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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45화 (46/166)

45화

“가지고 싶은 것이라니, 그게 무슨…….”

‘어느 가문의 아이인지는 몰라도 서둘러 보내야겠군.’

아슬란이 당혹스러워하는 틈을 타 아벨이 요요한 미소를 지으며 검붉은 눈동자를 빛냈다.

“가지고 싶은 거, 있잖아. 내 눈을 보면서도 정말 떠오르는 것이 없어?”

거리낌 없이 반말을 사용하다니. 어린아이의 버릇없음을 꾸짖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붉은 눈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검붉은 눈 속에는 사람을 홀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게 정말 사람이 맞는가?’

북부를 수호하며 얻은 경험은 아슬란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이 아이를 무시하고 지나치라는 직감이 그를 뒤흔들었다.

“있지? 당신에게도 욕망이 있을 테니까.”

“…….”

그러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슬란은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꼼짝없이 아벨의 눈을 멍하니 응시했다.

부끄럽게도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떠오르는 것은 하나였다.

‘루스벨라.’

데벤테르가 아니라 윈체스터의 성을 단 루스벨라를 보고 싶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치부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 사실을 숨기려는 그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여 목소리를 내었다. 대답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제대로 마주하고 싶다…….”

아슬란은 루스벨라를 보고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재회한 후로 수런거리기 시작한 마음의 정체를 캐내고 싶었다.

‘제발.’

억지로 말을 꺼내게 만들어서 그런지 아슬란의 발음이 어눌하고 질질 끌렸다.

“그게 누구지?”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기회를…….”

“누구냐니까, 네 사정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고.”

아벨은 짜증을 냈다. 그는 화를 풀려고 아슬란의 다리를 발로 걷어찼다. 어린아이의 발길질답지 않게 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슬란에게 걸린 세뇌는 풀리지 않았다.

‘저게 내가 찾는 대체품과 엮여 있는 사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러니 아슬란을 이용하기에는 제격이지 않냐는 판단이 서서 아벨에게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루스벨라…….”

“루스벨라? 아하.”

아벨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슬란의 뺨을 어린아이를 대하듯 토닥이기도 했다. 온화한 손짓이어도 명백한 조롱을 담고 있었다.

그러다 아벨은 사납고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간악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어리석은 인간이라니까. 하늘은 뭐 하나 몰라. 나에게 이런 기회나 가져다주고.”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얼마나 얄팍한지도 모르면서 연연하는 꼴 좀 봐.

아벨이 창밖의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밤하늘은 검고 어두워 깊은 바다와 같았다. 낮의 밝고 푸른 하늘과는 전혀 다른 어둠을 담고 있어서, 아벨은 밤하늘이 좋았다.

만물이 새카맣게 물드는 시간이 좋았다.

톡톡, 재차 아벨이 아슬란의 뺨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루스벨라를 네게 주겠다 약속하면, 내가 대체품을 얻도록 도와주겠다 약속할 수 있나?”

“약속……?”

“응. 약속.”

나에게 충성하는 종이 되어 내 명을 수행해 줄 귀여운 장기말이 되어 주는 영광을 줄게.

“약속을…… 들어주면…… 그녀가…… 나를 돌아봐 주나?”

‘내가 왜.’

너 같은 것을 위해 그런 수고까지 들이겠어?

장기말은 장기말일뿐, 아벨은 약속 따위는 지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단물만 쪽쪽 빼먹고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바로 버리는 것. 아벨은 언제나 그것을 전제로 두고 움직였다.

“그럼. 들어주고말고. 그녀가 다시 네 곁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마.”

겉으로는 마음이 녹아내릴 만큼 달콤하게 굴고, 속으로는 인간의 결핍을 비웃어 주자.

아벨에게 거짓말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죄악이었다.

“그러니 너도 날 도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도와줘야지? 응?”

통통하고 작고 뽀얀 손이 아슬란에게 내밀어졌다. 푸른 기운이 내뿜어지는 팔찌가 끼워진 팔이었다.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세뇌당한 아슬란에게는 그 단어만이 남아 의식을 휘젓고 있었다.

“어서.”

아벨이 가만히 있는 아슬란을 재촉했다. 작은 손가락이 까닥이며 그가 수락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손을 잡으면 그녀가 내게로 올 수 있다고…….’

머릿속이 안개로 덮인 것처럼 혼곤했다. 아이에 대한 기묘한 믿음이 아슬란을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서로 얼굴 보는 일이 없기를, 이제는 간절히 바랍니다.]

[우린 끝났어요.]

적힌 글씨로도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관계가, 식어 버린 그녀의 사랑이,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말하고 있었다.

편지를 봤을 때 느낀 절망을 없던 일로 할 수 있다면, 루스벨라가 돌아올 수 있어서 이 고통도 끝난다면.

아무렇지 않은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아슬란이 손을 잡으려는 찰나였다.

그의 머릿속에 벼락같은 노성이 울렸다.

[붙잡으면 안 된다! 저건 악마야! 널 현혹시키려는 악마야! 잡지 마라, 눈을 떠!]

‘뭐지?’

안개가 걷혔다. 아슬란의 의식을 집어삼키려던 밤이 지나고 낮이 왔다. 부추겨지던 그릇된 욕망이 푹 꺼지고 시야가 밝아졌다.

아벨의 손을 잡으려던 아슬란의 손은 저절로 되돌아갔다.

‘내가 왜 이 꼬마에게 시선을 맞추고 있었지?’

무릎은 또 왜 꿇었고. 아이와 대화를 나누다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즉시 정신을 차린 아슬란이 아벨을 꾸중했다.

“영식. 어른에게 반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영식이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피해가 가는 것은 영식의 부모님입니다.”

“…….”

“영식의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아슬란은 아벨에게 충고를 남기고 갔다. 아벨은 입술을 앞니로 잘근잘근 깨물다 불쾌함을 이기지 못하고 유리창 하나를 힘을 사용해 깨버렸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창틀의 유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세뇌가 잘 통하지 않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건 하나의 경우밖에 없었다.

‘그게 북부로 기어들어갔구나?’

어쩐지 찾기가 힘들더라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저게 배신자의 핏줄일 줄은 몰랐네……. 하하.”

다음번에 보게 되면 더 강한 세뇌로 의식을 아예 억누르는 게 좋겠어.

아벨이 유리 조각을 밟으며 음산한 표정을 지었다. 뿌드득 소리를 내며 유리가 가루로 뭉개졌다. 소년은 다치지 않았다.

“이것들이고 저것들이고 전부 짜증 나. 어서 대체품을 가지고 돌아가고 싶어…….”

완전해지고 싶어.

혼잣말을 내뱉으며 아벨은 다시 어두운 곳으로 사라졌다.

“에그머니나. 이게 무슨 일이야?”

뒤늦게 현장을 목격한 시녀만이 울상이 되어 유리 조각을 치워야 했다.

***

한편, 무도회장에서는 한 무리를 중심으로 웅성거림이 일고 있었다.

“봤어? 데벤테르 후작과 후작 부인…….”

“소문이랑은 전혀 다르잖아. 어떻게 된 거야!”

“나, 나도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해서 듣게 된 거지. 잘 몰라.”

무리의 구성원들은 북부에서 내려온 귀족들이었다. 건국 기념일 연회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 온 영애나 영식이 많았다.

그들은 한껏 차려입고 와서는 연회를 즐길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그’ 여자가…… 아니, 후작 부인이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니 얼이 빠졌다.

‘그것도 사람들의 선망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

수도에도 루스벨라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는 상태였기에 북부 출신의 귀족들의 충격은 더욱 컸다. 그들 역시도 루스벨라에게 부러움과 질투를 느꼈기에 더욱 그랬다.

데벤테르 후작인 데니스는 정략결혼을 했음에도 루스벨라를 소중히 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입고 온 드레스와 걸친 장신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또 소박맞아서 얼굴도 못 들이밀 줄 알았는데.’

그들이 알고 있던, 괴롭혔던 초라한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루스벨라는 윈체스터 공작과 눈을 마주쳤어도 무심히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끝냈다.

폄훼하고 조롱했으며 못나다 생각했던 사람이 예상 범주를 뛰어넘어 잘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들은 두려웠다.

‘우리에게 이제 보복하는 거 아니야……?’

루스벨라가 가진 것은 이제 사랑뿐만이 아니었다. 데벤테르 후작 가의 엄청난 재력은 그 자체로 힘이었다.

그녀를 경멸했던 북부 귀족 따위는 우습게 짓밟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북부에서 한가락 한다 해도 수도 귀족에 미칠 바는 못 되었으니까.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납작 엎드려 있어야 하는 때 같은데.”

“쉿. 어떻게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요? 자존심이 있지…….”

마지막은 아슈라 윈블의 말이었다. 아슈라는 자신들의 행적을 되짚어 가며 떨고 있는 자들에게 코웃음을 날렸다.

“설마 그 여자가 다시 연회장에 들어오면 쪼르르 달려갈 건 아니죠?”

“그건…….”

“상황이 좀 바뀌었다고 해서, 그 여자가 예전에 공작님께 애정을 구걸했던 사람이란 게 변하지는 않잖아요? 여러분?”

우린 그때 최선을 다한 거예요. 루스벨라가 후작 부인이 되기 전에 흉하고 주제도 모르던 일을 정당하게 ‘처벌’한 거라고요.

정당한 처벌이라는 소리에 북부에서 온 귀족들은 조금씩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들만의 알량한 정의가 찔끔찔끔 기어 나오던 양심을 부드럽게 짓눌렀다.

“그, 그래도 공작님도 사과를 하고 싶다고 후작 부인께 뜻을 전하지 않았어요?”

그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한 영애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슈라가 그 영애를 쳐다봤다. 푸른색 귀기가 눈에 번뜩였다.

“그래서, 다들 공작님이 그 여자한테 사과하는 거 봤어요?”

“……아직 못 하신 걸 수도 있잖아요.”

아슬란의 보좌관이 술을 마시고 입을 싸게 털었던 탓에 웬만한 북부의 귀족들은 아슬란이 사과를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그가 오늘을 기회로 루스벨라에게 다가가려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아슈라는 그들을 비웃었다.

“공작님처럼 명예가 중요하신 분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리한 곳에서 사과를 논할 수 있겠어요? 설령 하시고 싶어 한들, 우리는 그것을 막아야 해요.”

공작님은 북부를 대표하는 분이시니까, 공작님의 추락은 우리의 추락이에요.

아슈라의 말은 고집스럽고 억지스러웠다.

하지만 푸른 기운에 잠식된 아슈라의 말은 믿고 싶은 마음을 일게 했다. 흐릿해진 초점의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맞아…… 우리는 잘못한 게 없어.”

“그 여자가 먼저 우리에게 잘못했잖아. 공작님의 약혼녀 자리는 과분한 것이었는데.”

“부러울 만큼 잘살게 되니까 태도 바꾸는 것 좀 봐. 공작님과 결혼했어도 그랬을 거야…….”

아슈라의 말을 들을수록 자기 합리화가 쉬워지고, 양심이 찔리는 일은 줄어들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안온함에 계속 젖어 있고 싶었다.

우리는 잘못하지 않았어.

우리에게 죄책감을 주려는 그 여자가 나빠.

“그 여자가 나쁜 거야…….”

시켜 놓은 말만 반복하는 인형처럼 그들은 그 말을 되뇌었다.

아슈라는 그 모습에 흡족해하며 등을 떠밀었다.

“자, 여러분. 찔릴 것 없는 우리는 이제 그럼 ‘진짜 파티’를 하러 가요.”

“진짜…… 파티…….”

“그 여자, 루스벨라가 돌아오면…… 우리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 것에 대한 ‘처벌’을 내려 주는 거예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예전처럼. 잘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좋아요…….”

거부할 수 없는 속삭임이었다. 아슈라 역시 제가 한 말에 고무되어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것이 누군가의 조종에 의한 부추김인지도 모르고, 아슈라는 뿌듯해하고 있었다.

“망신을 주는 거예요. 여러분. 전과 같은 상황에 놓이면, 그 여자의 한심한 모습이 다시 드러날 거예요.”

아슈라는 웃었다. 그녀도 이용당하기만 하고 버리는 패인 줄은 모르고서, 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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