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후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데니스에게 비겁하다고 말할 자격이 없어서였다.
“저는 아버지가 너무도 원망스러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복수하고 싶었고, 그럴 힘을 갖추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쇠약해지셨더군요.”
“…….”
“그리고 제가 아버지가 후작으로서 소유한 모든 것을 빼앗아도, 제가 받았던 고통만큼 괴로워하시진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데니스는 시원찮은 복수에 허탈해졌다. 차곡차곡 쌓아 왔던 분노는 갈 곳을 잃고 그의 속을 태웠다.
“나는…….”
“아버지께서는 당당하셨죠. 그리고 되돌릴 수 있다는 희망을 놓치지도 않았습니다.”
후작은 그가 가진 데벤테르 가의 부와 영향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데니스는 그런 그의 모습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를 떠올렸다.
“이미 생이 얼마 남지 않으신 몸이니, 홀로 쓸쓸하게 죽음을 맞으시면 그게 가장 큰 복수가 될 것 같았습니다.”
“…….”
아버지를 죽게 두려 했다는 천인공노할 이야기를 하면서도 데니스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감정이 과잉되어 넘치기는커녕 고요한 수면처럼 잠잠했다.
‘정말 내가 그대로 죽어도 상관없었던 거야.’
후작은 그 사실을 깨닫고 오싹해졌다. 루스벨라가 그의 변화를 감지하고 말을 덧붙였다.
“이건 후작님께 드리는 기회입니다.”
“기회라고…….”
“데니스에게 진심으로 사과해 주세요.”
진심을 담아 사과하는 것. 그것을 두 달 남은 인생을 멀쩡하게 보내는 것의 대가로 주는 것이…… 후작은 어려웠다.
그는 자신의 병약했던 아들을 돌보지 않았고, 미안해하지도 않았기에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잠시 침묵하는 시간이 지나고, 후작이 말했다.
“……잠시 시간을 좀 다오.”
“그러시죠. 참고할 것이 필요하시다면 이걸 드리겠습니다.”
데니스가 낡은 일기장을 꺼냈다. 꼬질꼬질한 것이 손때가 여간 탄 게 아니었다.
“제가 쓴 일기장이니, 읽으신다면 제가 아버지께 왜 이렇게까지 하게 되었는지 아실 겁니다.”
“……알겠다.”
“마음의 준비를 마치시면 본채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데니스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일어났다. 루스벨라도 같이 일어나 걸어갔다.
“그냥 묻어 두어도 되었을 것을…… 왜 나에게 알려 주는 친절을 베풀었느냐?”
후작의 말이 둘의 발목을 잡았다. 두 사람은 같이 고개를 돌려 후작에게 말했다.
“이 사람이 제가 그러길 원했으니까요.”
“이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죽게 놔두는 일로 후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런가…….’
후작은 두 사람의 답을 듣고 자신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의 첫째 아들은 그 때문에 아비를 죽게 내버려 두고 싶은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멋대로 경멸하고 폄훼했던 여자는 자신이 버린 아들을 진정 위하고 있었다.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갔다.
다시 혼자 남겨진 후작은 그 모습을 보며 외롭다고 느꼈다. 그의 곁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
한편, 데니스에게 잔뜩 약이 올라서 북부로 돌아간 보좌관은 아슬란을 만나고 있었다.
일이 어떻게 되었냐는 아슬란의 말에 보좌관은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 분통을 토해 냈다.
“각하, 데벤테르 소후작은 오만방자한 자입니다. 그자는 각하를 모독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는 무도한 인간이었습니다.”
“…….”
아슬란은 우선 잠자코 보좌관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보좌관은 아슬란이 그를 못마땅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각하께서 직접 소후작과 소후작 부인이 사는 곳으로 내려와야 맞지 않겠냐고 말하더군요. 각하가 얼마나 바쁘신데 어찌…….”
“그만.”
아슬란이 보좌관의 말을 끊었다. 그가 피곤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서 결국 뭐라고 하고 왔나.”
“당연히 소후작이 후회할 거라고 했…….”
“후회는 내가 해야겠지, 보좌관.”
“……예?”
보좌관의 표정이 밀다 만 반죽처럼 변했다. 그가 모시는 공작이 데니스가 장담했던 것처럼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다…….
‘왜?’
“공작님이 뭘 그렇게까지 잘못하셨다고 그들에게 굽혀야 합니까?”
“잘못했지. 내 전 약혼녀였던, 이제는 데벤테르 소후작 부인이 된 그녀에게.”
‘내가 어리석어서 무고했던 약혼녀를 가장 잔인하게 내쳤어.’
보좌관은 여전히 아리송한 낯이었다. 아슬란은 자신의 잘못을 말할 수 없어 괴로웠다.
‘그녀에게 잘못한 귀족들을 벌하기 위해서는 입단속을 해야 하니까.’
귀족은 자신의 허물을 가리는 데 누구보다 빠르다. 그 죄가 자신을, 가문을 덮치기 전에 증거 인멸을 서두르고 아무 잘못도 없었던 듯이 멀쩡한 척을 잘했다.
그것이 귀족으로 태어난 이상 알게 되는 필수적인 상식과 같은 일임에도 아슬란은 제 가신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잘못이, 죄가…….’
루스벨라에게는 얼마나 큰 고통으로 다가왔을지 그는 짐작할 수 없었다.
보좌관은 그의 말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제, 제가 잘못한 것입니까?”
‘……이자에게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으니 그 책임은 나에게 있겠지.’
아슬란은 다시 차오르는 죄책감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말했다.
“……내가 말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야. 그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성사시켜서 오라고 명했어야 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길래…….’
보좌관은 제 주군의 잘못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로 실례였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으나 꾹 참았다.
아슬란이 몹시 고통스럽고, 피로한 기색이 완연했기 때문에.
그게 마음에 걸려 보좌관은 우물쭈물하다 물었다.
“다시 가서 말을 전해야 할까요?”
“아니. 오자마자 화를 낸 것을 보아하니 그대가 다시 가면 더 일이 악화될 것 같군. 내가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하겠어.”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아슬란은 머리가 아팠지만, 차라리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옳았을 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슬란은 보좌관을 내보낸 집무실에서 편지지와 깃펜을 꺼냈다. 잉크를 점점이 찍는 행동은 늘 하던 것인데 그녀에게 편지를 쓰려고 하니 낯설게만 느껴졌다.
‘편지에 쓸 말은 정해져 있다.’
공작 측에서 보낸 보좌관의 일로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한다는 말로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편지의 핵심인 본론에는 아슬란이 직접 소후작 부부가 있는 수도로 향하겠다고 적어야 했다.
날짜와 시간 역시도 그들에게 맞춰서. 불편함이 없도록.
받는 이는 루스벨라로 지정할 것이다. 돌이켜 보니 배려로 그녀의 남편인 소후작에게 보좌관을 전령으로 보냈던 건 잘못된 수 같았다.
‘그녀에게 직접 가도록 해야 했나.’
직접 가서 물어보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루스벨라에게 묻는다면 그녀는 전령도, 편지도 원하지 않는다며 외면할 것 같아서 아슬란은 두려웠다.
‘약혼 시절 때 조금이라도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을…….’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으니 섣불리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아슬란은 여인을 가까이 두지 않았다. 그에게는 공작으로서의 일이 더 중요했다.
‘너는 나를 실망시키지 말렴. 아들아.’
어머니의 그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아슬란은 그의 아버지인 선대 공작과 절대 똑같아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선대 윈체스터 공작은 공작 부인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으면서 결혼 후 다른 여인과 바람을 피웠다. 공작 부인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고, 아들인 아슬란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그의 인생에서 어머니는 늘 옳았으니 그도 계속 올바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자연히 여인을 가까이 할 수 없게 되었다.
‘뭐라고 써야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까.’
아슬란은 여인의 마음을 몰랐다. 멀리했고 관심을 끊었으니 편지를 쓰는 것조차 어렵게 느껴졌다.
결국 용건만 간단히 적은 후, 당신에게 너무 늦게 사과하려는 말을 전하려 해서 미안하다고 추가하는 게 다였다.
“이게 괜찮을까.”
보내 봐야 아는 일이니 몰랐다. 시온 외에 루스벨라의 일을 공유한 자가 없으니 오롯이 마음의 부담을 그가 감당해야만 했다.
아슬란은 처음으로 그가 정말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
“아니, 왜 공작님은, 딸꾹. 내게 말을, 끅, 안 해 주시는 거지……?”
“이 자식 취했잖아.”
“누가 좀 집으로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북부로 돌아온 아슬란의 보좌관은 데니스와의 일로 생긴 울화를 해소하기 위해 동료들과 술집에 들렀다.
‘나는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되는 건가?’
스스로 만든 물음이 지워지지 않아 괴로웠다. 이럴 때 마음을 달래주는 건 북부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한 술과 거리낌 없는 대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만취해서 아슬란과의 독대에서 있었던 일을 죄다 떠들고 있었다.
“왜…… 딸꾹. 전 약혼녀분을 다시 찾으시냐고……!”
“진짜 거하게 취했나 봐. 있지도 않은 일을 떠드는 걸 보면.”
“공작님께서 그 악녀를 왜 다시 찾아? 꿈에서 본 일이냐?”
“아니야…… 내가 직접 들었다고. 미안한 일이 있어서, 끅, 사과해야 한다고 그랬어…….”
“……뭐?”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영식이 눈을 치켜뜨고 보좌관의 말에 집중했다.
“정말이야…… 아주 괴로워 보이셨어…….”
“자세히 말해 줘야 할 것 같은데.”
그가 자리를 옮겨 보좌관의 무리 근처로 왔다. 귀족인 다른 자들도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슬금슬금 자리를 잡고 귀를 열었다.
“뭐야. 왜 다들 이리로 모여?”
“꼭 들어야 하는 이야기 같아서. 안 될까?”
“뭐…… 사람이 많아지면 흥이 늘어서 좋긴 하지.”
보좌관의 동료들도 만취까지는 아니지만 꽤 취한 상태였다. 그들은 말리지 않았고, 아슬란이 감추고 싶었던 말이 새 나가는 것을 두었다.
공작이 처한 상황에 대해 몰랐고, 단순히 친구의 주정이라고 생각해 넘긴 말이 가져올 후폭풍은 컸다.
발 없는 말이 넓은 북부 귀족들에게 두루두루 번졌다.
그들은 공작의 보좌관이 허투루 흘린 말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고, 곧바로 루스벨라를 모함하고 괴롭혔다는 증좌가 될 만한 것들을 모조리 치우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각하, 실례지만 이것만은 꼭 대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뭔가?”
“불명예스럽게 파혼당했던 전 약혼녀분을 찾아가시려는 게, 정말이십니까?”
아슬란이 루스벨라에게 사과하려는 시도조차 무의미하게 만들려고 막아서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