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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49화 (50/166)

49화

‘피할 수가 없어.’

푸른 기운이 날카롭게 루스벨라를 덮쳤다. 좁은 마차 안, 입구는 봉쇄되었고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루스벨라는 눈을 질끈 감고 호신부와 검을 끌어안았다. 데니스가 남겨 두고 간 것이니 괜찮을 것이라 스스로를 애써 도닥이면서.

‘죽고 싶지 않아!’

결과적으로 루스벨라는 살아남았다. 데니스의 판단은 옳았다.

“윽!”

루스벨라를 향해 야차처럼 달려들던 아벨은 무형의 힘에 튕겨 나갔다. 아벨의 몸은 마차를 뚫고 멀리 땅바닥에 처박혔다.

‘살았구나.’

루스벨라는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다친 곳 하나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벨은 자신이 왜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는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다시 루스벨라에게 달려들었다.

“다시 해 보면 알겠지.”

콰앙. 마차가 반파되었다.

그렇지만 루스벨라는 이번에도 멀쩡하게 살아남았고, 아벨은 저번보다는 가까이 튕겨졌다.

“너…… 뭐냐? 어떻게 나를 밀어낼 수 있었던 거지?”

아벨이 휘청거리며 몸을 털며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은 더 불길하게 빛났다.

‘내가 하던 질문을 이번에는 저 꼬마가 하네.’

루스벨라가 품 안의 데니스의 검과 호신부를 바라봤다. 호신부는 다 타들어 가서 먼지로 변했고, 검은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루스벨라를 지키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진동이 느껴져.’

“그 검, 보통 검이 아니구나. 이 느낌은 꼭 성물에 가까운데?”

“성물이라고?”

“이 세상에는 더는 남아 있지 않아야 할 것인데……. 너, 뭐냐? 대체품아?”

“대체품?”

“몰라도 돼. 대체품아.”

루스벨라는 눈앞의 불길한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성물이니, 대체품이니. 아이는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너…… 아까 성물이라고 했지. 신전과 관계가 있는 아이야?”

그게 아니더라도 저 설명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습격자의 정체가 신전 측의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여기는 황궁이야. 황궁에서 사람을 죽이려는 멍청한 귀족은 없어. 나를 고깝게 보던 북부의 귀족들은 붙잡혔고, 황제 폐하께서 데벤테르 후작 가를 견제하고 싶으신 건 맞지만 일을 이런 식으로 과격하게 처리하실 분은 아니야.’

그렇다면 남는 것은 예언 속의 신전뿐.

‘사용하는 힘도 오러나 마법이 아니야. 그렇다기엔 검도, 스태프나 주문식도 없어!’

“그걸 내가 왜 알려 줘야 하는 건데? 얌전히 죽기나 하지……. 아닌가? 숙성이 된 다음에 죽여야 맞나?”

대체품에 이어서 이제는 숙성 타령이었다. 루스벨라는 하얗고 붉은 아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확신했다.

‘보통 아이가 아닌 건 알겠어. 그리고 신전이 날 죽이려 한다는 데니스의 말은 사실이었고.’

신전과 관계가 있느냐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니 맞는 것 같았다.

믿기 어려운 신전 측의 살해 위협이 현실로 다가오니 충격이 상당했다.

‘도망쳐야 해.’

당장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좋았다. 언제까지 데니스의 검이 지켜줄 지는 미지수였으니까.

“이 정도까지 했으면 많이 몰렸으니까, 그러니까 각성을 한 줄 알았는데…….”

아벨은 혼자서 종알댔다. 루스벨라는 아벨이 자신에게 주의를 덜 기울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루스벨라는 마차가 반파가 된 것을 기회로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주변은 조용했다. 마부와 수행원은 모두 기절한 것인지 죽은 것인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미친 듯이 다리를 놀리며 뛰어가는데 아벨이 멀리서 소리쳤다.

“도망치는 거야? 어디로?”

“네가 없는 곳으로!”

루스벨라는 공포에 질려서, 공포를 이기려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벨은 루스벨라의 말을 듣고 순식간에 그녀를 추월해서 막았다. 억지로 잡아 세워진 몸뚱어리가 넘어졌다.

“윽…….”

“도망치지 않아도 돼. 지금은 때가 아닌 걸 확인해서. 넌 아직 성숙이 덜 된 대체품이야.”

“무슨 사람에게…… 물건도 아닌데 대체품이라고 말을 하는 거야?”

“대체품을 대체품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한담.”

‘미친놈이다.’

루스벨라는 아벨이 괴물로 보였다. 본모습도 아이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건 그냥 모습을 감출 껍데기 같은 거야.’

기이하게도 치료사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아벨을 둘러싼 푸른색의 막이. 그건 정상이 아니었다.

그 안에 아주 불길한 무언가가 있었다.

“제대로 가져오질 않아서 왜 그런가 했더니 각성도 못 한 인간이라서 그랬던 건가. 그럼 말을 했어야지.”

‘날 왜 노렸던 걸까.’

루스벨라가 머리를 굴렸다. 신전이 바라는 그녀의 죽음. 눈앞의 미친놈. 그리고 각성과 대체품 운운.

“너……. 내게서 뭘 얻어 가려는 게 있구나.”

아벨이 줄곧 루스벨라의 말을 무시로 일관했으나 이번 말에는 반응이 있었다.

“그렇다면?”

“원하는 게 뭐야. 날 죽여 가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게 뭐냐고.”

“대체품이라니까.”

“그게 정말 필요한 거라면 날 죽이지 않고 가져갈 방법을 생각해. 죄 없는 사람 데리고 장난질 치지 말고!”

넘어져 까진 무릎보다 이 아이가 내뿜는 살기로 인한 공포가 더 컸다. 아프지 않았다. 아슈라가 친 뺨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살고 싶어.’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아벨에게 질문을 던진 건 그런 연유였다.

“아직은 안 죽여. 넌 미완성품이니까. 그리고…….”

그리고, 뭐?

“널 죽이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걸 가져갈 방법은 없어.”

아벨이 루스벨라에게 다가갔다. 공포에 질린 몸은 움직이지 못했다. 아벨의 작은 손이 루스벨라의 심장이 위치한 곳을 향했다.

“저리…… 가.”

데니스가 준 검이 붉은 기운을 뿜으며 아벨을 밀어내려 했지만, 이번에는 역부족이었다.

“아하. 이건 성물이 아니네. 본체가 담은 힘을 조금 나눠 줬을 뿐이야.”

아벨은 그것을 비웃으며 루스벨라의 가슴팍 위로 손을 놓았다.

“내가 가지고 싶은 건 심장 안에 있으니까. 가져가려면…… 심장을 갈라서 빼내야 해.”

뭐?

‘그래서 나를 죽이려 드는 거라고?’

루스벨라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벨의 압도적인 무력은 대항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이런 자를 어떻게 이길 수 있지?’

목숨을 보전할 수는 있을까? 내가 살아남을 수 있긴 한 걸까?

무력함의 늪에 빠져 있던 순간이었다.

“루스벨라!”

‘데니스의 목소리.’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이 그녀의 얼굴에서부터 번져 갔다.

아벨은 루스벨라의 얼굴 위로 피어난 희망이 보기 싫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텐데.’

그게 지금이 아닐 뿐이지, 그녀가 각성 조건을 달성해서 대체품이 완성이 된다면 그날이 이 여자가 죽는 날이었다.

“더 절망하고, 더 괴로워하며, 더 아프도록 해.”

“뭐?”

아벨은 루스벨라의 불행을 비는 말을 남기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루스벨라! 무사해요?”

“데니스! 여기예요!”

데니스는 루스벨라가 흙투성이로 엉망이 된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핏기가 빠진 낯으로 그는 그녀에게 입고 있던 옷을 둘러 주고 일으켰다.

“마차가 부서졌어요.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다 쓰러졌고요.”

데니스가 마부를 포함한 사람들의 생사를 확인했다.

‘숨을 쉬고 있어.’

“다행히 목숨을 잃은 것은 아니군요. 불행 중 다행입니다.”

‘나 때문에 죽은 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루스벨라는 그 무서운 흰색 머리칼의 아이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녀 때문에 누군가 죽어 나갔다면 정말 끔찍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차는 어떻게 하죠? 황궁 안이다 보니 다시 부르기도 애매한데.”

“그건 괜찮습니다.”

데니스가 통신기를 꺼내 어디론가 연락했다. 전화한 곳은 데벤테르 후작가였다.

통신이 닿은 이는 데니스의 보좌관인 제이크였다.

“제이크, 나다. 황궁으로 마차를 다시 보내.”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마차가 망가지기라도 한 겁니까?”

“그래. 완전히 반이 날아가서 도저히 써먹지 못하는 상태야.”

“어느 겁 없는 인간이 후작가의 마차를 부숴요? 후작님과 후작 부인은 무사하십니까?”

“무사해. 그러니 최대한 빨리 마차를 새로 보내 주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금방 보내겠습니다.”

데니스는 통신을 끊고 루스벨라를 부축해서 적당한 곳에 앉혔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온 것에 안도한 루스벨라는 힘없이 그에게 고개를 기댔다.

“어떤 아이가 날 죽이러 왔어요.”

“생김새가 어떠했죠?”

“머리카락은 하얗고, 눈은 사람이 흘린 피처럼 붉은 아이였어요. 그리고 사람이 쓸 수 없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었어요.”

루스벨라는 아벨이 풍기던 푸른 기운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데니스의 표정은 점점 경직되어 갔다.

“……당신에게 대체품이라고 했다고요.”

“네. 제가 미완성이라면서 아직은 죽이지 않겠다고 했어요.”

“또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아슈라 영애처럼…… 저를 저주하는 말을 하고 갔어요. 불행해지라고요.”

“불행이라…….”

“제게 가져갈 것이 심장에 있다면서, 불행과 그게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루스벨라의 질문에 데니스는 파리한 얼굴로 대답했다.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맞지 않기를 바라지만……. 우선 집으로 돌아간 뒤에 생각해 봐야겠군요.”

멀리서 제이크가 보낸 마차가 오고 있었다.

“주인님! 작은 마님!”

안락한 후작가의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괜찮을 거예요, 루스벨라. 편히 쉬어요.”

잔뜩 긴장했던 몸은 데니스의 말에 허물어졌다. 루스벨라는 간신히 붙잡고 있던 정신의 끈을 놓았다.

“내가 괜찮게 만들 거예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러나 그의 심장에 통증이 전해지는 나날이 늘고 있었다. 강도도 세지고 있었다.

‘버텨야 해.’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을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버텨 줘.

***

다음 날 수도에는 어제 있었던 일로 세간이 떠들썩해졌다.

가장 뜨거운 감자는 역시 아슈라 영애가 어찌 겁도 없이 데벤테르 후작 부인의 뺨을 치는 사달을 낸 일이었다.

“실제로 본 사람들은 정말 그 영애가 미친 것 같았다며?”

“후작 부인의 전 약혼자이자 파혼 상대인 윈체스터 공작 때문에 벌인 일이라던데.”

“치정극도 그만하면 병이지.”

“그래서, 그 미친 영애는 어떻게 된 거래? 후작 부인도 그렇고.”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아슈라 윈블 자작 영애는,

“으, 으아아아악!”

“시, 시체다!”

황궁의 지하 감옥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심문도 하기 전이었고, 황제가 아무런 명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벌어진 사건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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