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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44화 (45/166)

44화

불꽃놀이가 데니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작되었다. 형형색색의 불꽃이 하늘을 곱게 수놓았다.

“소원! 소원을 빕시다!”

귀족들이건 평민들이건 가리지 않고 이 시간에는 저마다의 소원을 빌었다.

행복하고 평화로워야 할 시간에 루스벨라는 인생을 살면서 가장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전이…… 나를 죽인다고요? 나를?”

왜? 어째서? 무슨 명분으로? 어떤 자격을 가지고?

그녀는 제가 신전에 무슨 잘못을 했나, 하고 기억을 뒤져 봤지만 걸리는 것은 없었다.

신의 자애와 교리를 전파하고 마음의 안정을 기도하는 신전이 그녀를 해친다니.

‘나를, 죽일 거라고……?’

“말도 안 돼.”

“제 이야기를 못 믿으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데니스는 루스벨라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떨리는 손끝을 보았다. 안타까움에 손을 잡아 주고 싶었지만 참고 물러섰다.

그녀는 지금 다가가면 부스러질 것처럼 연약해져 있었다. 데니스가 손을 잡으면, 시든 꽃의 꽃잎이 갈라져 부서지듯 무너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진실을 말해야 했다. 그녀가 원했으니까. 그가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으니까.

세상이 아름답기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느 진실은 어이하여 알고 싶지 않을 정도로 추악하고 더러울까.

“이게…… 이게 정말 진짜라고요?”

“애석하게도 진실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믿고 싶지 않은 것은 나였습니다.’

말하지 못하고 삼킨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부리는 투정 같은 이기심이었으므로.

그의 마음을 알아 달라고 떼를 쓰면 그는 그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혐오가 치밀 것이다.

“……알려 주지 않은 이유가 있었군요.”

“제가 아니라 신과의 약속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절대 믿을 수 없었겠죠.”

‘그의 말이 옳아.’

그들이 처음 만난 결혼식 날에 이런 비밀을 털어놨다면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을 것이다.

루스벨라는 결혼식 직후에 도망쳤을 자신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신전에 의해 살해당했겠지.’

그녀는 행운아였다. 데니스가 시간을 거슬러 올 수 있기에 얻은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렇지만 충격의 여운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잠시만, 혼자 있을 수 있게 해 줄래요? 너무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서.”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엉켰다. 믿기 힘든 소리를 들은 여파인지 루스벨라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마터면 맨바닥에 쭈그려 앉는 불상사가 일어날 뻔했다.

“혼자는 위험해요. 당신을 노리는 자가 언제, 어디에서 나올지 모릅니다.”

데니스가 다급하게 그것만은 안 된다고 그녀를 만류했다.

“하지만 방금 전에는 5년 후에 내가 살해당한다면서요?”

아직 시간이 남은 것이 아닌가. 루스벨라는 데니스의 불안함이 왜 벌써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제가 가만히 있었다면 그랬겠지요.”

“아.”

그러고 보니 예언 속의 ‘원래’ 미래에서는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결혼하지 않았다고 했었다.

“신의 예언을 받은 저의 개입으로 이미 미래의 향방은 어그러졌습니다.”

미래에 대한 향방을 알기는 어려워졌어요.

“좋은 쪽으로 향하도록 만든 것이지만.”

“그렇다면…….”

“대신 당신에게 해를 가할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으니,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당신 옆을 계속해서 지켜야 합니다.

데니스의 여유로운 웃는 얼굴 아래에는 초조함과 절박함이 숨어 있었다.

‘신이 이런 조건을 그냥 걸었을 리가 없어.’

루스벨라를 불행한 죽음으로 이끈 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

그때 그녀에게 자신이 본 미래에 대한 정보를 노출할 수 있는 것은 신이 계획한 장치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지켜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래서 당신을 혼자 둘 수 없어요. 경계하는 인물들이 있으니, 혼자는 위험합니다.”

“……거죠?”

“네?”

“왜 나를 지키기 위해 당신의 시간을 쓰고 있는 거죠?”

루스벨라는 그것이 궁금했다. 데니스가 굳이 그녀를 구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당신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결혼의 형태로 묶이지 않아도 되었잖아요. 예언이 마음에 걸린다 해도,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맞추려는 것처럼…… 하지 않아도 되었어요.”

결혼식 전날, 파혼당하던 순간에 그토록 찾던 신은 없었다. 간절한 기도 따위는 이 세상에 아무 효력도 없었다.

인간의 바람은 신에게 닿지 못했다면, 반대로 신의 바람도 인간에게 닿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불경한 생각이라 하더라도 루스벨라는 그러했다.

“예언을 수행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불이익이 가도록 강제되어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내가 죽는 일을 막으면 떨어지는 보상이라도 있어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그게 뭐라고 이 남자가 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인지.

“왜 이렇게까지 날 도우려 하는 거예요? 내가 뭐라고…….”

루스벨라는 말을 더 잇기 힘들었다. 누덕누덕 기웠던 그녀의 자존감이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죽는다고.’

그런데 본래라면 아무 상관도 없을 사람이 나 때문에 같이 위험해진다고?

[당신만 아니었어도 우리는 평화로울 수 있었어!]

끔찍했던 북부에서의 시간 동안 겪은, 누군지도 모르겠는 사람의 목소리가 그녀를 뒤덮었다.

아니라고 답했지만, 그것이 현실로 일어나게 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나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어.’

그럴 바에는 나만 죽는 게 나아.

“루스벨라.”

“못 본 척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잖아요.”

‘아니야.’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나 때문에……. 당신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거잖아요.”

치맛자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뼈가 도드라졌다. 불꽃놀이의 빛 아래에서 그녀의 두려움이 하얗게 빛났다.

“당신도, 나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건…… 나는…….”

‘이 사람에게도 나는 짐이 되는 것일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팔아 치워야 할 짐이었고, 아슬란에게서는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애물단지였다.

인생에서 최초로 숨통을 트게 해 준 사람에게도 짐이 될 수는 없었다.

‘그게 나를 죽이는 결과라 할지라도…….’

데니스만은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좋은 사람이란 걸 아니까. 행복하길 바라니까.

그에게서 받은 다정의 값을 치르고 싶었다.

데니스는 무척 당혹스러운 낯을 했다.

“이런 말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제가 당신을 지나칩니까.”

당신은 내 은인이신데.

“……그것도 예언 속 미래에서 본 건가요?”

“네. 제 은인을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당신을 모른 척하는 건 도리가 아니고요.”

‘은인이라고…….’

그렇다면 데니스가 루스벨라를 결혼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까지 그녀를 보호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그녀가 이제는 사라진 미래에서 그의 은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말일지도 몰라.’

루스벨라는 아무 이유 없이 주어지는 행운을 믿지 않았지만, 데니스는 믿고 싶었다.

그녀를 위한다는 사람의 따뜻함은 놓고 싶지 않은 중독성이 있었으므로.

“그렇지만 다시 돌아온 이 생에서 내가 당신을 죽게 만든다면, 난 당신의 원수가 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겐 당신을 죽인 자들이 불구대천의 원수이니까.”

데니스가 루스벨라의 어깨 위로 자신의 재킷을 둘러줬다. 추운 날씨가 아님에도 그녀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어서.

“나는 당신에게 갚아야만 하는 빚이 있고…… 당신은 그것을 받아 주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이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없어요.

“하지만.”

“이것은 전부 제 독단이고, 제 행복을 채우기 위한 바람이니 괜찮습니다.”

새까만 하늘 위로 가장 커다란 불꽃이 터져 사방을 낮처럼 밝혔다.

“당신을 위해 나의 시간을 바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데니스는 마치 레이디를 위한 기사의 맹세를 하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손을.”

“……여기요.”

루스벨라는 그에 홀린 것처럼 오른손을 내밀었다. 데니스는 그 손등 위로 새가 부리를 쪼듯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붉은 눈동자에는 쏘아 올린 불꽃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지켜 드릴게요, 루스벨라.”

당신이 나를 ……한 것처럼.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당신만은 행복하게 만들게요.”

“……데니스.”

“그러기 위해 나는 돌아왔고, 당신이 살아 있는 이 순간순간에 살아 있음을 느끼니까요.”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는 벅찬 애정이었다.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라서, 순수하게 제 삶을 모조리 바칠 것이란 헌신적인 광기는 아름답게 그를 불태우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지키려다 당신 자신을 돌보지 않게 되는 것이 두려워.

‘죽으면 모든 게 다 끝이니까.’

그에게서 줄곧 느껴지던 위화감이 있었다. 데니스와 함께 지내면서 마음에 걸리던 돌조각이.

‘데니스는 자신을 위하지 않아.’

그의 모든 관심과 집중력은 오로지 루스벨라를 위해서만 쏟아지고 있었다.

그와 부부 같지 않은 부부로 엮이면서, 그 자신을 위한 무언가를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먹을 것이든, 갖고 싶은 것이든…….

‘바라는 것이 한 가지밖에 없는 사람처럼.’

그녀는 그것이 슬펐다. 자신을 아껴 주는 유일한 이가 자신에 대한 사랑은 몰라서.

이것 또한 신의 안배라면, 그녀는 울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웃어야 하는 것일까.

“……고마워요.”

그러나 그에 대한 연민을 입 밖으로 꺼내더라도, 이 남자는 괜찮다고만 할 것 같아서.

“대신 당신 혼자만 나를 지키려 싸우려 하지 말아요. 나도 그들과 맞서 싸우고 싶어요.”

따뜻한 그를 끌어안고 그녀를 향해 닥쳐올 불행에 대항하기로 마음먹었다.

환하던 불꽃은 사라졌지만, 어둠 속에 함께 남겨진 두 사람은 두렵지 않았다.

함께 있어 줄 사람만 있다면, 캄캄한 어둠 속이라도 반드시 길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니.

***

“루스벨라는 어디 있지?”

아슬란은 연회장에서 루스벨라가 데니스와 사라지는 것을 보고 황급히 뒤를 쫓았다.

‘어서 사과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슬란은 루스벨라의 생각은 고려하지도 않고 무작정 달렸다.

“윈체스터 공작님?”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시는 거지?”

“연회장이랑은 반대인데…….”

달라붙는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빠르게 움직였다. 조용히 해결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윈블 자작이 아슬란이 지금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았다면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채신머리도 없이 무슨 짓이냐면서.

한참을 뛰어다니던 그의 시야에 회색빛 머리카락이 스쳤다.

‘여기다!’

아슬란은 테라스 문 앞에 멈췄다. 그곳에는 그가 찾던 루스벨라가 그녀의 남편과 함께 있었다.

‘정략결혼이라고 했지.’

부부의 시간을 방해해서는 안 되었지만,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니 들어가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스…….”

이번에야말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문을 열려는 순간 아슬란은 불꽃놀이 아래에서 데니스와 루스벨라의 사이가 무척이나 돈독하다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울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데니스 때문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아슬란 때문에 울 때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다.

루스벨라는 데니스를 꼭 안아 주면서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으려고 노력했다.

아주 행복하고도 결연하게.

‘……나는 저런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이런 말을 할 주제가 못 된다는 것을 안다. 아슬란이 루스벨라와 약혼 관계에 있던 시절 얼굴을 몇 번이나 봤다고.

다른 이들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고 달려온 것 또한 예법에도 어긋나고 이상하게 보일 것 또한 알았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빠.’

다른 사람과 있는 그녀가 몹시 아름다워 보여서였을까.

그녀의 다채로운 표정을 미리 눈에 담아 두지 못했다는 게, 자신이 저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게.

‘웃는 얼굴이 예뻤구나.’

아까웠다.

아슬란이 알고 있는 건 루스벨라의 우는 얼굴뿐이었다.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약혼을 해놓고도 존재를 잊고 방치해 두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지금 지독히 후회하는 입장이 되어 테라스 문을 열지도 못 했다.

저 문을 열면, 그림 같은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는 악역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아서.

그가 철저히 외부인이라는 주제 파악을 하고 있어서.

‘도저히 마주할 수가 없다.’

졸렬한 질투심이 잡초처럼 돋아났다. 제 잘못으로 놓친 사람이 아깝고, 아깝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혐오가 구역질처럼 나왔다.

“루스벨라, 왜 그래요?”

“저기에 누가 있던 것 같았는데…….”

‘흠.’

“아무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으니까…….

패배해서 꼬리를 말고 영역을 포기하고 사라지는 늑대처럼.

“아얏!”

정신없이 도망치다 아슬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 상대는 저만치 굴러갔다.

“괜찮나?”

“네. 괜찮아요…….”

어린 소년이었다. 도련님다운 빳빳하게 다린 옷차림을 보고 아슬란은 그가 어느 귀족 영식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하다. 내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일어날 수 있겠나?”

“괜찮아요. 다치지는 않았으니까.”

어른스러운 어린아이였다. 백색의 머리카락이 흔하지 않아서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몰라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공작님.”

‘나를 알고 있군.’

“가지고 싶은 거, 있지 않아요?”

소년, 아벨의 눈동자가 기이한 눈빛을 번쩍이며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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