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드레스를 고른 지 며칠 후 데벤테르 후작 저로 의상실 로벨리아의 직원들이 당도했다.
그곳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사장인 닐라는 가장 앞장서서 신난 표정으로 문을 두드렸다.
“데벤테르 후작님 내외의 건국 기념일 의복을 맞추러 왔습니다!”
“들어오시죠, 주인님과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는 문을 열어 그들을 비어 있는 방에 잠시 들여보내고, 데니스와 루스벨라가 위치한 층으로 올라갔다.
“주인님, 마님. 로벨리아의 직원들이 왔습니다.”
“곧 내려가지.”
“내려갈게요.”
두 사람은 집사가 오기 전까지 말없이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오독오독 쿠키 씹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했었다.
화목해 보이던 주인 내외의 사이가 얼어붙으니 고용인들은 불안했다. 데니스와 루스벨라도 마찬가지로 불편했다.
그래서 집사가 의상실 직원들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니 반가웠다.
‘저번에 이혼 계약서를 내민 이후로…….’
‘분위기가 영 서먹해졌지.’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나란히 걸어가면서도 사이에 약간의 간격을 두고 계단을 내려갔다.
“어머, 오셨어요?”
로벨리아의 주인인 닐라는 밝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의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사랑하는 디자이너였다.
그래서인지 데니스와 루스벨라를 보자마자 그녀의 눈은 창작욕으로 불타올랐다.
‘미남과 미녀!’
그것도 돈이 많은 선남선녀!
닐라는 몹시 설레고 있었다. 돈 많고 아름다운 고객들은 작업하는 맛이 있었다.
“데벤테르 후작가의 일원을 뵙습니다. 닐라 오스터입니다. 두 분의 첫 주문을 제가 받을 수 있어 영광입니다.”
“처음 인사하네, 닐라.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이번 대의 데벤테르 후작인 데니스 데벤테르네. 여긴 내 아내인 루스벨라.”
“만나서 반가워요, 닐라.”
“저도 반갑습니다. 후작님, 후작 부인. 선대에게서 작위를 물려받으셨군요. 축하드려요.”
“고마워. 인사치레는 그만두고, 우선 이 사람의 옷부터 만들어 주면 좋겠어.”
“물론이지요. 바로 치수부터 재도록 하겠습니다.”
닐라가 재빠른 몸짓으로 직원들을 불러 세팅을 마쳤다. 치수를 잴 줄자와 온갖 옷감들이 방 한쪽에 쌓였다. 고객의 취향이 어떤 것인지 모르니 가져온 리본과 레이스, 보석까지 줄줄이 가져다 놓으니 한 짐이었다.
‘설렌다, 설레! 오랜만에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아!’
예로부터 영감의 원천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난 뒤라 했다. 닐라의 영감은 미인을 보고 생겨나는 것이라, 지금 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시각적으로.
닐라는 방정맞게 콧노래를 부르지 않기 위해 무진 애썼다. 어쨌거나 그녀도 사교계의 소문을 주워듣는 사람이어서, 데니스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아서 잘해 주길 바라지. 지불한 돈이 아깝지 않도록, 연회에서 가장 빛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게.”
돈 많이 주고 예의까지 바른 미남 고객이었다. 닐라는 바로 데벤테르 후작가에 대한 평판을 고쳤다.
“염려 마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다른 방에서 대기하고 있지.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그녀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게.”
데니스는 그 말을 남기고 문을 나섰다. 닐라는 감격했다.
‘역시 재력 있고 씀씀이 큰 귀족이 최고다.’
“감사합니다!”
닐라는 행복해져서 줄자를 집어 들고 루스벨라에게 다가왔다.
“후작 부인, 이쪽으로 와서 팔을 벌리고 서 주세요.”
“알았어요.”
루스벨라는 안에 입는 얇은 속치마를 제외하고 옷을 다 벗었다. 닐라와 그 직원들이 세심하게 그녀의 치수를 재고, 미리 골라 둔 색의 옷감을 가져와 이것저것 저들끼리 의논했다.
“어떤 색이 가장 어울릴까요?”
“역시 이 색이 후작 부인의 피부에 제일 잘 받지 않겠어?”
“그것도 중요하지만, 정갈한 아름다움을 뽐내려면 이 색이 더 나을 거 같은데…….”
“머리카락 색이 회색이시니 그것도 고려해야 해. 녹색 눈동자도 마찬가지고…….”
닐라와 그녀의 직원들은 열성적이었다. 루스벨라가 집중력을 깨고 싶지 않아 말을 걸기 힘들 정도로.
“저기…….”
“네. 후작 부인. 불편하신 점이 있나요? 무엇이든 말만 하세요.”
“아뇨. 그게 아니라…… 저는 드레스 하나만 선택했는데, 왜 다른 색의 옷감과 기성복이 저렇게 많은 건가 싶어서요.”
‘설마 아니겠지?’
루스벨라는 리스냐에서 데니스가 자신의 짐을 버린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벼르고 있었다는 듯 근처의 의상실에서 드레스란 드레스는 다 쓸어왔던 것도 까먹지 않았다.
“아이참. 후작님이 알려 주시지 않으셨구나.”
설마가……
“당연히 후작 부인을 위한 후작님의 주문이지요. 옷걸이가 부족할 만큼 많이 맞춰 달라고 하셔서, 일단 본점에 있는 것들을 다 가져왔답니다.”
늘 사람을 잡는다.
‘데니스는 괜찮다고 했지만……. 마음의 빚 따위는 쌓지 말고 받아 두라고 했지만.’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루스벨라에게는 힘겨운 임무가 주어졌다.
“저, 저걸 다 입어 보고 착용해야 한다고요?”
“음? 당연하죠.”
“드레스도 구두도 장신구도 수십 개가 넘어 보이는데요…….”
“아이, 괜찮아요, 괜찮아. 익숙해지시면 금방 끝낼 거예요. 해내실 수 있으세요!”
“저게요?”
“그럼요, 가능하답니다!”
루스벨라도 마음껏 옷을 고르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의상실이 온다는 소리에 전날 두근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 많아……!’
발이 제멋대로 도망치려는 듯 뒤로 물러서는데, 닐라가 루스벨라의 손목을 부드럽게 낚아챘다.
“후후. 후작 부인. 어딜 가세요. 저희는 값을 받은 만큼의 일을 처리해야 할 의무가 있답니다!”
닐라가 정말 흥이 올라 있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루스벨라의 맞춤 드레스를 만들어 가져올 것 같았다.
“아, 알았어요. 협조할게요.”
그 말만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이 직원들이 본격적으로 루스벨라의 옷을 갈아입히고, 장신구와 구두를 신겨 주기 시작했다. 다 입은 후에는 거울을 보고 어떤지 평을 한 줄이라도 이야기해야 했다.
“좋아요. 리본이 치렁치렁한 건 싫으시고.”
“너무 화려한 문양이 들어간 것도 안 되고…….”
‘이거 언제 끝나요, 데니스!’
루스벨라는 살려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사치하는 데에는 돈뿐만이 아니라 체력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었다.
“잘 되고 있으려나.”
데니스는 태평하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닐라가 잘해 주기를 바라면서.
***
“다시는 대량으로 옷을 맞추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안 할 거야…….’
루스벨라는 지나간 옷 무더기의 천국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옷을 주문한 고객인 루스벨라는 퀭해져서 쓰러질 것 같은데, 닐라는 갓 삶은 달걀처럼 반들반들해져서는 의상실로 돌아갔다.
‘너무너무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후작 부인! 다음에 또 초대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루스벨라는 우물우물 고기를 잘라 씹으며 생각했다.
“당신도 나한테 미리 이야기해 줘요. 대비해야 할 거 아니에요.”
“무슨 대비요. 주문을 무르고 도망칠 준비?”
“……말해 줘요. 제발.”
루스벨라가 남은 고기 위로 콱 포크를 찍으며 말했다. 밑에 흐르는 육즙이 살짝 튀었다.
“네. 포크에 찔리는 일을 피하려면 그렇게 해야겠네요.”
“난 평생 이곳에 남을 것도 아닌데 과하게 돈을 쓰는 건…….”
그 순간 분위기가 쑥 가라앉았다. 루스벨라도 말을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이것 때문에 어색했었는데.’
둘 다 동의했고, 이미 알고 있었고, 이혼할 날에 낼 서류에 서명까지 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무거웠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우리. 지금은 즐거운 시간을 누리는 데 집중하면 좋겠어요.”
“그래요.”
몇 분간 말없이 식기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먹는 음식이 목에 걸려 체할 것 같았다.
‘여기 와서 이런 적은 처음이야.’
한 번도 불편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어려웠다.
“루스벨라.”
“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데니스였다.
“오늘 우편함에 이런 편지가 왔다고 집사가 알려 주더군요.”
그가 건네준 것은 낯설지 않은 편지 봉투였다.
“이건…… 윈체스터 공작의 편지네요.”
저번 것에 대한 답장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새로 보낸 편지였다.
‘아무 연락도 취하지 말아 달라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 분명히 전했는데.’
어째서 편지를 또 보냈는지. 루스벨라는 잠시 이 편지를 불쏘시개로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열어 볼게요.”
‘왜 보냈는지는 알아보는 게 좋겠지.’
편지에는 짤막한 문장 하나만 있었다.
‘건국 기념일에, 수도에서 뵙겠습니다.’
“뭐라고?”
건국 기념일에는 온갖 귀족들이 참석하니 아슬란도 올 것이란 예상은 당연히 했다.
‘하지만 그와 대면해서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어!’
낭패였다.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다시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상황은.
“뭐라고 적혀 있어요?”
“……건국 기념일에, 저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요.”
“……게 ……밖에 없나.”
데니스는 무어라 짜증을 내는 것 같더니 루스벨라에게 말했다.
“이렇게 된 거, 윈체스터 공작을 정면으로 마주치는 걸 피할 수는 없겠네요.”
“그러게요…….”
“그래서, 루스벨라.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게 뭔데요?”
데니스가 루스벨라에게 초대장 하나를 내밀었다.
‘티 파티 초대장?’
온실이나 정원에서 하는 티 파티 초대장이었다. 마른 꽃과 리본을 곱게 달려 보내서 우아함이 느껴졌다.
“누가 보낸 건가요?”
“후작 가문과 연이 깊거나, 혹은 가신 가문 중에 해가 되지 않고, 품성이 좋다고 평이 난 가문에서 보낸 거예요.”
데니스가 꼬집어 준 가문은 두 개였다. 실리케 백작가와 텐더 자작가.
보낸 곳은 실리케 백작가였다. 그곳의 안주인에 대해 데니스는 미리 조사를 마쳤고, 루스벨라가 부담 없이 친밀한 사이가 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이것도 당신이 추진한 일인가요?”
“당신은 그들과 좋은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어요.”
루스벨라는 지펠론 백작 때문에 멀쩡한 교우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이득만 좇아 끈에 매달린 인형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여야 했으니 그녀를 좋게 보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영애와는 같이 있고 싶지 않아요.’
그런 소리를 면전에서 들은 적도 있으니까.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예요. 반드시.”
건국 기념일 연회에 참석했을 때 담소를 나눌 친구가 있는 편이 좋다는 것은 알았다.
‘굳이 그게 아니어도…….’
루스벨라는 외로웠다. 그녀도 정말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친구가 생기면 좋겠다고 바라왔었다.
“좋아요. 초대장에 답장을 써서 보낼게요.”
“집사에게 답례품을 준비해 달라 전할게요.”
가슴이 두근거렸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떨렸다. 사교계에서 배척받아 긴장은 배로 불어났다.
‘그렇지만 페이 너라면 망설이지 말고 해 보라고 했겠지.’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도.
***
윈블 자작의 집. 그곳에서 외동딸인 아슈라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빗고 있었다.
거울이 푸른빛을 내며 뿌옇게 변하더니, 그 속에서 장로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슈라의 눈 초점이 흐려지고 푸른빛에 잠식되었다.
[아슈라.]
“네.”
[네가 할 일이 있다.]
“뭘 하면 될까요?”
[건국 기념일 연회에 참석해. 그리고 네가 증오하는 여자의 앞에서 난동을 부려라.]
“망신당할 수 있도록 말인가요?”
[그래. 예전처럼 교활하게.]
“알았어요…….”
거울이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슈라는 바로 아버지인 자작에게 달려가 말했다.
“아버지! 저 건국 기념일 날의 연회에 아름답게 차려입고 가고 싶어요.”
그 여자를 만나러 가야지. 만나서 예전처럼 주제를 알게 해 주는 거야.
아슈라는 사악한 속내를 꽃 같은 미소로 피워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