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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38화 (39/166)

38화

며칠 후 윈체스터 공작 성으로 우편물이 전해졌다. 아슬란은 그 속에서 루스벨라의 답장을 찾아냈다.

‘아예 답장이 오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편지를 보낸 사람을 위해 답장을 보내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다.

하지만 아슬란과 루스벨라의 이미 깨진 관계를 생각하면, 묵묵부답이어도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적혀 있을까.’

그는 긴장한 채로 조심스레 편지를 뜯어봤다.

내용을 읽고 그는 나직하게 탄식했다.

‘윈체스터 공작님께.

공작님. 저는 당신께 제 결혼식 청첩장을 드리고 왔을 때 남은 미련을 모두 정리했습니다.

당신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이겠지요. 그렇지만 서로 얼굴 보는 일이 없기를, 이제는 간절히 바랍니다.

우린 끝났어요.

다시는 이런 편지를 보내지 마시길 바라요.

-루스벨라 데벤테르 올림-’

뒤바뀐 성을 보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끝났다고…….”

아슬란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의 잘못을 수습해야 하는데, 루스벨라는 그를 보기도 싫어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인데.’

그녀가 제게 완전히 등을 돌렸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인데……. 새하얀 도화지 같던 그의 삶 위로 엎어진 검은 잉크 자국 같은 죄책감을 쉬이 넘길 수가 없었다.

이대로 모른 척하고 넘겨도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윈블 자작도, 그에게 수도행을 반대하던 자들의 뜻도 그렇지 않던가.

묻어 두면 된다고. 시간이 지나면 잊힐 일이라고.

그렇게까지 매달릴 가치가 있느냐고…….

아슬란은 그 말에 제 허물을 반성하고 고쳐야 하니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봤다.

하지만 루스벨라가 사과를 바라지 않는다. 영원히 보는 일 없이 각자의 삶을 살길 바라고 있었다.

그에게는 용서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빗속에서 처량한 그녀를 외면하고 갔을 때, 그 기회는 박탈되었을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은 거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영지의 업무가 아무리 과중했어도 해결의 끝이 보였는데, 이 일 앞에서는 바보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건국 기념일에는 그녀도 오겠지.’

그날에는 그도 참석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 당연히 데벤테르 후작 부부도 올 것이고.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거라는 장담을 할 수는 없었다.

그때,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나눠 볼 수는 없을까.

그가 느꼈던 미안함을 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까.

“시온.”

“예. 주군.”

은신하고 있던 시온이 아슬란의 앞으로 나타났다. 시온은 한쪽 무릎을 꿇고 그에게 예의를 표했다.

“네가 보기에는 어떻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그녀와의 지나간 인연에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아둔한 제 머리로는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런가.”

시온에게도 어려운 문제였다. 그가 보기에 아슬란은 루스벨라의 일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기는 했다.

‘주군이 집착하고 있는 것은 과연 그분이 맞을까?’

시온이 보기에 아슬란은 깨진 조각을 찾는 원 같았다. 본래는 완벽하게 둥근 모습이어서 어디든 수월하게 잘 굴러다니던, 그런 원.

아슬란이 집착하고 있는 건 깨어진 그의 삶에 대한 자부심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주군의 앞에서 부족한 사견을 올릴 수 있겠는가.’

시온은 아슬란을 믿었다. 그의 주군은 냉철하고 유능한 사람이었다. 좋은 주군이었다.

그래서 시온은 아슬란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루스벨라에 대한 진실을 알았음에도, 그는 그러고 싶었다…….

“건국 기념일. 그때 그녀를 만날 것이다.”

“그리하십시오.”

‘그것으로 주군께서 마음이 편하시다면.’

아슬란은 즉시 다시 편지를 꺼내 썼다. 저번의 편지가 최대한 굽혀 상대의 의견을 구하는 내용이었다면, 이번에는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다.

‘이 방법밖에는 없어.’

아슬란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만나지 않고 싶은 상대에게 어떻게든 용서를 구하려는 일은 더는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었다.

철저히 그만 생각하고, 그의 아픔만 고려해서 내린 결정임을 그는 외면했다.

“데벤테르 후작 저로 최대한 빨리 보내 주게.”

“알겠습니다.”

시종에게 주어진 편지는 다시 미련을 덕지덕지 안고 보내지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

“저는…… 윈체스터 공작과 만나지 않을 거예요.”

“정말 만나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그 사람, 요즘 들어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공작 저에 사람을 심어 뒀나요?”

“넘쳐나는 돈은 많은 것을 가능케 하니까요.”

루스벨라는 데니스의 말에 그렇구나,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귀족들끼리도 견제하는 입장에서는 암암리에 첩자를 심어 둘 때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그가 공작을 견제하지?’

그 부분이 아리송했으나 깊게 파고들지는 않기로 했다. 정치적 목적의 까닭이 있어서 이루어지는 일에는 얽히지 않는 게 좋았다.

‘언젠가 헤어질 사람이기도 하고.’

데니스는 루스벨라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가 그녀를 언제, 어디서 알았는지는 몰라도 루스벨라에게 베풀어지는 것은 순수한 호의와 애정이었다.

‘윈체스터 공작에게 반했을 때처럼 일방적인 감정을 키우고 싶지는 않아.’

루스벨라는 짝사랑이 얼마나 고달프고 괴로운지 첫 번째 사랑의 실패를 통해 절절히 깨달았다. 두 번의 실수는 없어야 했다.

그래서, 확실히 하고 싶었다.

“데니스.”

“네, 루스벨라.”

“당신은 나와 정략결혼을 했죠. 그 이유가 날 사랑해서는 아니고요.”

‘굳이 따지자면 경애에 가깝겠죠.’

데니스는 기분이 좋았다. 아슬란과 루스벨라가 만나지 않아서였다. 그자는 제가 움직인 후에야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과하겠다는 용기를 겨우 가졌다.

‘멍청한 곰 대가리 새끼.’

데니스는 아슬란을 속으로 욕하면서 대답했다.

“연애 감정을 말하는 것이라면, 네. 아니에요.”

그렇지만, 을 말하려는 때였다.

“그럼 당신이 나를 데리고 있는 목적이 끝나면, 나와 이혼해 줄 수 있겠네요?”

“……네?”

“일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당신이 흔쾌히 보내 준다고는 했지만, 확실히 매듭짓는 게 역시 좋을 것 같아서요.”

루스벨라가 등 뒤에 숨겼던 계약서를 꺼냈다.

서류 봉투를 보자마자 데니스의 웃던 얼굴에 서서히 금이 갔다.

“……그게 뭔가요?”

“이혼 서류예요. 내 건 이미 서명했고요.”

“…….”

“당신이 미리 서명해 주면, 내가 가지고 있다가 때가 되면 바로 법원에 제출하러 갈게요. 괜찮을까요?”

“아…….”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이 목구멍 안에서 막혔는지 나오지가 않았다.

‘루스벨라는 내게 있어 은인이고, 지켜 줘야 할 사람일 뿐인데.’

뭐지? 왜 대답을 못 하겠는 거지?

“데니스? 어디 아파요?”

루스벨라가 그의 앞에서 손을 휘젓는 줄도 모르고 그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아, 아. 아프진 않아요. 멀쩡해요.”

어찌나 당황스러웠는지 평소 전혀 하지 않던, 말을 더듬는 실수마저 저질렀다.

“그럼 서명 부탁드릴게요.”

“……그래요.”

루스벨라가 원하는 것을 그가 거부할 수 있을 수는 없었다. 유려한 필기체로 순식간에 칸들이 채워졌다.

‘아까는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나빠.

무언가 틀어진 느낌이었다.

‘왜……?’

당연히 루스벨라를 놓아줄 생각이었다. 그녀를 결혼으로 묶어 둘 의향은 전혀 없었고.

그녀는 끝까지 빚을 질 수는 없다며 거절하겠지만, 넉넉한 재화를 딸려 보내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도록 할 계획이었다. 위자료를 명목으로…….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결혼한 것이었는데.

그르친 일은 없다. 모든 일은 그가 간절하게 계획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기분이 나쁘다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옛날 버릇이 나오는 건가. 성질 바꾸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난 쓰레기였어.

데니스가 속으로 자책했다. 루스벨라는 그가 항상 웃고 있으니 그런 줄은 모르고 계약서를 꼼꼼히 확인했다.

“좋아요. 아무 이상 없어요. 이대로 제가 보관해 두고 있을게요.”

“……네.”

둘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속내가 얼마나 복잡하든지 간에.

‘잘한 거야. 이렇게 해 둬야 미련 없이 나갈 수 있어.’

‘그녀가 원하는 대로만 해 주고 싶었으니까, 잘한 거겠지. 내 성질이나 더 죽이고 살자.’

두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같았지만, 대화를 나누지 않았기에 아무도 몰랐다.

“그럼 우리는 건국 기념일 연회에 더 신경을 써 보죠.”

“네. 그날이 우리가 사교계에 다시 데뷔를 하는 날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들은 그들의 사이가 달라질 것이 없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뜻대로 흘러가는 일이 얼마나 있던가.

***

“거기 겁쟁이, 장로 좀 불러와 봐.”

“장로님을요?”

‘무슨 생각이지?’

“잔말 말고 시키면 빨리 갔다 와.”

“예…… 알겠습니다.”

또 저번처럼 협박할까 무서워 얼른 달려 나오는데 음산한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빠각.

오늘도 웬 뼈다귀 하나가 아벨의 손에 아작났다. 그것도 모자라 먼지처럼 잘게 부서져 흩어지기까지 했다.

“이 짓도 처음에나 재밌었지, 이젠 별로네.”

‘재미없으면 하지를 마…….’

남의 유골 훼손하는 꼴을 보는 게 절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으니.

알렉은 혹여나 아벨이 부러뜨리는 뼈다귀가 제가 될까 싶어 알아서 설설 기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아벨의 팔에 달린 팔찌는 푸른빛을 내었다. 출처는 장식된 푸른 보석에서였다.

‘저 팔찌가 수상한데.’

데니스의 첩자인 알렉은 아벨이 힘을 사용할 때마다 팔찌의 푸른 보석이 반응하는 것을 보았다. 보통의 보석은 아닌 것 같았다.

‘마력석인가 했는데, 알아보니 그것도 아니었고.’

알렉이 보석의 정체가 궁금하여 직접 스케치를 해서 보석과 마력석을 취급하는 가게에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에덴은 비밀 단체였지만, 그들의 은거지에 외부에서 온 후임을 너무 오래 잡아 두면 수상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므로, 외출을 허락하는 편이었다.

거의 못 나가고, 허가도 받아야 하고, 나갈 때는 다시 눈과 귀를 가리고 이동해서 신전으로 갔지만.

‘이 보석, 정체가 뭔지 알아요? 사용할 때마다 빛이 나는 종류고, 파란색인데.’

‘일반적인 보석은 일단 아니고, 마력석도 아닌 것 같군요.’

‘예?’

‘마력석은 그 보석 내에 빛이 내장되어 있어요. 그래서 힘을 주입해서 사용하든, 하지 않든 간에 빛이 항상 나고 있죠.’

알렉의 궁금증은 더욱 깊어갔다.

그렇다면 당최 이것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알려지지 않은 제3의 보석이거나, 일반적인 보석에 마법으로 뭔가 장치를 해 뒀을 가능성이 있겠네요. 더 알아봐 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신전에서 은밀하게 소수로만 유지되고 있는 비밀 단체인 에덴이었다. 이렇게 물어보는 것도 사실 위험했다.

어머니에게 생신 선물을 드려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나왔지만, 괜한 일반인까지 엮이게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알겠다고만 하고 나왔지만…….’

데니스에게 보고해 더 캐 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우선 따까리 짓이나 계속하자…….’

“장로님! 계십니까? 아벨 님이 찾으십니다.”

문을 두드리며 크게 외치자 곧 장로가 걸어 나왔다.

직급이 아벨 바로 밑의 장로이면서, 탱탱하고 윤이 나는 피부를 가진 젊은이가 나왔다.

‘어떻게 이런 젊은 사람이 장로지……?’

의아했지만 알렉은 겨우 표정 관리를 했다.

“무슨 일이지?”

“아벨 님께서 무작정 장로님을 찾으시는지라…… 어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이 가지. 자네가 길을 안내하게.”

‘싫은데요.’

그렇지만 갓 들어온 신입 사제 신분으로 싫다는 소리는 불가능했다.

“네…….”

울며 겨자 먹기로 아벨의 앞에 장로와 동행했다.

“왔어? 장로?”

“아벨 님.”

아벨은 장로가 오자 소년의 모습으로 검붉은 눈을 빛내면서 왔다.

“부탁할 게 있어, 장로야.”

익숙한 하대였다.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하는 태도로는 적절치 않았으나 장로는 아벨의 충실한 종처럼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네. 말씀하십시오.”

“수도로 가고 싶어.”

새 ‘대체품’을 가서 구경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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