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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36화 (37/166)

36화

“……그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지?”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각하께서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하시는데……!”

‘어디서 말이 샌 거지?’

아슬란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가 책임을 물으려던 북부의 귀족들에게 충분한 죗값을 받아 낼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슬란을 찾아온 윈블 자작의 관심은 루스벨라와 그가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데 쏠려 있었다. 아슬란이 루스벨라를 위해 귀족들을 단죄하려는 것을 어물쩍 넘어가자는 뜻도 있었지만.

“이미 말이 퍼졌다면 굳이 숨길 필요 없겠지. 자작, 나를 비롯해 내 전 약혼녀에게 실례를 저지른 이들은 그녀에게 사과해야 할 의무가 마땅히 있네.”

아슬란은 자신이 잘못한 일이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고 싶었다. 그는 떳떳한 모습으로 살았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었으니까.

“데벤테르 소후작 부인이 그걸 원한다고 했습니까?”

“……아직 약속을 잡지는 못 했지. 그렇지만 편지를 보냈으니, 곧 연락이 올 거야.”

‘과연 그녀가 내 연락에 응해 줄까?’

자신 없었다. 아슬란은 그가 만약 루스벨라의 입장이었다면, 다시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각하나, 저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괴로워하십니까? 설령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한들, 이미 다 끝난 일이잖습니까.”

아슬란이 윈블 자작의 눈을 지긋이 바라봤다. 윈블 자작은 하나도 찔리는 것이 없다는 무고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게, 몹시 거슬렸다.

“마무리가 지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게 끝난 일이지, 자작?”

그의 산하에 있는 귀족들의 입장을 이해했다.

‘루스벨라와의 약혼은 철저히 정략에 의한 것이었고, 반기는 이는 없었다.’

약혼의 당사자였던 아슬란을 포함해서, 북부의 그 누구도.

그렇지만 그게 루스벨라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귀족들과, 아슬란이 가족처럼 여긴 가솔들은 합심하여 그녀를 괴롭혔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을 그에게 들켜도 모른 척 덮기에만 급급할 뿐 죄책감 따위는 비추지 않았다.

“각하!”

“자작. 지금 내게 큰 소리를 내는 건가?”

아슬란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윈블 자작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 말했다.

“내가 이 땅의 영주로서 가신들인 그대들을 아끼고 믿었는데, 실수였군.”

“각하…….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아니긴 뭐가 아닌가. 나만 모르면 되는 줄 알았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그녀가 고통받았던 건, 묻혀야 했나.

“……데벤테르 소후작 부부는 반드시 만나기로 결정했네. 답장이 오는 대로, 날을 정해 갈 거야.”

“각하는 이 북부 전체의 명예를 짊어진 분이십니다.”

“그래서?”

윈블 자작은 이것만은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듯 강경하게 말했다.

“건국 기념일이 머지않았습니다. 소후작 부부는 그때 가서 보는 것으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각하께서 ‘개인적인 용무’로 굳이, 수도로 향하시는 것은 추천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아슬란은 윈블 자작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건국 기념일에는 수도로 웬만한 귀족들이 다 모여들지.’

미혼인 귀족 자제들의 짝을 찾기 위해서든, 작위를 계승 받으러 오기 위해서든.

‘그만큼 이목이 집중되니, 데벤테르 소후작 부부도 일을 크게 만들지 않고 넘어갈 거란 계산이겠지.’

루스벨라나 데니스나 평판이 좋지 않으니 좋게 좋게 가지 않겠냐는 바람이 내포된 것이 들여다보였다.

하지만 글쎄. 자작의 바람대로 될까?

오히려 바라보는 눈이 많기에 소후작 부부가 확실한 적의를 가지고 아슬란을 대한다면 일이 더욱 커질 수 있었다. 이를테면 와인 잔을 들어 그의 머리에 뿌려 버린다든가.

‘차라리 그렇게 망신을 당하는 것으로 분이 풀린다면 좋겠군.’

아슬란은 루스벨라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녀가 제게 아직도 분노를 품고 있을 거라 단정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을까.’

아슬란은 아버지인 선대 공작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그를 싫어하는 마음을 잊지 못하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선대 공작 부인은 숨이 다할 때까지 아버지를 원망할 것 같았다.

그러니 루스벨라도 그가 일을 매듭짓기 전까지는 증오를 거두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결정을 내렸다.

“알겠네. 건국 기념일에 수도로 내려가도록 하지.”

윈블 자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슬란의 다음 말에 다시 찌그러졌지만.

“그렇지만 자작, 다음부터 내게 충심을 핑계로 그대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할 때는 좌시하지 않을 것이네.”

“알겠, 습니다.”

자작은 공작의 행보를 지연시켰다는 점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를 보낸 후 아슬란은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편지를 보내지 말 걸 그랬나.”

이래서야 답장을 받아도 또 루스벨라를 무시하는 꼴이 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쉬운 쪽은 그인데, 바른길은커녕 점점 이상한 곳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아슬란은 그를 괴롭히는 이 문제가 어서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

윈블 자작은 씩씩거리며 자택에 도착했다.

“아버지! 오셨어요.”

“아슈라, 사랑스러운 내 딸.”

부녀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아슈라는 반짝이는 눈으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일은 어떻게 되셨어요? 잘 해결됐나요?”

“미안하구나. 절반의 수확만 얻었어.”

그러자 아슈라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자작은 딸의 아쉬움을 달래려 등을 토닥여 주었다.

“제가 공작님과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아버지는 누구보다 잘 아시죠?”

“물론이지. 아비가 네 소망을 이뤄 주마.”

자작 부녀는 틀에 찍어낸 것처럼 똑같이 웃었다.

“그러니까 그 여자와 공작님이 만나게 해서는 절대 안 돼요. 만나더라도 그 사람이 최대한 고통받을 수 있도록, 아버지가 힘써 주셔야 해요…….”

아슈라의 갈색 눈동자가 순간 푸른빛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녀는 ‘고통’을 강조하며 사람을 홀리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루스벨라, 그 여인을 각하와 완전히 떨어지게 해도 내 딸이 공작 부인이 될지는 모르는 건데…….’

현실적인 생각이 떠올라도 아슈라의 저 눈을 보면, 딸의 말대로 모든 게 이루어질 거라는 허황된 믿음이 자라났다.

“저를 믿으시죠, 아버지?”

“그래……. 믿고말고…….”

아슈라가 입을 끌어당겨 웃었다. 그 모습은 누군가와 비슷해 보였다.

***

“작은 주인님, 작은 마님. 후작님께서 본채에 와 계십니다.”

시종과 시녀가 후작이 왔음을 알렸다.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각각의 방에서 소식을 전달받고 아래로 내려갔다.

“왔느냐?”

응접실에는 후작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눕혀진 지팡이가 눈에 띄었다.

‘그새 몸이 더 나빠졌어.’

루스벨라의 눈에 후작의 건강이 전보다 악화된 것이 보였다. 어서 빨리 조치를 취해야 했다.

“마음의 준비는 끝내고 오셨습니까?”

“……그래.”

후작이 주머니에서 작은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데니스는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챘다.

“인장과 후작을 상징하는 반지로군요.”

“맞다. 네게 주려고 왔지.”

그 말인즉슨 그가 후작위를 데니스에게 넘기러 왔으며, 참회 어린 사과를 하러 왔음을 뜻했다.

후작은 숨을 오래, 느리게 쉰 후 떨리는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갔다.

“……네가, 그렇게 힘든 줄은 몰랐다.”

“관심이 없으셨으니까요.”

손때가 묻은 낡은 일기장의 페이지에 꼭 들어가는 말들이 있었다.

‘죽고 싶어.’

‘이런 인생, 뭣 하러 살아가지.’

‘내가 죽어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야.’

보기만 해도 우울함이 넘치던 글의 끝은,

‘그래도 살고 싶다.’

‘살아서, 복수하고 싶어.’

‘얼른 몸이 나아졌으면 좋겠어.’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말들로 채워져 있었다. 중간부터는 사라졌지만.

그리고 가끔, 어머니가 그립다는 말도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것은 원망만 가득했다.

그것들도 어느 순간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절망뿐.

“……우습게도, 내가 과거의 너처럼 병을 앓고 있는 몸이 되니 비로소 너를 이해할 수 있더구나.”

“…….”

“네가…… 나를 죽게 내버려 두고 싶어 했던 것도 알 만하다.”

아플 때 사람은 가장 서러워지고, 나약해지더구나.

죽을 처지가 되어서야 후작은 아들에 대한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깨달았다.

혼자서 외로이 지내는 방은 아무리 넓어도 쓸쓸했다.

“미안하다.”

“…….”

“너무 늦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서 미안하구나. 나는…… 네게 평안을 얻을 자격이 못 되는 것 같구나. 그 말을 하러 왔다.”

후작은 고개를 떨궜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럴 염치가 없었다.

그의 최후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가는 것이 옳은 것 같았다.

“나, 난 이만 가 보마. 앞으로는 별채에 시종들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내가 알아서 할…….”

“약속은.”

데니스가 후작의 말을 잘랐다. 후작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져서 굳었다.

“지킵니다.”

데니스가 루스벨라에게 말했다.

“루스벨라, 선대 후작님의 치유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할게요.”

루스벨라가 후작을 이끌어 다시 의자에 앉혔다. 후작은 그녀의 손을 쳐내지 않았다. 조용히 끌려갔다.

그녀의 손끝에서 따스한 빛이 흘러나와 후작을 감쌌다.

요람에 누워 있는 듯한 안락함이 느껴졌다. 신경을 찌르던 고통이 사그라져 갔다.

‘선대 후작.’

데니스는 그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명확한 어조로 그를 그렇게 불렀다.

“당신이 그동안 내게 한 짓을 깨닫고 뉘우쳤다고 해서, 용서를 바라지는 마십시오.”

“……안다.”

그의 아들에게는 아버지를 용서해야만 할 의무가 없었다.

“남은 생은 편안히 보내게 해 드리겠습니다. 머무르고 싶은 곳이 있다면 말하십시오.”

“별채…… 별채로 충분하다.”

그가 젊은 날 아픈 부인과 자식을 외면하고 정부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이곳이, 마지막을 맞이할 장소가 되어야 했다.

“그러시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데니스의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루스벨라의 치유도 끝났다.

“다 되었어요. 앞으로 매일 꾸준히 치유를 받는다면 큰 무리는 없을 거예요.”

“……고맙다.”

‘너도 내가 미웠을 텐데.’

후작은 오해하지 않았다.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걸.

“데니스가 제게 잘해 준 만큼 보답하고 싶을 뿐이에요. 감사는 그에게 하세요.”

부부가 쌍으로 그에게 냉랭하니 머쓱해졌다.

서로에게만 마음의 문을 열어 둔 채, 두 사람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내 판단이 틀렸구나.’

지펠론 가에서 온 이 여자는 데니스에게 유일무이한 짝이었다.

그가 다른 쪽 주머니에서 작은 함을 꺼냈다.

“받아라.”

“이게 뭔가요?”

“데벤테르 가의 안주인이 되면 끼는 반지다. 후작 부인의 상징이지.”

후작이 함을 열어 루스벨라에게 보여 줬다.

반지는 백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광채가 나는 다이아몬드 하나에 양옆으로 새파란 사파이어가 장식되어 있었다.

데니스가 받은 후작의 반지와 비슷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건 내 것이 아니야.’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일이 끝나면 기꺼이 그녀가 자유롭게 살도록 놓아줄 것이다.

‘그게 내가 원했던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왜…….

“……받아는 두겠습니다.”

이 반지를 끼고 싶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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