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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47화 (48/166)

47화

‘지하 감옥은 안 돼!’

황제의 서슬 퍼런 협박에 질린 북부의 귀족들은 눈물을 삼키며 명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들은 대체 왜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몰랐다. 억울했다. 데벤테르 후작 부인이 된 루스벨라에 대한 꺼림칙함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그건 마음 안에서 묻어 둘 이야기였다.

‘그런데 우리가 어쩌다 이런 짓을 한 거야?!’

원통하였으나 도와 달라 청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방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힐난하고 있었다.

‘공작님, 우리들의 공작님께서는 어디 계시지?’

아슬란은 저희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며 눈알을 굴렸다.

하지만 겨우 찾아낸 윈체스터 공작 역시도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그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 여자에게…….’

아슬란은 데니스와 떨어진 루스벨라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곤란해진 저희들은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버려져도 무방하다는 것처럼 내버려 두고 있었다.

북부에서 루스벨라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을 때처럼.

그들은 그것에 절망을 느끼며 힘 빠진 걸음으로 연회장을 나갔다.

그러나 아슈라 윈블은 달랐다.

‘용서할 수 없어!’

아슈라 윈블의 눈이 불타올랐다. 아슈라는 버리는 패. 따라서 그녀에게 걸린 세뇌용의 푸른 기운은 마지막까지 그녀의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시켜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루스벨라의 탓이 아님에도 아슈라는 자신의 곤란함이 다 루스벨라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

[네 불행은, 너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은 전부 그 여자 때문이란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발악해 주렴.]

아슈라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때마다 들린 목소리가 그녀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네가 미워.

네가 밉다고!

‘너만 아니었으면!’

“윈체스터 공작님!”

아슈라가 아슬란을 향해 아우성쳤다. 귀족들이니 곱게 퇴장하라는 뜻에서 연행할 병사들도 없었던 탓에 그녀를 잡을 새도 없었다.

아슬란이 의아한 낯으로 쳐다보자 아슈라는 환하게 광기 어린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공작님을 정말 좋아했어요. 그러니…… 저는 공작님을 귀찮게 만드는 저 여자를 용서할 수 없어요.”

아슈라가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모조리 밀쳐내어 누군가의 앞에 섰다.

그 누군가는, 루스벨라였다.

“루스벨라!”

“무슨……!”

데니스와 아슬란이 곧바로 루스벨라를 향해 달렸지만 아슈라의 폭주가 더 빨랐다.

“다 너 때문이야! 가진 거라고는 반반한 외모밖에 없는 주제에! 감히! 제 분수도 모르고!”

짜악.

루스벨라의 고개가 강한 힘에 쏠려 옆으로 돌아갔다. 뺨이 얼얼하고 화끈거렸다.

‘……아파.’

예상하지 못한 폭력에 귀가 멍했다. 이명이 들린 것도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바로 세우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슈라가 있었다.

‘울어?’

이 여자가 뭘 잘했다고 우는 거지?

‘진짜 울고 싶은 건 나였는데. 언제나…….’

그런데 네가 울어? 가해자 주제에. 지금도 날 때리고 모욕하려던 주제에.

“너만 없었다면, 그랬다면! 북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평온할 수 있었어!”

“……이봐요.”

“공작님을 노리지만 않았어도, 그분의 약혼녀가 되지만 않았어도! 내게 잠재된 이런 추한 감정을 알 일은 없었을 거야!”

다 너 때문이야. 너, 너, 너!

소리를 지르는 아슈라를 모두 경악에 질린 눈으로 멍하니 응시했다. 가장 먼저 움직임을 취한 것은 데니스였다.

“뭐 하는 거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놔! 놓으라고!”

악쓰는 소리를 할 때마다 한 대씩 뺨을 치려는 손동작이 커졌다. 데니스가 막아서 다행이었다.

‘저걸 그대로 맞았다면 어땠을까.’

맞지 않았어도 맞은 것처럼 아팠다. 뺨이 퉁퉁 붓는 것이 느껴졌다. 선명한 악의의 힘이 이토록 무서웠다.

“너를 증오해. 네가 태어난 것을 염오한다.”

죽어 줘.

“죽어 줘. 죽어 줘. 죽어 달라고!”

아슈라는 일방적으로 분노에 찬 악랄한 말을 루스벨라에게 쏟아 냈다. 악의에 찬 말은 저주에 가까웠다.

“이 미친 여자가…….”

데니스는 광분하는 아슈라를 제지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다 그는 어느 순간 무언가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루스벨라. 이 여자가 하는 말 귀담아듣지 말아요. 귀 썩어요.”

“걱정 마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어째서 저렇게까지 날 미워하는 거지?’

오히려 루스벨라는 아슈라가 거품을 물 정도로 난동을 부리는 것을 보며 심장이 차가워졌다. 의문이 솟아올랐다.

‘고작 질투 때문에 가지고 있던 명예와 평판을 버릴 만큼, 이성을 잃고 달려들 만큼 이 여자가 조급했다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 뭔가 이상했다.

‘정말 광인처럼 달려들고 있잖아.’

그래서 루스벨라는 광분하는 아슈라의 손목을 덥석 잡을 수 있었다.

“더 추한 모습 보이지 말고 그만 해요.”

“이게……!”

“상스럽게 반말 내뱉지 말고요. 영애야말로 지금 누구 때문에 연회가 망쳐졌는지 모르겠어요?”

아슈라는 루스벨라의 말에 잠시 행동을 멈췄다. 주위는 싸늘했다. 무수한 눈동자가 그녀를 탓하고 있었다.

‘싫어, 싫어!’

“너…… 때문이야……!”

다시 손이 날아오려고 했다. 루스벨라도 맞아 줄 생각은 없었다.

“루스벨라에게서 떨어져. 이 미친 여자야.”

“아악! 방해하지 마!”

데니스가 황급히 루스벨라의 곁에서 아슈라를 떼어 냈다.

“루스벨라, 뺨이…… 내가 더 주의했어야…….”

“아프지만, 그것보다 저 영애를 붙잡는 게 더 급선무일 것 같아요. 당신 탓도 아니고.”

그 뒤를 이어 아슬란이 아슈라를 붙잡고 끌어냈다.

“윈블 자작 영애. 이게 무슨 짓이지?”

아슬란이 아슈라의 두 팔을 꺾어 잡고는 물었다. 아슈라는 힉힉거리며 웃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분을 위하기 때문에!”

푸른색 기운이 아슈라의 눈에서 넘실거렸다. 최후의 힘을 다하면서 사그라들고 있었다.

루스벨라는 부어오르는 뺨을 쥐고 그것을 봤다.

‘……저게 뭐지?’

일련의 소동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개중에서도 윈블 자작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도망친 지 오래였다.

“……저 영애는 정녕 미친 겐가?”

황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기사들을 불렀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달려와 아슈라의 제압을 도왔다.

연회장 바닥 위로 엎어져 포박되는 아슈라는 끝까지 발버둥 치며 루스벨라에게서 살벌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죽어 줘. 죽어 줘요. 죽어 주세요. 견디지 못할 불행에 시달리다 죽어 줘.”

그게 당신 인생의 유일한 쓸모야. 가치야.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야.

“죽어 줘!”

아슈라의 입은 쉬지 않고 저주 어린 말을 내뱉었다. 황제가 인상을 쓰고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저 영애의 입도 막아라.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군. 내 귀가 썩겠어.”

“읍읍!”

아슈라는 곧 완전히 죄인의 모습이 되어 연회장 밖으로 끌려 나갔다. 산발한 머리에 꽁꽁 묶인 아슈라는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루스벨라를 죽이고 싶다는 열망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허, 참.”

장내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성스러운 날에 즐거워야 할 분위기는 파탄이 났다. 대신 그 자리에는 아까 그 미친 영애가 대체 왜 후작 부인에게 폭력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숙덕거림이 남았다.

“방금 나간 사람들, 북부에서 온 사람들이었지?”

“조용하고 신중한 게 북부의 미덕인 줄 알았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실망했잖아.”

아슬란도, 황제도, 데니스도 그것을 들었다.

황제는 아픈 머리를 짚으며 좌중에 명했다.

“건국 기념일 연회는 이것으로 파한다. 다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짓은 삼가길 바라지.”

귀족들은 웅성거렸지만,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어 천천히 홀을 빠져나갔다. 금세 사람들이 빈 홀은 휑해졌다.

“자네는 나와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하지, 윈체스터 공작. 북부 관련 일은 자네의 소관이니까. 그 영애의 소란이 자네와 무관하다고 발뺌하지는 말게.”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폐하. 제 가신인 자의 여식이 저지른 일이니 수습하는데 책임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제의 책망을 아슬란은 싫은 기색 없이 받아들였다. 그도 몹시 당황스러웠으나 책임을 지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데벤테르 후작과 후작 부인.”

“예, 폐하.”

“그대들에게 미친 영애가 달려든 일은 유감일세. 보상을 원한다면 윈체스터 공작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게나.”

“……그리하겠습니다.”

하기 싫었다. 루스벨라나 데니스나 아슬란과 엮이기 싫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윈체스터 공작은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라 믿겠네. 짐은 너무 피로하니 이만 들어가지. 자세한 알현 날짜는 나중에 전해 주도록 하겠네.”

“예. 폐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황제는 혀를 끌끌 차며 돌아갔다. 황태자는 아비를 부축하며 들어가다가 데니스와 눈이 마주쳤다.

데니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태자 역시도 같은 행동을 한 후 돌아갔다.

홀에는 이제 세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시종장이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그들에게 나가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전에…….”

데니스가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더니 열받은 얼굴로 웃으며 아슬란에게 말했다.

“윈체스터 공작. 하나만 묻죠.”

“……뭡니까.”

“그 미친 영애가 날뛰던 것에 당신도 일조한 바가 있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북부를 통치하는 자의 명예를 걸고…….”

“그놈의 명예.”

데니스가 아슬란의 말을 끊었다. 그는 진저리가 난다는 눈빛으로 아슬란을 쳐다봤다.

“압니다. 각하의 명예가 중요해서 루스벨라 앞으로 직접 와서 사과하겠다는 말까지 했으니 누구보다 잘 알죠.”

“…….”

“그런데 말입니다. 공작 각하.”

데니스의 붉은 눈이 아슬란의 파란 눈을 응시했다.

“정말 그 명예의 무거움을 알면 처음부터 잘하셨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가신을 통제하지도 못해서 이상한 여자가 제 아내에게 달려들 일도 없었어야 했고요.”

“그 점은…… 내 실책임을 인정합니다. 사과드립니다.”

“제게 왜 사과를 하십니까? 제가 아니라, 옆에 있는 제 아내에게 해 주시죠.”

아슬란이 그 말에 루스벨라를 돌아봤다.

‘뺨이…….’

그녀의 두 뺨은 퉁퉁 부어 있었다. 서둘러 냉찜질을 해 줘야 될 것 같았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내일이면 멍이 들지도 모를 자국이었다.

“……그대에게 사과해도 되겠습니까?”

편지는 완벽한 거절을 담고 있었다. 다시는 보지도 말자고 되어 있었다.

‘그래도 이 기회를 빌려 말해 두는 게 좋겠지.’

아슬란은 긴장했다. 루스벨라의 반응이 어떨지 알 수가 없어서.

“저는.”

숨을 가다듬는 그 찰나의 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당신의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아무 관심도 시선도 두고 싶지 않아요.

“…….”

“가세요. 윈체스터 공작 각하. 우리가 만나지 않을 곳으로, 영원히.”

붙잡으면 쉬이 녹는 눈처럼 약했던 여자는 얼음처럼 단단하고 차갑게 변모해 있었다.

‘이런 사람이었나.’

약혼 기간 동안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는 아슬란으로서는 루스벨라의 굳어 있는 얼굴이 생소했다. 테라스에서 데니스에게 더없이 따뜻하게 대해 준 모습을 봐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당신에게 뒤늦게 관심이 가게 되었다고 한다면, 나는…….’

들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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