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건국 기념일 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루스벨라는 착실히 초대에 응해 티 파티에 갔다.
“어서 오세요, 데벤테르 후작 부인.”
“친절히 맞아 줘서 감사합니다. 실리케 백작 부인.”
데니스는 참석하지 않았다. 부부동반 모임이 아니기도 했고, 그가 가면 다른 부인들이나 영애들이 불편할 거라고 했다.
‘친구를 만드는 게 어떠냐고 물었지만,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 루스벨라.’
데니스는 긴장으로 숨을 가다듬는 루스벨라에게 그렇게 말했다.
‘내가 주고 싶은 건, 당신이 원했지만 가지지 못했던 것들이니까……. 당신이 힘들다면 거절해도 되어요.’
난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는 거지, 더 힘겨워지길 바라는 게 아니니까.
데니스는 그 말을 하면서 어쩐지 슬퍼 보였다. 루스벨라는 아주 가끔 튀어나오는 그의 슬픈 미소를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
‘그는 날 통해서 누군가를 바라보는 걸까?’
루스벨라의 막연한 추측은 거기까지였다.
“안쪽으로 앉으세요, 후작 부인.”
“고마워요.”
푸릇푸릇한 온실 속 정원에 위치한 온실은 동화 속의 그림 같았다.
그 안의 둥근 테이블 위에는 흰 레이스 테이블보가 둘러져 있었고, 마카롱이나 다쿠와즈 등의 디저트와 정성 들여 우린 차가 보기 좋게 세팅되어 있었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맛있어요. 백작가의 대접이 훌륭하군요.”
‘잘하고 있는 걸까?’
루스벨라는 태연해 보였지만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구나.’
실리케 백작 부인, 다이애나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다이애나는 온화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녀도 루스벨라에 대한 소문을 전부 들었지만, 남편인 실리케 백작처럼 곧고 바른 사람이었다.
‘어떤 분인지는 실체를 마주해야 알겠지요.’
실리케 백작가는 데벤테르 후작 가의 가신이자 사업 파트너이기도 했다. 그들은 새로운 후작 부인의 등장에 놀라워하며 만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만난 감상은, 소문이 실제와는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것.
루스벨라는 독을 두른 장미가 아니라 수수한 코스모스 같은 사람이었다.
‘첫인상은 그렇지만, 더 이야기를 나눠 봐야 알겠지.’
“준비한 것들이 마음에 드시니 다행이에요.”
“온실도, 티 테이블도, 디저트와 차도 모두 정성 들여 준비한 게 보이는걸요.”
루스벨라는 테이블 중앙의 꽃 장식을 가리켰다.
“특히 저 꽃 장식, 백작 부인께서 직접 키운 꽃들로 꽃꽂이를 한 것이죠? 너무 아름다워서 처음에는 주문을 넣어 제작한 것인 줄 알았어요.”
“어머, 그런 것도 알아주셨군요.”
칭찬은 사람을 즐겁게 만든다. 그것이 가식이 아니라 진심일 경우에는 더.
‘소문과는 딴판이야.’
다이애나가 바라본 루스벨라는 서툴러도 티 파티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가가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텐더 자작 부인. 오늘 가슴에 매단 브로치가 예뻐요. 남편분께 선물 받은 것이죠? 드레스와 한 세트처럼 어울려요.”
“아, 마침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었거든요. 세심하게 살펴 주셔서 감사해요, 후작 부인.”
“그리고 다른 영애는 머리핀이…….”
루스벨라는 자리에 모인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기분 좋을 칭찬을 건넸다. 가문과 그 사람에 대한 공부가 없었다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오기 전에 열심히 준비하길 잘했어.’
루스벨라는 뿌듯했다. 처음 온실로 들어왔을 때는 그녀를 경계하던 눈초리가 누그러드는 게 기분 좋았다.
‘내 말을 무시하지 않고 들어주고, 나도 상대를 똑바로 보고 좋은 말을 주고받는 건 행복한 일이구나.’
친구가 없던 루스벨라로서는 이 순간이 꿈같았다. 그녀는 칭찬으로 시작해 다른 사람들의 대화에 천천히 녹아들어 갔다.
“……그래서 이번 건국 기념일은 어떨지 기대되어요.”
“저도요. 후작 부인은 이미 입고 갈 옷을 정하셨나요?”
“네. 다른 분들은 어떠신가요?”
“저는 아직 고르느라 고민 중이에요. 후우. 설레지만 피곤한 일이에요. 겹치지 않게 눈에 띄는 드레스를 고르는 건.”
루스벨라는 무리 없이 사람들의 공통된 주제를 공유하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상기된 뺨이 이 자리가 즐거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역시 나쁜 분은 아닌 것 같지?’
‘응. 만나 보길 잘한 것 같아.’
다이애나와 텐더 자작 부인인 엘런은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도 초대장을 보낼 때는 조금 걱정했었다. 언젠가는 만나야 하는 후작 부인이지만, 나쁜 평판대로의 사람이라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선대 후작의 정부처럼 교만한 인물인가 싶었는데.’
다이애나와 엘런이 판단하기에 루스벨라는 토끼였다. 상처가 많은 자그마한 토끼.
루스벨라가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본 것이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 밑으로 넣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고, 후작 부인이니 이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이었는데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후작님이 말씀하신 것 때문이겠지.’
데니스가 혹시 몰라 미리 실리케와 텐더에 전한 서신이 있었다. 그것은 루스벨라가 과거에 사교계에서 어떤 배척을 받았고, 얼마나 괴로워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녀를 상처 입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좋은 사람이니까. 보면 알 거야.’
후작의 말이 옳았다. 다이애나와 엘런은 루스벨라가 함부로 남을 괴롭힐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친해져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루스벨라의 티 파티 참석은 성공적이었다.
***
순조롭게 티 파티는 마무리되었고, 남은 사람은 루스벨라와 엘런, 주최자인 다이애나만 있었다.
“데벤테르 후작 부인.”
“아, 실리케 백작 부인.”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네. 앞으로 계속 얼굴을 봐야 할 사이가 될 것 같아서요.”
다이애나와 엘런의 말에 루스벨라는 조금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다이애나, 엘런.”
“네. 루스벨라.”
“고마워요. 이름 부르는 것을 허락해 줘서…… 오늘 초대해 준 것도 정말 좋았어요. 또 오고 싶어요.”
그러면서 답례품으로 가져온 와인과 향신료 상자를 내밀었다. 와인은 데벤테르 가가 소유한 기름진 옥토에서 나는 최상급의 포도주였고, 향신료는 시중에 팔리는 모든 종류를 모아 정리한 한정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냈던 것처럼 말린 꽃과 레이스를 엮어 곁들인 작은 카드가 있었다.
“이거 받아 주시겠어요?”
토끼가 당근을 주는 것 같았다.
다이애나와 엘런이 동시에 말했다. 우습지는 않았고, 귀여웠다.
“루스벨라.”
“네?”
“다음에는 저희를 후작 저에 초대해 주세요.”
“루스벨라가 여는 티 파티나 무도회를 보고 싶네요.”
루스벨라가 활짝 웃었다.
“해 볼게요. 하게 되는 날을 잡게 되면 두 사람에게 꼭 제일 먼저 말해 줄게요.”
티 파티에 참석한 일은 성공적이었다. 루스벨라는 즐거운 마음으로 후작 저로 돌아갈 수 있었다.
***
그 후로 루스벨라는 다이애나와 엘런을 자주 만나서 노는 사이가 되었다.
디저트 카페를 탐방하기도 하고, 수도의 최신 유행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도 가졌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신문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도 가져 봤다.
그들은 서로 마음을 열고 편하게 말을 놓는 사이가 되었다.
“루스벨라, 건국 기념일에 제일 힘주고 차려입어서 와야 해!”
“걱정하지 않아도 나랑 데니스가 제일 눈에 띌 것 같아.”
“세상에. 네가 자만에 차는 날도 오다니. 처음 만났을 때는 완전 호랑이 앞의 토끼였잖아!”
“난 내가 루시를 잡아먹는 역할이었나 싶더라니까.”
루시는 루스벨라의 애칭이 되었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야.”
“네가 죽을 때까지는 하지 않을까?”
셋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루스벨라는 친구인 다이애나와 엘런과의 시간을 보내면서 행복했다.
그리고 겁이 났다.
‘이렇게 내가 행복해도 되는 건가?’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인생에서 불행은 이미 다 바닥난 건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아슬란 윈체스터 공작과 내가 복수하고 싶던 가해자들이 있었지.’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과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풍선처럼 부풀었던 마음이 팍 터져 원래대로 돌아왔다.
데니스가 그녀에게 말해 준 것이 있었다.
‘윈체스터 공작뿐만 아니라 윈블 자작 영애도 같이 오네요. 그녀와 같이 어울렸던 무리 전부가.’
어지간한 일이 없는 이상 웬만한 귀족들은 참석하는 연회니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몽실몽실하던 정신을 끌어올려 찬물에 내던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데니스는 루스벨라에게 손을 빌려줄 수 있다고 했다. 그녀가 당했던 것처럼, 그들의 만행을 밝혀 고립되게 만들고 수도에 발을 못 붙이게 할 수 있다고.
‘욕심이 나.’
받은 만큼 똑같이 돌려주고 싶었다. 너희도 내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알게 해 주고 싶었다.
기어이 아슬란이나 다른 북부의 사람들과 마주쳐야 한다면.
‘……또 제게 해를 끼치려 든다면 그때 도와줘요. 내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할 때만요.’
건국 기념일에서도 난장판이 일어난다면, 루스벨라도 참지 않고 대응할 생각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시간을 들여 천천히 복수할 생각이었다.
“루시?”
“응. 다이애나, 엘렌.”
“안색이 안 좋아.”
“……예전의 일을 되짚고 있었어?”
“……응.”
“그러면 힘들지 않아?”
지금의 행복이 두려웠던 이유는 기대고 싶어서였다. 다 잊고, 평온해진 안락함 속에서 산다면 편해질 수 있을 것이다.
“힘들어. 그렇지만 나는 잊으면 안 되는 거잖아.”
“루시.”
“나는 괜찮아. 많이 나아졌어.”
루스벨라는 코앞으로 다가온 건국 기념일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상처 줬던 인연들이 대거 모이는 자리에서, 어떻게 마주칠지 궁금해졌으므로.
‘내 편이 있으니까 더는 무섭지 않아.’
“건국 기념일 연회에서 보자.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는 말고.”
“널 괴롭히는 인간들이 나타나면 말만 해.”
“우리가 당장 달려가서 도와줄게.”
“……응. 고마워.”
루스벨라는 더는 웅크리고 앉아 고통을 견디지 않았다.
‘기대된다.’
고조된 마음을 품고 때를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
건국 기념일의 날이 밝았다. 거리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하루뿐인 축제가 열렸다.
“와, 루스벨라.”
“왜요?”
“닐라에게 맡기길 잘한 것 같아요.”
데니스는 루스벨라가 차려입은 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마음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또 왜…… 통증이 아니라 이건……
“고마워요. 당신도 멋져요.”
루스벨라는 웃으며 데니스의 손 위로 그녀의 손을 얹었다.
“갈까요, 루스벨라?”
“좋아요. 가요.”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화려하게 단장하여 마차에 올랐다.
“이제 곧 그녀를 만나겠군.”
그리고 아슬란도 수도에 있는 저택에 짐을 내리고 있었다.
“‘대체품’이 나타날 거라고 했지.”
아벨 역시도 수도에 와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목적을 품고서 수도에 모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