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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48화 (49/166)
  • 48화

    아슬란이 제게 든 감정으로 놀라워하고 있을 때, 서릿발처럼 찬 음성이 추가로 더 떨어졌다.

    “이번에는 정말로 다시는 볼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공작 각하. 난동을 부린 영애의 건은 서면을 통해 해결하도록 하지요.”

    “……그렇게 원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시종장은 아슬란과 후작 부부의 기묘한 대치를 지켜보고만 있다가 다행이라며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언제 끝날지 모르겠는 대화가 드디어 마무리되어서 기뻤다.

    “그럼 조심히들 들어가십시오. 모두들.”

    시종장이 문을 닫고, 세 사람은 복도로 나와 각자의 마차가 있을 길로 걸어갔다.

    ***

    돌아가기 위한 마차 안에 데니스와 루스벨라가 탑승했다.

    “괜찮아요, 루스벨라?”

    데니스가 루스벨라를 걱정 가득한 눈으로 보았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공작을 만난 일이라면 저는 괜찮아요. 안 괜찮을 이유가 없잖아요?”

    “아뇨. 그게 아니라, 뺨의 상처가…….”

    “아. 이런. 많이 흉한가요?”

    루스벨라가 여전히 화끈거리며 열을 내는 뺨을 감쌌다. 아슈라가 한쪽 뺨에만 때린 것이 아니라서 양 뺨이 모기에 물린 것처럼 부어 있었다.

    “아프죠. 자존심도 상하고. 공들여 준비한 자리인데 설마 이런 날벼락을 겪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루스벨라가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감이 풀어지자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가장 멋진 모습으로 각인되고 싶었는데.’

    루스벨라와 데니스가 함께 부부로서 서는 최초의 공식 석상이었는데, 아쉬움이 컸다. 그녀 때문에 데니스에게, 데벤테르 후작가에 좋지 않은 면을 준 것 같아 미안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소란에 휘말리게 되어서…….”

    그녀의 탓이 아니란 것을 안다. 하지만, 무섭도록 죽으라며 고성을 지르던 아슈라를 떠올리면 가슴이 선득해졌다.

    ‘그 파란 기운…… 그게 아슈라에게서 나오고 있었지.’

    워낙 미미했지만 치유사의 눈에는 보였다. 아슈라의 머릿속을 흐트러뜨리는 불길한 기운이.

    ‘그게 대체 뭐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위험한 것 같았다. 공작과 얽히긴 싫어도 아슈라에 대해 이 일을 자세히 조사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왜 그게 당신 탓이에요? 그 미친 여자가 잘못한 건데.”

    데니스가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루스벨라는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그자들을 동정할 필요는 더 없고요. 반드시 그 여자에게 죄를 물을 겁니다. 나머지도 마찬가지고요.”

    “동정하지는 않았어요. 저도 그들에게 죄를 묻고 싶고……. 제가 걱정한 건 당신이었으니까요.”

    부부는 한 묶음처럼 여겨졌다. 루스벨라의 잘못이 곧 데니스의 흠처럼 보일 수 있었다.

    ‘언젠가는 떠나가야 하는데, 그에게 좋지 못한 일을 남길 수는 없어.’

    루스벨라는 자신과 이혼한 뒤에 남겨질 데니스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신분과 이름을 감추고 어디론가 떠날 테지만, 그는 이곳에 남아 있을 것이므로.

    “그런 생각 하지 말아요. 난…… 당신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괜찮으니까. 나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데니스. 그건…….”

    “당신이 이기적이었으면 좋겠어요. 날 마음껏 이용하고, 그것에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랬다면 우리의 만남은 ……했을 테지만.

    “데니스?”

    “……이상한 말이었죠. 잊어 주세요. 미안해요.”

    루스벨라가 데니스에게 손을 뻗었지만 닿지 못했다. 그가 잠시 밖으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봐. 데니스.”

    웬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마차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데니스는 그 사람을 보고서 바로 마차에서 내렸다.

    “루스벨라. 잠시만 자리를 비울게요. 금방 올 테니 이것을 쥐고 있어요.”

    “이건……?”

    데니스가 루스벨라에게 준 것은 그가 항상 차고 다니는 검과 자그마한 호신부였다.

    “이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것들이 당신을 지켜 줄 거예요. 혹시나 싶지만…… 이제는 무슨 일이 생길지 저도 예측을 할 수 없으니까요.”

    “……알겠어요. 다녀오세요.”

    루스벨라는 그를 배웅했다. 손에는 검과 호신부가 꼭 쥐고 있었다.

    신전 측에서 그녀를 죽이려 한다고 했다. 데니스가 곁에 없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 했지만 이번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너무 늦는다면 먼저 저택으로 가 있게.”

    “알겠습니다. 후작님. 그리하겠습니다.”

    데니스가 로브를 쓴 남자를 따라 어딘가로 향했다. 루스벨라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숫자를 세다가, 피곤함에 깜빡 잠이 들었다.

    ***

    데니스는 로브를 쓴 남자를 따라 황궁의 버려진 뜰 안에 들어섰다.

    “어디까지 가실 생각이십니까, 황태자 전하.”

    우뚝. 로브를 쓴 남자가 멈췄다. 그리고 깊게 눌러쓴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반짝거리는 은발이 달빛을 받아 더 빛나고 있었다.

    “넌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거지, 데니스?”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네 말대로 부황께서 신전 측과 은밀히 접촉하고 계셨다.”

    “연회가 파한 이후에 바로 말입니까?”

    “그래! 그것까지도 포함해서 말이야.”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어.

    황태자, 베네딕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데니스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데니스는 베네딕트의 손을 떼어내고 물었다.

    “폐하께서 누구와 마주하고 있었는지는 보셨습니까?”

    “그걸 알려 주면 어떻게 나도 모르는 정보를 얻었는지 알려 줄 텐가?”

    “그건 대외비라. 알려 드릴 수는 없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알려 주시는 정보의 값어치보다는 훨씬 비싸거든요.”

    “쩨쩨하긴.”

    베네딕트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지만 데니스는 요지부동이었다. 베네딕트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부황께서 사제복을 입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제복이 내가 아는 신전 측의 사제복과는 영 달랐어.”

    “검은색이었습니까?”

    “맞아. 정결한 흰색의 사제복이 아니라 검은색이었어. 아주 새카맣더군. 이것까지도 알고 있어서 말해 줄 수 없다고 한 건가?”

    “뭐, 비슷합니다.”

    데니스가 팔짱을 끼고 상황을 가늠했다. 황태자의 정보를 조합하면 지금 에덴의 활동은 너무 빨랐다.

    ‘쥐 죽은 듯이 행동하는 게 그네들 습성인데…….’

    뭐가 그들을 양지로 나오게 만든 걸까. 무리하면서까지.

    “혹시 그 사제의 머리카락이 하얀색이었습니까?”

    “아니. 평범한 갈색이었네. 그런데 그건 왜 묻나?”

    ‘이런…….’

    황제 정도의 거물을 대하는 자리니 아벨이 올 줄 알았다. 데니스가 곧바로 구두의 끈을 잘 동여매고 땅을 박찼다.

    “황태자 전하, 죄송하지만 소신이 먼저 자리를 뜨겠습니다! 정보를 알려 주신 값은 추후에 다른 것으로 대신해 드리겠습니다.”

    “어어,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가! 아직 더 이야기가 남았는데!”

    베네딕트가 발을 동동 굴리며 데니스에게 소리쳤다. 데니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힘껏 대답했다.

    “제가 죽더라도 지켜야 할 사람의 곁으로 갑니다!”

    ‘루스벨라!’

    아벨이 황제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장로 중 한 명이 황제를 알현했다는 소리였다.

    ‘아벨 그 개자식이 루스벨라에게 접근했다면…….’

    내가 미쳐 버릴지도 모르지. 내 안일함을 참을 수가 없어서, 또 그녀를 위기에 빠뜨린 나를 견딜 수가 없어서.

    데니스는 달리고 또 달렸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속도로.

    심장이 아팠다. 숨이 넘어갈 듯이 달리기 때문이 아니었다. 욱신거리며 심장을 갉아먹는 통증이 늘고 있었다.

    ‘제발.’

    그는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

    “……아. ……아.”

    ‘누구지?’

    누군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루스벨라는 그것이 데니스인 줄 알고 가늘게 눈을 떴다.

    하얗고 검붉은 색채를 띤 사람이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 누구십니까!”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준 검과 호신부를 힘껏 그러쥐었다. 여차하면 그것들을 이용해 마차를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웬 꼬마였다.

    ‘……어린아이? 어디서 온 거지?’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루스벨라에게 말했다.

    “길을 잃었어요. 누나. 가족들이 탄 마차는 떠나서 없어서 무서웠어요.”

    “……그래서?”

    “잠깐만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불 꺼진 연회장은 너무 무서워서…… 혼자는 싫어요.”

    어린 사내아이는 자신이 연회장을 빠져나와 황궁의 다른 방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고 했다. 그런 도중에 연회가 너무 일찍 끝났고, 가족들을 놓쳐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후작 가의 마차를 탈 생각은 어떻게 한 거니?”

    “대단한 가문이니까…… 도움을 요청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어요. 마차에 올라탈 생각은 없었는데, 안락해 보이는 게 그만…… 죄송합니다.”

    아이가 울먹였다. 루스벨라는 아이의 행동을 보고 교육을 잘 받지 못한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아닐까 싶었다.

    “조금만 같이 있으면 안 돼요? 네?”

    그렇지만 아이를 제지한 수행원이 아무도 없었다는 게 이상했다. 너무 주변이 조용했다.

    ‘게다가 길을 잃었다면서, 어떻게 콕 집어 데벤테르 후작가의 마차가 있는 곳으로 올 수가 있었지?’

    루스벨라는 아이가 수상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과감하게 질문을 던졌다.

    “너, 누구야.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지?”

    루스벨라의 말에 아이는 여전히 처연한 얼굴로 울먹였다.

    “누나……? 왜 그래요? 저, 저는 길을 잃어서 겁을 먹은 아이일 뿐인데. 제가 뭘 잘못했나요?”

    “네가 진짜 무고한 아이라면 사과할게. 하지만 나가 봐야 알 것 같아.”

    루스벨라가 마차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창문! 창문은 어떻지!’

    창문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으로 봉해진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너……. 뭐야.”

    아까와 같은 질문에 어린아이가 샐쭉 웃었다.

    “가여운 어린아이한테 친절을 베풀어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너무 못됐다. 레이디는 그런 것도 안 배우나?”

    불손하고 껄렁한 말투였다. 소름이 끼쳤다.

    “너 뭐냐고 물었어.”

    “재미없게. 그런 걸 뭐 하러 알려고 그래.”

    ‘……성인의 목소리?’

    아이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루스벨라가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청년이 한 명 있었다.

    ‘아이가 아니었나?’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여전히 아이는 아이였다.

    그러나 살기를 내뿜으며 기분 나쁘게 웃는 것이 절대 평범한 아이는 아니었다.

    “어차피 죽을 건데 그런 건 왜 물어. 건방지게.”

    아이가 푸른 기운을 방출하며 루스벨라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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