 당신은 위선자야.”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무례한 언사였지만 아슬란은 지적하지 않았다. 루스벨라의 배우자에게 함부로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데니스는 이참에 잘됐다는 듯 봇물이 터지듯 말문을 열었다.

    “당신은 당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양들에게만 관심이 있으니까. 북부의 수호자? 그거 좋지. 당신의 노고는 수도의 누구라도 알고 있을 거야. 대대로 윈체스터 가의 사명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런데 당신은, 울타리 밖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 당신이 쥐고 있는 것만 소중하잖아. 루스벨라도 그랬지. 원하지 않은 정략적 약혼이라고 해도 그녀는 당신의 보호를 받았어야 했어.”

    그러지 않았잖아. 당신은.

    “그러면서 뒤늦게 관심을 구걸하며 매달리는 거,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지금 말한 내용을 내가 모욕죄로 신고하거나 결투 요청을 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걸 모르진 않겠지?”

    아슬란이 미미한 분노를 담아 뚝뚝 떨어지는 어조로 데니스에게 물었다. 데니스는 그러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봤어.”

    “무엇을?”

    “당신이 나와 루스벨라가 있는 테라스의 문을 여는 것을 주저하다 결국 포기하고 도망가는걸.”

    아슬란의 눈이 커졌다. 봤다고 시인하기엔 자존심이 걸렸고,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웃겼다.

    “나는…… 지금이라도 내 과오를 반성하며 그녀를 위한 속죄를 하고 있어. 이것마저도 잘못이라고 비난하지는 말게.”

    데니스는 아슬란의 말을 차갑게 비웃었다.

    “정말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당신은 테라스에서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어.”

    그렇게 상처받고 절박하다는 얼굴로 가 버리면, 당신이 루스벨라에 대한 미련을 저버리지 못했다는 걸 알아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는 것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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