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연회장으로 돌아온 루스벨라와 데니스는 장내가 굉장히 시끄럽다는 것을 느꼈다.
“다들 데벤테르 후작 부인의 실체를 아셔야 한다니까요!”
“맞아요. 후작 부인이 북부에서 머무를 때 얼마나 무례한 사람이었는지를 여러분은 아셔야 해요.”
“그녀는 이렇게 환대받아서는 안 돼요.”
앵무새처럼 루스벨라를 헐뜯는 모함을 내뱉는 자들이 있었다. 루스벨라는 빽빽 소리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또 북부인가?’
공개적인 연회장에서조차 그녀를 벼랑으로 몰아가려 할 줄은 몰랐다. 여긴 그들이 주류였던 북부가 아니니까. 중앙 귀족들이 주름잡고 있는 수도였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저런 어리석은 짓을?’
루스벨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려 건국 기념일 연회다. 황제와 황태자도 참여하여 시간을 보내는 이 날에, 소란을 일으키는 행동은 머리를 내다 버린 수준의 멍청한 짓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꾸중했다. 대부분 루스벨라와 데니스의 등장에 호감을 느낀 자들이었다.
“신성한 건국 기념일 날에 이게 무슨 짓들이에요?”
“확실하지도 않은 주장을 가지고 사람 몰아세우지 말아요.”
그 선두에는 다이애나와 엘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실리케 백작 부인과 텐더 자작 부인이 완강한 자세로 북부인들을 비난하자 다른 사람들도 거든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북부에서 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루스벨라를 욕했다. 고삐가 풀린 말처럼 폭주하고 있었다.
“데벤테르 후작 부인은 이곳에 오면 안 됐어요! 뻔뻔하게 어디서 고개를 들고 오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루스벨라와 데니스는 멀찍이서 북부 출신 귀족들의 광적인 외침을 들었다. 데니스가 한숨을 푹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해 줄까요?”
“저 사람들도 이 자리에서 치울 수 있나요?”
“역으로 망신을 드릴 수는 있죠. 음, 그 전에 아무래도 폐하께서 재밌는 먹잇감을 놓치실 리가 없지만.”
이거 귀찮게 되었군요.
데니스의 말대로 화려한 황금 옥좌에 앉아 있던 황제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 일로 저에게 무언가 얻으려는 속셈이겠죠. 빨리 돌아왔어야 했나…….”
데니스의 말은 맞아떨어졌다. 황제는 노기를 띤 얼굴로 시끄러운 난장판에 고함을 질렀다.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소란을 일으키는가! 즐겁고 기쁘기만 해도 부족할 건국 기념일에. 품위 없이.”
황제의 으르렁거림에 귀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쉴 새 없이 루스벨라의 험담을 하던 입들도 조용해졌다.
“우, 우리가 방금 전까지 뭘 한 거죠?”
정신이 맑아졌다. 황제의 외침이 그들에게 걸린 세뇌를 깨뜨린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들을 마땅찮은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그득했다. 북부인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이런 약자의 입장에 놓인 적이 없었으므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마지막 기억에서는 아슈라 영애와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좋은 말을 들었던 것 같았는데, 자세한 것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상의할 틈이 없었다.
황제가 후작을 향해 쏘아볼 화살로 그들을 낙점했기 때문에.
“거기 그대들이 소란의 주범이던데, 무슨 원한이 있어 데벤테르 후작 부인을 욕하는 거지?”
“예? 예?”
위압감을 주는 황제가 그들을 콕 집어 물어보니 덜컥 겁이 났다. 무슨 말을 줄줄 읊었는지도 모르는데 질문을 받으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나저나 데벤테르 후작 부인? 우리가 후작 부인을 욕했다고?’
미칠 것 같았다. 기억나지도 않는데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나. 왜 대답이 없지? 짐이 우스운가?”
“아, 아닙니다, 폐하!”
“그것이…… 저희는 기억이 잘 나지를 않아서.”
“아까까지 불이 붙은 것처럼 신나게 후작 부인을 욕하더니, 그걸 잊어버렸다?”
“소, 송구합니다. 그렇지만 저희들은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창피하고 억울했지만 이렇게 답함으로서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귀족들 사이에 섞여서 북부 귀족들이 분위기를 망쳐 놓을 때 방관하던 아슈라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반드시 그 여자에게 지독한 망신을 주렴.’
“나는 해야만 해……. 그 여자를, 루스벨라 그 여자를 망가뜨려야만 한다고…….”
중얼중얼 그 말을 반복하던 아슈라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추궁당하는 북부 출신 귀족들에게로 향했다.
“윈블 영애? 잘됐습니다. 저희를 좀 도와주…….”
아슈라를 알고 지내던 막역한 귀족들이 도움을 요청하려던 때였다. 눈, 파란 기운이 서린 아슈라의 눈을 보니 맑아졌던 머릿속이 다시 혼란 속으로 빠졌다.
힘이 빠지고, 아슈라가 원하는 대로 다시 적의를 품고 황제에게 답했다.
“데벤테르 후작 부인은……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불명예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녀는 공작 가의 예비 안주인으로 있는 동안 처리해야 할 일의 8할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공작님과 염문이 도는 영애가 보이면 그 가문과의 이간질을 시도하려고 했죠. 그래서 저희는 불길한 자를 내쫓으려 한 것뿐입니다.”
“저희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아슈라도 함께 말을 보탰다. 그녀의 눈도 흐릿했지만 함께 서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맹렬한 감정이 엿보였다.
전부 거짓임에도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경건한 모습이었다.
다시 돌변한 태도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다.
“영애는 또 무슨 일이지?”
“폐하, 말씀하시는 도중에 갑자기 끼어든 것은 송구하오나, 데벤테르 후작 부인을 쫓아 주시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그녀는 공작님의 전 약혼자로 있을 적 자랑스러운 북부인의 긍지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여 파혼당한 여자입니다.”
황제가 아슈라의 눈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서린 푸른 기운을 포착하고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그것 때문에 연회를 망칠 난동을 부렸나?”
황제도 이상함을 느꼈지만, 계속 이야기를 듣고자 아슈라에게 물어봤다.
“고작이라뇨, 폐하. 신께서 수호하시는 성력이 가득 차는 이날 밤에, 자격이 되지 않는 부정한 자가 와서야 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불길하다거나 부정한 자라는 이야기는 루스벨라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꺼림칙한 단어의 사용은 의혹을 만들어 내기엔 충분했다.
‘후작 부인이 설마 약혼 시절에 무슨 일을 저지른 것 아니야?’
‘가령 바람이라도 피웠다든가……. 아니면 저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겠어?’
웅성거림을 데니스와 루스벨라도 느꼈다.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어서 두고 봤는데, 끼어들어야만 하는 때가 온 것 같았다.
“루스벨라, 잠깐만 뒤에 있어요.”
“혼자서 가시게요?”
“진흙탕에 발을 들이는 건 저 하나로 족하니까요.”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가만히 밀어내는 손을 거부할 수 없었다.
“폐하.”
단정하고 곧은 목소리가 울렸다. 황제를 포함한 사람들이 그를 쳐다봤다.
“저 치들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데벤테르 후작.”
뚜벅뚜벅 걸음을 옮긴다. 순식간에 아슈라를 포함한 북부 귀족들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말씀 중에 끼어든 것은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싱긋 웃던 데니스는 장갑을 벗어 던져 루스벨라를 모욕한 자들에게 던졌다. 아슈라가 한 짝을 맞았다.
“이 무슨 무례입니까!”
“무례는 그쪽들이 먼저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것도 아니고 무려 앞에서.”
아슈라가 불쾌함에 소리를 지르자 데니스가 차분히 답해 주었다. 뒤에 있는 사람들도 북부에서 온 귀족들이 억지를 쓴다며 불유쾌한 티를 내고 있었다.
“있지도 않은 일로 내 아내를 홀에서 추방하려고 하는 게, 얼마나 억지스러운 행동인지는 귀족이라면 다들 아실 텐데…… 부득불 우기시니, 참.”
이건 뭐 처음부터 예의를 어린아이들과 같이 배워야 하는 수준도 아니고.
“뭐가 그렇게 거슬려서 되지도 않을 짓까지 해대는 겁니까? 당신들이야말로 부끄럽지도 않아요?”
날선 말이었지만 틀린 것이 없었다. 뒤에 선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니스는 황제에게 예를 차리며 한 가지 청을 올렸다.
“폐하. 저야말로 제 아내의 명예를 더럽히려는 저치들과 결투할 권리를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허어. 결투를 벌이겠다고?”
“불쾌한 선동을 부리는 무리들을 어찌 두고 보겠습니까. 제 아내와, 이 자리를 주최한 황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윤허해 주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그것으로 책임을 지지요.
데니스에게는 루스벨라의 안위만 중요했지, 황실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황실의 명예가 땅에 처박히든 말든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미꾸라지 같은 놈…….’
데니스는 그저 황제가 소란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한 탓을 그에게로 돌릴 것을 알아 적당히 사탕발림을 떨어 본 것에 불과했다.
황제도 그것을 간파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곁에 있던 황태자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황제에게 속삭였다.
“부황. 이쯤에서 상황을 종결시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후작의 기를 꺾어 놓을 기회인데, 여기서 멈추란 말이냐?”
“건국 기념일에 꼬투리를 잡아 좋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괜한 일로 사람을 붙잡는다면 황실에 이득 될 것이 없습니다.”
황제가 귀족들을 살폈다. 황제의 시선에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지만 그는 봤다.
누가 봐도 억지를 부린 자를 아직도 왜 방치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스러움이 떠다니고 있었던 것을.
“……아닐세. 후작의 말마따나 저들의 말이 틀린 것은 나도 알고 있네.”
“하오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며 난동을 부린 저자들을 당장 내치겠네. 불쾌했을 후작 부인에게는 미안하군.”
상황이 아슈라를 포함한 무리에게 좋지 못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황제는 나름 아량을 표해 사건을 적당히 묻어가려던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북부에서 온 귀족들은 일제히 불만을 토했다.
“폐하! 어찌하여 저희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으십니까!”
“데벤테르 후작의 세가 강하다고는 하나, 저희는 엄연히 고생하여 북을 지키는 사람들이거늘!”
“저희 또한 충심에서…….”
더는 참아 줄 수 없었다. 황제도 쉬지 않고 소음을 내는 그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 입들 다물어라! 그대들의 체면을 생각하여 넘어가려 했으나 두고 볼 수가 없군.”
‘데벤테르 후작에게서 후작 부인의 일로 정보라도 캐내 볼까 싶었더니.’
워낙 이자들이 도를 넘는 사고를 치니 건질 것도 없었다. 먹음직스러운 미끼가 아니라 썩어 빠진 음식물 쓰레기였다.
“난동을 부린 자들은 앞으로 수도의 출입을 금한다. 다시는 황실 주최의 공식적인 연회에서 얼굴을 비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헉.”
“폐, 폐하!”
충격적인 판결에 난리를 치던 북부 출신의 귀족들이 명을 철회해 달라 애걸복걸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닥치고 떠나가거라. 짐의 분노를 더 키우지 말고. 지하 감옥에 갇혀야 정신을 차리는 것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