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건국 기념일을 올해도 축하하러 온 그대들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네.”
황제가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하고 미소 지었다.
“본격적인 연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작위 수여식의 시간을 잠시 가지겠네.”
건국 기념일은 제국의 탄생을 축복하고 황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날이었다.
또한, 제국에 속한 귀족들의 황제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연회 시작 전에는 새로이 작위를 받게 된 귀족들을 위한 의식을 치렀다.
“호명되는 분들은 앞으로 나오십시오.”
시종장의 말에 따라 낮은 작위를 가진 자들부터 순서대로 황제의 앞으로 나섰다.
황제는 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신하를 위해 황실의 보검을 왼쪽 어깨에 대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
“그대의 마음에 충성이 있는 한, 제국의 신께서 그대를 보호할 것이다.”
이 의식을 치르지 않는 자는 적합하게 작위를 계승했다고 볼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서 작위 수여식을 치른 이들의 얼굴은 밝았다. 정통성을 황제에게 인정받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은 없었으니까.
‘그도 설레고 있으려나?’
루스벨라가 데니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데니스는 평온했다. 그에게서는 긴장이나 기대감을 엿볼 수 없었다.
힘들게 핍박받던 시절을 이겨 내고 마침내 후작의 자리를 쟁취한 사람이라고 보기엔 너무 담백한 태도였다.
“데니스.”
“네. 루스벨라.”
“당신은 기쁘지 않아요?”
“뭐가요? 당신과 함께 연회에 온 것이?”
“아니요. 작위를 공식적으로 수여받는 것에 대해서요. 당신이 노력한 과정이 치열했는데, 어쩐지…… 관심이 없어 보여서요.”
“아아.”
데니스는 초연했다. 루스벨라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의 인생에서 걸림돌은 이제 없을 텐데.’
이까짓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눈빛이었다. 먹이를 잡으려고 숨을 죽이는 매처럼,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 보였나요?”
“조금요.”
루스벨라는 솔직하게 답했다. 데니스는 살며시 웃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 때문에 그래요.”
“상선에 문제가 생겼나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음…… 당신이 내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간절히 바란 것처럼, 나 또한 그런 종류의 소망이 있거든요.”
그의 몸은 이곳에 있어도 있는 게 아닌 것 같이 아득한 눈을 했다.
“내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어요.”
‘그게 뭘까.’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양파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알 것 같다가도 굉장히 멀리 있는 사람처럼 거리가 느껴졌다.
‘그 약속은 누구와 한 걸까.’
‘나는 그가 원하는 것을 도울 수 없는 것일까?’
데니스는 받지 않고 루스벨라에게 퍼 주기만 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염치없는 인간이 되기는 싫었다.
“데니스.”
“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말해 줘요. 나도 당신을 돕고 싶어요.”
그러자 데니스는 특유의 살가운 웃음을 지었다. 많이 보던 웃음이었다.
“루스벨라가 도와줄 일이 있긴 해요.”
“뭔가요?”
그녀는 내심 기뻐했다. 그녀도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그런데 데니스는 이상한 말을 했다.
“살아 주세요. 루스벨라.”
“네?”
“멀쩡하고, 건강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가장 큰 미련인 것처럼, 그렇게.”
“그게 무슨 소리…….”
이해할 수 없었다.
데니스의 평정은 그녀에게 살아 달라고 부탁했을 때 잠깐 깨져 틈을 보였다. 그의 표정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가 간신히 엄마를 찾은 것처럼 한없이 절박해 보였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데, 이상하게 눈가를 닦아 줘야 할 것처럼 우는 것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나는 죽을 생각이 없는데?’
그런데 그는 그녀가 모든 것을 놓기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했다.
데니스는 양파처럼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존재였다. 양파의 가장 안쪽 살이 품고 있는 것은 알쏭달쏭한 수수께끼였다.
자세히 알려 달라고 하기도 전에 시종장의 외침이 들렸다.
“새로운 데벤테르 후작, 데니스 데벤테르는 앞으로 나오십시오!”
가장 마지막 순서가 되었다. 데니스는 황제의 앞으로 나섰다.
“데벤테르 후작은 이리로 나오게.”
“예. 폐하.”
데니스도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의식을 치렀다.
“그대의 마음에 충성이 있는 한, 제국의 신께서 그대를 보호할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그리고 그대에게는 한 가지가 더 남았지.”
“하문하십시오.”
황제가 푸근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지으며 데니스에게 속삭였다.
“어떻게 후작에게서 인정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짐이 데벤테르 후작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
“그대의 충성은 선대보다 더 높음을 증명하기를 바라네. 자네가 작위를 선대에게 받은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자들이 많거든. 그들을 잠재우려면…… 후한 성의를 표하면 어떻겠나?”
많이 가진 만큼 베푸는 정도도 커야 하지 않겠나.
‘속이 다 보이는군.’
황제는 이 어린 후작이 당황하거나 곤란해하길 바랐다. 데벤테르 후작가는 애송이에게 주어지기엔 너무 탐나는 돈의 샘이었다.
그러나 데니스는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신전에 내는 헌금을 끊었으니, 국고로 들어갈 데벤테르 가의 세금은 더 많아질 것입니다.”
“헌금을 왜……?”
‘세율을 낮춰 주기 때문에 귀족이라면 반드시 헌금을 자발적으로 내는데.’
황제의 아리송함을 데니스는 풀어 줄 생각이 없었다.
“신이 불성실하기 때문이라 치지요. 끝났다면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그러게.”
데니스가 다시 루스벨라의 곁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황제는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젊지만 속이 안 보이는 능구렁이군.’
갇혀 살아서 아무것도 분간 못 하는 망나니일 줄 알았는데. 도발해도 영 반응이 없는 것이 싱거웠다.
‘쯧.’
수확이 없으니 괜한 수고를 들였다.
“그럼, 모쪼록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라겠네.”
황제가 옥좌에 착석한 이후 황태자가 시종장에게 신호를 줬다. 시종장이 악단을 향해 손을 젓자 연회장을 풍성한 악기의 선율이 메웠다. 첫 춤곡이었다.
모인 사람들이 삼삼오오 파트너와 짝을 지어 춤을 췄다.
“루스벨라, 제게 첫 춤의 영광을 주시겠어요?”
데니스가 루스벨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기꺼이.”
루스벨라는 그의 손 위에 그녀의 손을 얹고 홀로 나아갔다. 그들은 홀의 정중앙에 근접한 곳으로 향했고, 앞에 있던 사람들은 알아서 길을 비켜 주었다.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음악은 감미롭고 잔잔했다. 사람들이 박자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춤을 추는 남녀 한 쌍이 밀접하게 붙어야 하는 곡이 흘러나왔다. 이를 틈타 루스벨라가 데니스에게 물었다.
“아까 폐하와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세금이 더 필요하신 것 같더라고요.”
‘데니스를 얕잡아 본 거구나.’
젊은 나이에 승계를 이어받은 귀족은 흔치 않았다. 일전에 마차에서 했던 말대로 황제는 그가 실수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어차피 신전에 내는 헌금을 끊어서 더 낼 텐데.”
“헌금을요? 왜요?”
귀족들이 신전에 헌금을 내는 이유는 세율을 낮추는 이익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귀족들도 인간이었다. 과거에 흔들리고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
그런 인간에게 신은 기댈 수 있는 소중하고 위대한 존재였다. 때문에 귀족들은 신실함을 증명하기 위한 가장 쉬운 수단으로 헌금을 선택했다.
‘신이 가문을 돌봐 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내는 것이 헌금인데…….’
데니스는 그것을 끊어 버렸다고 했다.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듯.
“데니스.”
“네. 루스벨라. 턴 할 거예요.”
데니스가 루스벨라의 허리를 붙잡고 가볍게 빙글 돌았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아요?”
“아니요. 저보다 신을 믿는 사람은 이 제국에서 만날 수 없을걸요.”
그런데 왜?
“신전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요? 혹시 선대와 관련이 있다든가…….”
“선대와 관련은 없어요. 신전에 원한이 있는 건 맞지만.”
자세가 다시 역동적으로 변했다. 루스벨라와 데니스는 입을 맞출 것처럼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빠른 스텝을 맞췄다.
“난 신이 존재한다고 믿어요. 루스벨라.”
‘신을 믿는다면 신전에 헌금을 끊을 까닭이 더 없지 않나?’
“저는 믿지 않는데,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신이 있기에 내가 당신의 곁에 지금 서 있으니까요. 가장 최선의 방향으로.”
“네?”
“제게서 비밀을 듣고 싶다고 하셨죠?”
데니스가 슬픈 미소를 걸치고 춤을 핑계 삼아 그녀를 끌어안았다.
‘심장 소리가…….’
“루스벨라. 루시. 나의 벨라.”
데니스는 빠르게 맥동하는 심장을 가지고 루스벨라의 애칭을 불러댔다.
“저는 당신의 죽음을 막으라는 신의 예언을 받았습니다.”
“……뭐라고요?”
“저는 당신과 결혼하기 6개월 전에 제게 내린 예언이 있습니다. ‘루스벨라 지펠론’을 지켜라. 음험한 세력으로부터 안전하도록.”
루스벨라는 너무 놀라서 세상에 그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음악도, 찬연하게 빛나는 샹들리에도 잠시 그녀의 세상에서 사라졌다.
‘……나를 지켜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 일어난다고?’
“당신은 사제가 아니잖아요. 어떻게…….”
데니스가 사제라는 말을 듣자 얼굴을 찡그리더니 말을 이었다.
“사제라……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야 할 것 같군요. 현재의 사제들은 예언을 받지 못합니다.”
“그게 정말이에요?”
“네. 제가 이 사실을 말할 수 없던 건, 나를 지옥 같은 시간에서 건져 준 신과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약속을…….”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 자들이 모이는 때에 입을 열 수 있도록 허락했거든요.”
‘머리가 어지러워.’
“잠깐, 잠깐만요.”
충격에 빠진 루스벨라는 몸을 휘청였다. 데니스는 춤곡이 끝나자 그녀를 데리고 테라스로 이동했다.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자 두통이 조금 가셨다.
“나를…… 불행하게 만들 사람들이라고요?”
“네. 당신의 미래를 망치려는 사람들이요. 예언이 막아야 한다는 자들을.”
루스벨라는 혼란스러웠다.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들이라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명확하게 있긴 했다.
“설마 내 아버지인 지펠론 백작과 전 약혼자였던 윈체스터 공작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
말하면서도 정말 그들이 그녀를 해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제는 출가외인인 나를 아버지가? 그리고…… 공작이 뭐가 아쉽다고?’
“그들도 포함된 일이긴 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길래……. 아.”
루스벨라는 작위를 수여받기 전에 데니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살아 주세요. 루스벨라.’
‘멀쩡하고, 건강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가장 큰 미련인 것처럼, 그렇게.’
그 말이 이런 뜻이었나.
“내가…… 오늘 이곳에 모인 어떤 사람들 때문에 살해당하나요?”
“네. 그렇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간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두려운 것이 삶이었다.
‘그런데 내가 죽음을 예고 받다니.’
“난, 나는, 오늘 죽는 건가요?”
두려움이 온몸을 삼켰다. 연회장에 들어와서 그녀가 받았던 선망과 호의 섞인 시선과 대화가 전부 꿈인 것 같았다.
아니면 질 나쁜 장난 같았다. 다시 안정을 찾고, 행복의 궤도에 올랐을 때 추락시키는 것이.
“루시, 당신이 오늘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언제인가요.”
힘없는 목소리가 목에서 새어 나왔다.
“……이거 거짓말이라고 해 주면 안 돼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을 놀라게 하려고 준비한 장난이라고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거짓이 아니야.’
데니스가 그녀를 속일 이유도 없었고, 말하는 그의 태도와 진실한 눈빛만 봐도 알았다.
무엇보다 데니스는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말을 꺼내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사람처럼.
“예언 속에서, 당신은 지금으로부터 6년 후의 가을에, 데벤테르 후작 저에서 죽게 된다고 하더군요.”
“예언 속의 미래에서도, 나와 당신은 결혼한 사이였나요?”
그렇다면 데니스가 루스벨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음을 설명할 수 있었다.
“아니요. 우리는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자세한 사항까지는 나오지 않아서 모릅니다.”
“그럼 왜 당신은 나와 결혼을…….”
“이게 내가 당신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안전한 방법이었으니까요.”
데니스가 쓴웃음을 삼켰다. 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결혼이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녀를 위해 더 좋은 방법을 강구하지 못해 미안했다.
‘그렇지만 나라는 사람이 빚어낼 수 있는 가장 찬란한 미래가 이것이었어.’
루스벨라를 노리는 자들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을 지닌 가문에 소속시킬 필요가 있었다.
지펠론으로는 부족했다. 그곳에 그녀를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가능성이 데니스가 직접 데벤테르 후작위를 물려받아 그녀와 결혼의 형태로 엮이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당신은…….
“신전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했습니다.”
하늘에서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환희를 부르는 불꽃 아래에 비친 달은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게 이지러져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