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건국 기념일 연회의 시작은 저녁부터였다. 낮에는 황제의 연설을 듣고, 제국민들을 위해 화려한 퍼레이드를 기획해 수도를 빙빙 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해가 지고 난 후, 밤이 되면 그때부터가 진정한 건국 기념일의 시작이었다.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연회가 열렸으니까.
1년에 한 번 열리는 가장 성대한 무도회는 귀족 남녀들의 만남의 장이었다.
‘이번에는 괜찮은 결혼 상대자를 찾아내고야 만다……!’
웬만한 귀족들은 다 참여하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고위 귀족은 대부분 공신 가문이거나 유력한 세력을 가진 자들이라 충성을 확인하기 위해 수도에 모였다.
권력의 선 바깥에 있는 하위 귀족들은 그 고위 귀족들과 연을 맺기 위해 모여들었다. 자식이 눈에 들기를 바라고, 부모는 괜찮은 인맥을 손에 넣기 위해서.
‘그런데 이번 연도는…….’
예년과 다르게 귀족들의 이목이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거 들었어요? 참석자 명단에…….”
“데벤테르 후작 가의 장남이 작위를 이어받아 온다면서요? 그, 미친 찻잔 있잖아요.”
“그리고 그 부인인 사람이 누군지 다들 알죠?”
“북부의 윈체스터 공작의 약혼녀였던 그…….”
쑥덕거림은 커져 갔다. 뿌려놓은 기름에 불을 붙이듯이 사람들은 관심의 크기를 키웠다.
‘잘하면 삼각관계에 놓인 치정극을 볼 수 있겠어.’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귀족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그들 셋 사이에 무슨 일이 터지기를 바랐다.
“북부에 퍼진 소문으로는 데벤테르 후작과 후작 부인의 사이가 안 좋다던데.”
“그렇다면 이번에도 파혼당한 여자는 불행하다는 속설이 맞겠지.”
어느 쪽이라도 좋았다. 그들을 즐겁게 해 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저속한 두근거림을 품고 있던 이들은 데벤테르 후작 내외가 입장하자 깜짝 놀랐다.
“후작이 저렇게 아름다웠다고?”
“후작 부인은 어떻고? 가까이하기 싫다는 영애들이 꽤 있었는데. 저건…….”
“……누가 사이가 안 좋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루스벨라와 데니스는 디자인과 색을 맞춰 입은 채,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오고 있었다.
그들이 걸친 옷에서 은은하게 나는 푸른 광택은 그야말로 귀족의 푸른 피 그 자체 같았다.
“조심하세요, 부인.”
후작은 후작 부인을 깃털처럼 소중히 대하며 에스코트를 하고 있었다.
연회장에 모인 귀족들은 잠시 그 두 사람에 집중하느라 숙연해졌다. 그들이 보기에 루스벨라는 이 연회장에서 제일 반짝였다.
단순히 질 좋은 드레스와 값비싼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랑받고 있구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미소하며, 예전과 다른 꼿꼿한 자세.
파혼당한 귀족 영애는 반드시 불행해진다는 속설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
“데벤테르 후작이신 데니스 데벤테르와 그 부인이신 루스벨라 데벤테르께서 입장하십니다!”
‘떨려.’
입장을 외치는 황궁의 시종이 입을 떼기 전까지 루스벨라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좋은 기억이 없는 연회. 그녀가 불행할 때의 일을 유희 거리로 소비했던 귀족들.
‘그 앞에 서야 해.’
당당한 모습으로, 과거의 일 따위는 잊었다는 것처럼.
잊지 않았고, 발버둥 쳐서 딛고 일어난 것이었지만.
“괜찮아요, 루스벨라.”
“데니스.”
“오늘 당신은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빛나는 사람이에요.”
자신감을 가져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데니스가 말해 주니 루스벨라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준비는 완벽했다. 그리고 그녀가 기죽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해서 들어간 연회장에서 가장 먼저 맛본 것은,
‘내가 아슬란을 보던 시선이야.’
경멸과 무시가 아니라 선망과 부러움의 시선들이 그들을 향하고 있었다.
……질투까지도 합해서.
고요 속에 잠시 잠겼던 연회장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다이애나와 엘렌이 루스벨라에게 다가서면서 시곗바늘이 다시 움직였다.
“세상에. 루시! 오늘 정말 예쁘다!”
“고마워, 다이앤.”
엘렌이 루스벨라에게 소곤거렸다.
“다들 널 눈여겨보고 있어.”
“나도 알아.”
루스벨라의 드레스는 진한 푸른색이었고, 어깨는 과감하게 드러낸 A라인이었다.
닐라는 새로운 것을 도전하기를 좋아하는 디자이너였다. 루스벨라도 자신이 달라졌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 했고, 실행에 옮겼다.
‘정숙한 드레스로, 그것도 목까지 단추가 꽉 다 차는 것들만 입으셨다고요?’
‘네. 그게 아버지의 방침이었거든요.’
‘그렇다면 새로운 이미지를 박히게 만들려면 완전한 탈바꿈이 필요하겠네요.’
그렇게 해서 제작된 드레스를 입기 잘한 것 같았다.
“저어, 후작 부인. 실례지만 그 드레스, 어디에서 만든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저도 차고 계신 장신구를 묻고 싶어요!”
옷차림새에 관심이 많은 부인과 영애들이 루스벨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유행에 민감한 그들은 루스벨라가 입은 새로운 디자인을 탐내고 있었다.
“로벨리아 의상실의 닐라에게 주문한 옷이에요.”
“그곳은 예약 대기자만 해도 족히 서른은 넘을 텐데…….”
“연락을 넣으니 바로 와 주더라고요.”
루스벨라의 말에 여인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루스벨라가 입고 찬 모든 것이 닐라의 작품이라면 세련되기로는 아무도 따라갈 수 없을 터였다.
‘세상에. 후작 부인만 낄 수 있다는 반지야!’
‘데벤테르 후작 부인에게 줄을 잘 서야겠어.’
이런 속물적인 생각도 들어가 있는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이 루스벨라를 둘러쌌다.
“잠시.”
데니스가 점점 늘어나는 사람들 사이로 손을 뻗어 다가오는 것을 제지했다.
“제 부인께서는 너무 지나친 관심은 사양하시는지라.”
“아, 네, 네.”
결혼식의 일로 데니스의 외모는 유명해졌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욱 파괴적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제 부인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거든요.”
‘아…….’
둘의 사이가 좋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떨렸어.’
한순간 착각에 빠질 만큼, 데니스의 연기는 자연스러웠다.
‘정신 차려야 해.’
“괜찮아요. 데니스. 되도록 많은 분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루스벨라도 보란 듯이 장단을 맞춰 데니스의 품에 살짝 기대며 달콤하게 말했다.
“어머나.”
“두 분이 사이가 정말 좋으신가 봐요. 역시 신혼이시라 그러신가?”
“부러워라.”
젊고 잘생긴, 작위도 높은 남편. 애정이 떨어지는 눈빛. 신경을 잔뜩 쓴 태가 나는 고가의 드레스.
어딜 봐도 불행은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루스벨라.
‘데벤테르 후작 가의 안주인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했구나.’
귀족들은 머리를 굴렸다. 데벤테르 후작 부인은 아직 사교계에 세력을 구축하지 못했다.
데벤테르 후작 가의 부는 그 자체로 사람을 꿀을 본 벌떼처럼 다가오게 만든다. 지금이야 세력이 없을 뿐, 이 시기에 잘만 친밀한 관계를 구축해 놓으면 떨어질 콩고물이 눈에 선했다.
‘내가 먼저 더 잘 보여야 해!’
계산은 빨랐고 움직이는 것은 그보다 더 신속했다.
“후작 부인, 오늘 연회가 끝나면 살롱으로의 초대장을 보내 드려도 될까요?”
“저희 집도 초대장을 보내고 싶어요!”
“영지에서 나는 맛 좋은 과일들이 있는데, 선물로 드려도 될까요?”
호의를 사려는 말들이 파도처럼 루스벨라의 앞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보내 주시면 고맙죠. 시간이 된다면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물도 고마워요.”
상냥한 미소와 차분한 태도는 소문과 완전히 달랐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왜곡된 인상이 너무 컸던 탓에 짧더라도 호감 가는 만남은 기존의 고정관념을 흔들리게 하기 충분했다.
‘전에는 왜 이런 사람인 줄 몰랐지……?’
멀찍이서 루스벨라의 예전 모습을 아는 사람들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알던 음침하고 영혼 없던 여자는 죽고 없는 것 같았다.
“우, 우리도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새로운 데벤테르 후작과 그 부인에게 잘 보여야 좋을 것 같은데.”
우물쭈물하던 그들의 귓가에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윈체스터 공작이신 아슬란 윈체스터께서 입장하십니다!”
‘왔구나.’
좌중은 다시 술렁였다. 어느 귀족들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치정극을 볼 수 있겠노라 설레고 있었다.
흑발에 새파란 눈. 강건하고 단단한 육체는 변한 것이 없어 더 입맛이 썼다.
‘멀쩡해 보이네.’
루스벨라는 아슬란을 전혀 보고 싶지 않았다. 아예 아무런 마음도 두지 않고 끊어 냈다 생각했는데.
‘아무렇지 않고 변함없는 모습을 보니 화가 나.’
그를 향한 증오가 멀리서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넘실거리고 있었다.
“루스벨라. 괜찮아요?”
“……안 괜찮을 것도 없어요. 난 내 생각보다 더…… 그가 원망스럽다는 걸 깨달아서 그래요.”
진정해야 했다. 증오도 상대에게 일말의 관심이 남아 있다는 찌꺼기 같은 감정이었으니까.
옆으로 돌렸던 고개를 똑바로 했다. 시선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루스벨라와 아슬란의 눈이 마주쳤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아슬란이었다.
‘그녀가 저렇게…… 빛났던 적이 있던가?’
아슬란은 이곳에 오는 내내 루스벨라에 관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녀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좋을지, 그러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가 미처 몰랐던 과거의 잘못들은 무엇이 있었는지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겨우 기억의 조각들을 끌어모아 만든 루스벨라는 초라하고, 우울했고, 주눅 들어 있었다.
아슬란은 죽은 눈을 한 사람이 싫었다. 그래서 루스벨라를 다시 만나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내 약혼자로 있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미소와 태도야.’
쓸모없는 돌멩이인 줄 알았던 것이 나중에 가공하고 나니 보석이었던 것처럼, 루스벨라는 찬란했다.
적어도 외견만이 화사해졌을 뿐인데, 그녀가 그의 시야에 오롯이 담겨 보였다. 가증스럽게도 그랬다.
‘그래. 이건 옳지 않다.’
옳지 않은 것은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그를 지탱하던 철칙이 아니었던가.
아슬란은 알면서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는 자신을 보았다.
“루스…….”
벨라.
하마터면 이름을 멋대로 불러 버릴 뻔할 정도로 아슬란은 충격에 빠져 있었다.
‘왜?’
그녀는 그를 이제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데.
이제 와서 무엇이 달라졌다고 그가 조급해져야 했는가.
그때였다.
“모두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육중한 왕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홀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폐하.”
윈체스터 공작인 아슬란조차 이성을 찾고 정중한 자세를 취했다.
‘폐하께서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도…….’
꼴사납게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루스벨라의 이름을 크게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아슬란이 한 생각치고는 굉장히 이상한 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등장에 신경을 쏟고 괴상한 생각을 지웠다.
“흐음.”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이 황제에게 시선이 쏠려 있을 때,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검붉은 눈이 빛났다.
붉은 눈은 아슬란을 향해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과 관련이 깊은 자여서 눈여겨봤는데, 소득이 짭짤했다.
“미련이란 게 남았던가? 저 인간부터 떠볼까.”
기억해 두는 게 좋겠어.
“미련 따위의 찌꺼기만 남은 감정을 부여잡고 있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개체지.”
깜찍한 도련님 모습의 아벨이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