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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37화 (38/166)

37화

‘내가 왜 반지를 간직하고 싶어 했을까.’

루스벨라는 멍하니 앉아 그 질문에 골똘히 빠졌다. 책상 위로 펼쳐놓은 책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게 식은 차가 시간이 꽤 흘렀음을 보여 줬다.

“……라? ……벨라?”

‘반지가 들은 함은 바로 데니스에게 넘겨줬지만. 그건 그의 것이고, 그의 어머니의 것이기도 하니까.’

주인에게 돌아가야 마땅한 물건이었고, 제자리를 찾아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물건을 탐내다니…….’

“……라. ……려요?”

“뒤늦게 아버지를 닮아 가고 있는 건가?”

“하나도 안 닮았어요.”

“헉!”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니 지척에 데니스가 있었다.

숨결이 닿을 것 같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더 좁혀진 거리는 평소에 잘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도 주의해서 보게 되었다.

가령 그의 금발이 올이 얇고 가는 황금실 같다든가, 붉은 눈동자는 잘 익은 석류의 색을 떠올리게 한다든가.

그리고 얼굴은…….

“아. 제가 너무 가깝게 다가와서 놀라게 했네요.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아름답고 잘생겼다는 형용사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게…….”

반지가 가지고 싶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하면 너무…… 너무 쓰레기가 될 것 같았기 때문에.

‘분수에 넘치다 못해 가당치도 않은 생각을.’

“다가올 건국 기념일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요?”

“당신이 내게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려 주기로 했잖아요.”

어떻게 그녀를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급하게 지어낸 변명치고는 괜찮았다.

‘궁금하던 것이기는 하니까.’

데니스도 납득했는지, 그 주제로 대화의 방향이 옮겨졌다.

“그렇네요. 이제 겨우 한 달밖에 남지 않았네요.”

수도는 이미 평소보다 활발해지고 있었다. 건국 기념일을 앞두고 장사꾼들은 각종 기념품들을 준비하고, 귀족들은 그날 열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로 바빴기 때문이었다. 평민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건국 기념일을 즐기기 위해 더욱 부지런히 일감을 물고 다녔다.

‘집 안에서만 있을 때는 글이나 그림으로만 전해 받았던 날인데.’

쌍둥이 동생들은 아버지를 따라 연회에 참석했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약혼자가 없었으니까. 썩 괜찮은 혼처를 구하러 지펠론 백작은 건국 기념일 연회에 가장 고급스러운 차림으로 포장하고 나갔다.

“저희도 슬슬 준비해야죠.”

“……이때쯤에는 이미 평이 좋은 의상실은 예약이 다 차 있지 않아요?”

“데벤테르 가는 예외죠. 오히려 의상실이 저희에게 주문을 넣어 주길 바라며 연통을 넣고 갑니다.”

“엄청나네요.”

썩어날 만큼 많은 부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 이외의 모든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일찍이 후작 가문의 선조가 항로를 개척하여 나간 무역선은 타 대륙에서만 나는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성 때문에 값은 부르는 대로 나갔다.

그때 쌓은 금화는 지금까지도 데벤테르 가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그러니 루스벨라.”

“네?”

“마음대로 골라 봐요. 원하는 의상실이 어디든, 바로 불러 줄게요.”

데니스가 방에 찾아온 목적이 이것이었다는 듯 카탈로그를 테이블 위로 죽 늘어놓았다.

‘전부 수도에서 손꼽히는 의상실뿐이야.’

데벤테르 후작 가의 주문을 얻어 내기 위해 보내진 카탈로그는 하나같이 정갈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수수한 것부터 화려한 것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가격은…… 루스벨라의 심장을 덜컥 들었다 놓을 정도로 높았다.

“이, 이거 뒤에 붙는 0이 몇 개예요?”

“음? 저런. 그건 무시하세요. 잘못 전달된 게 왔나 보네요.”

하하하.

‘방금…….’

‘내가 분명히 가격표는 없는 것으로 보내라고 했는데’라고 한 것 같은데……?

데니스가 웃으면서 재빨리 ‘멀쩡한’ 카탈로그를 새로 가져왔다. 그것들에는 경악할 만한 가격이 모조리 빠져서 보이지 않았다.

“편하게 골라 주세요.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면 바로 연락을 넣을 테니.”

“값이…… 너무…….”

“하하. 가격은 우리 잠시 잊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라 괜찮아요.”

‘이런 엄청난 호의를 받아도 되는 걸까……?’

이러다 나중에 후작가에서 나와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사치에 익숙해져 재산을 탕진하진 않을까 두려워졌다.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죠.”

이마에 희고 긴 손가락이 살며시 눌러졌다.

“전 루스벨라가 건국 기념일 연회에서 가장 빛났으면 좋겠어요.”

이건 순전히 제 욕심이에요.

“당신이 원해서 선택한 것들을 걸치고, 당당하게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면 좋겠어요.”

“제가…… 그래도 괜찮을까요.”

사교계는 루스벨라에게 차가웠다. 무도회도 마찬가지로 악몽 같았다.

아무도 어울려 주지 않고, 홀로 벽의 꽃이 되어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초라하게 서 있어야 했다. 공작의 약혼녀로서 자리를 비우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항상 초라한 옷을 입고, 조롱당하기만 하는 곳에 참석할 자신이 없었다.

“루스벨라.”

데니스가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당신에게는 힐난 받을 못난 점도, 부족한 구석도 없어요.”

“…….”

그는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 같았다.

“세상에 선한 사람이 반이면, 악한 사람도 반이나 있죠. 그들은 죄를 저질러도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뻔뻔하게 고개를 더 쳐들고 다니죠.”

마치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내 아버지도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자신을 가져요. 당신은 더 많은 사랑을 받아도 되는 사람이에요.”

‘사랑받아도 되는 사람.’

그 말을 듣기를 바랐다. 그녀의 삶 동안 옆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어머니 외의 타인에게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성 들여 차린 성찬처럼 달콤한 말은 폐부로 스며들어 심장을 톡톡 건드렸다.

“……그렇다면 잘 받을게요.”

“좋아요.”

늘어져 있는 카탈로그를 루스벨라는 꼼꼼히 살펴봤다. 누군가의 취향에 맞춰 고르는 것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게 좋은 것 같아.’

아니, 좋아.

“그게 마음에 들어요?”

“네. 이걸로 하고 싶네요.”

수많은 선택지를 두고 원하는 것을 고르는 일은 즐거웠다.

“알았어요. 이곳에는 내가 연락을 넣을게요. 조만간 치수를 재러 오겠군요.”

“당신도 맞추는 거죠? 이미 골랐나요?”

“아니요. 당신이 고르는 것에 맞추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

“후작 부부로서 같이 공식 석상에 처음 서는 일이니까요. 사이가 좋게 보이는데 맞춤 의상만큼 좋은 게 없어서.”

방금 그녀는 뭘 기대했던 것인가.

“후작 부인의 반지도 그때 끼는 게 좋겠어요. 드레스와도 잘 어울릴 것 같고, 그게 뭔지 아는 사람은 당신을 깔보지 못할 테니까요.”

“반지는…… 쓰고 난 뒤 반드시 돌려줄게요.”

그렇지 않으면 과분한 욕심에 취해 눈이 멀 것 같았다.

‘그는 나를 선의로 도와주고 있을 뿐이야.’

그들의 관계는 친구 사이에 가까웠다. 루스벨라는 차오르는 낯선 감정을 내리눌렀다.

억누르는 것은 잘할 수 있었다.

“돌려주지 않아도 돼요. 계속 끼고 다니는 게 도움이 될 거고.”

“귀한 것이니까요. 혹여나 잃어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그래요.”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야……. 알겠어요.”

루스벨라는 웃었다. 저 아래로 떨어뜨린 감정이, 더는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지 못하도록. 깊이, 침잠하도록.

***

루스벨라의 바람을 들어주기라도 한 것일까. 후작 저에 반갑지 않은 편지가 전해졌다.

“이걸 보낸 이가…….”

“아슬란 윈체스터 공작이네요.”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우편물에 아슬란의 편지가 섞여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것만 따로 빼 와 테이블에 놓고 노려보고 있었다.

“어쩔까요? 불태울까요?”

데니스가 금방이라도 불을 피울 것처럼 말했다. 진짜 해낼 것 같아서 루스벨라가 그를 말렸다.

“아니요. 달갑지는 않지만…….”

“매우, 굉장히, 탐탁지 않죠.”

데니스가 루스벨라보다 더 격한 반응을 보이며 눈살을 찡그렸다. 누가 보면 더럽고 냄새나는 오물이라도 봤다고 착각할 거부감이었다.

“읽어 봐야겠죠. 무슨 목적으로 보낸 건지 알아야 하니까.”

“뭘 써재꼈는지는 몰라도 개소리겠죠.”

‘내가 방금 뭘 들었지?’

루스벨라는 그녀의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데니스?”

“여기 페이퍼 나이프요.”

부드럽고 어여쁜 얼굴이 순진무구하게 미소 지었다.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아니에요. 편지나 읽어 봐요, 우리.”

‘환청을 들었겠지.’

루스벨라는 도저히 저 곱고 상냥한 남자가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잠을 잘못 잤거니, 하고 말았다.

실링 왁스를 뜯어내고 본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데벤테르 소후작 부인께.

저번의 보좌관의 일에 대해서는 미안합니다.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괜찮다면 직접 그대를 만나서 이전에 약혼 관계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부군인 소후작과 함께 편한 날을 골라 주신다면 제가 그에 맞춰 수도로 향하겠습니다.

추신: 너무 늦게 사과하려는 말을 전하려 해서, 미안합니다.

-아슬란 윈체스터로부터-’

‘이제 와서?’

핍박받던 약혼녀 시절에는 그토록 바라던 말이었으나, 지금은 밍밍한 차를 마신 것처럼 싱거웠다.

머릿속은 냉수에 소금을 부은 것처럼 차갑기만 했다.

“저번에 이어서 또 보냈군요.”

징글징글하기도 하지.

루스벨라는 편지의 용건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이번에도 데니스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가 이러는 이유가 뭘까요?”

아슬란에게 루스벨라는 흐르는 공기 같은 사람이었다.

곁에 있어도 있는지도 모르는 존재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녀의 의미는 그것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사과를 구하려 하면서?’

믿을 수 없었다. 아슬란을 사칭하는 어떤 몹쓸 인간이 벌인 일 같았다.

“글쎄요……. 그 인간도 죽을 때가 된 걸까요?”

데니스는 여전히 신 오렌지를 씹은 것처럼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루스벨라는 그의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해서 웃었다.

“설마요. 건강하기로 유명한 핏줄인데 그런 건 아니겠죠.”

‘어쩐다.’

그녀는 고민하며 편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데니스는 약간의 불안감이 들어 루스벨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편지, 어떻게 할 거예요?”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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