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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34화 (35/166)

34화

“어휴, 내 신세야…….”

검은 로브의 사내, 알렉은 투덜거리며 유골 무덤을 빠져나왔다. 아벨이 겁만 주고 쫓아낸 덕분이었다.

‘이번에도 장로가 감시역으로 겁쟁이나 보냈네. 너 같은 애들은 덜덜 떨다가 금방 사라지던데.’

하암. 아벨은 뼈다귀 하나를 손으로 부수며 하품을 했다. 알렉은 그저 무력하게 공포에 질려 있었다.

‘언제까지 붙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해 봐.’

알렉은 그 즉시 음습한 지하를 빠져나왔다. 본래는 아벨에게 자기소개를 해야 한다고 장로에게 전달받았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게 큰 관심이 없었으니까, 괜찮겠지.’

아벨의 반응을 봐서는 장로에게 보고해도 크게 꾸짖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제때 아벨이 어떻게 지내는지만 알리면 된다고 했으니. 걱정은 덜기로 했다.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수락하지 말 것 그랬나?”

알렉은 제게 첩자 역할을 시킨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금발에 불꽃처럼 붉은 눈. 신이 아름다움을 부어 만든 것 같은 곱상한 얼굴.

멀리서 봐도 귀족인 것을 알 수 있는 외양이었다.

‘신전 고위 사제의 혈통을 타고났고, 속세로 나오고 싶어 하는 너라면 가능하겠지.’

알렉의 고용주가 바라는 것은 장로가 그에게 시킨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정보 전달이었다.

‘신전에 거짓으로 충성해. 신임을 얻어 비밀스럽게 관리되고 있는 심층부를 찾아. 가장 중요한 건…….’

백발에 불길한 핏빛 눈동자를 가진 사내를 예의 주시해.

‘반신반의했는데.’

“진짜였잖아?”

알렉은 고용주의 말이 전부 옳았음에 놀랐다. 몇 대에 걸쳐 신전의 사제를 배출했고, 아버지가 고위 사제인 알렉이어도 신전 내에 소수의 비밀 단체가 있음은 전혀 몰랐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더니.’

가문도, 아버지도 알렉이 신전에 귀속되어 고위 사제의 명맥을 잇길 바랐다. 신전의 대신관이 알렉의 성력을 살펴보고서 신을 위해 살아갈 인재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렉은 신께 꾸준히 예배를 드리긴 했어도 적당히 놀고먹는 한량이 되고 싶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모색하던 도중 데니스가 그에게 접근했다. 보수로 어마어마한 금액을 약속하면서.

‘신전 내의 비밀 단체에 들어가서, 소식만 전하면 그 돈이 다 내 거라고요?’

‘그래.’

‘아니…… 저야 좋긴 한데. 그렇게 비밀스러운 곳을 제가 들어갈 수 있을까요?’

‘넌 대사제의 인정을 받았지. 그건 일종의 합격증이다.’

그들의 비밀을 이어받아도 되는 그릇의 조건에 통과했다는 소리다.

‘그러니 분명 그들 사이로 섞여들 수 있을 거다.’

‘뭐…… 안 되어도 실망하진 마세요.’

알렉은 자신이 할 수 있을 거라는 데니스를 믿지 않았다. 돈도 못 벌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렉이 신전에 들어가고, 신실함을 성실히 가장하자 대사제가 어느 날 그를 비밀 단체로 데려갔다.

‘진짜 신을 모시는 곳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알렉.’

그곳의 이름은 에덴이었다.

눈과 귀를 틀어막고 이동해서 단체가 어디에 위치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위치를 모른다고 했는데도 데니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건 됐어. 중요한 건 에덴의 동태니까.’

“신전의 광신도들을 잡으려는 정의의 사도 노릇을 하려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고.”

알렉의 고용주는 오로지 에덴의 구성원들의 움직임에 집착했다.

특히, 아벨이라는 자에 집중하라고 했다.

“이러니까 보수가 좋았지. 속았어, 속았다고.”

알렉은 아벨을 보고 기겁했다. 아벨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되, 괴물과 같은 내면과 힘을 가진 것 같았다.

‘이제 발을 뺄 수는 없어…… 이곳에서 얼른 나가고 싶으니까.’

포기하기엔 돈이 아까웠고 에덴의 광적인 분위기도 싫었다. 알렉은 체념하며 통신기를 꺼냈다.

“아, 아. 들리세요? 고용주님? 아벨을 만났습니다.”

통신기 너머로 데니스의 음성이 곧 들렸다.

“……그는 어땠지?”

“완전 미친놈이에요. 이러다 저 죽는 건 아닙니까?”

“죽진 않을 거야.”

“확실한 겁니까?”

“네 처신에 따라 달려 있겠지.”

‘에라이.’

알렉은 속으로 고용주를 욕했다. 그는 투덜거리면서 데니스에게 보고했다.

“아벨이 수도로 움직일지도 몰라요. ‘원하는 것’이 빨리 오지 않으면 가려는 낌새에요.”

“……그렇겠지.”

“예?”

“됐다. 그 정도면 충분한 수확이야. 고생했다.”

“네. 다음에 또 연락할게요.”

통신기에서 나오는 음성이 끊겼다.

새벽의 데벤테르 후작 저에서 데니스는 통신기를 들고 떠오르는 해를 지켜보고 있었다.

‘곧……. 모두 한 자리에 모이겠군.’

고운 얼굴에 사나움이 감돌았다. 허리춤에 매여 있는 검이 검집을 뚫고 나올 것처럼 흔들렸다.

‘내가 그녀를 지킬 수 있을까?’

그와 그녀를 덮칠 예정된 파란이 닥칠 것이다.

알고 있음에도 데니스는 두려웠다. 그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녀를 위협하는 것들을 안전하게 치울 수 있을지 자신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물러설 수 없어.”

돌이킬 수 없는 흐름 위에 서 있다. 겨우 얻은 기회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해낼 수 있기를.’

그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아침 햇빛을 받아서였을까, 그의 검집에 묘한 빛이 잠시 빛나다 사라졌다.

***

태양 빛이 가장 뜨거워졌을 때, 루스벨라와 데니스는 데벤테르 후작이 있는 별채로 향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홀로 콜록거리며 소파 위에 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후작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경악했다. 병으로 인해 부실해진 몸을 겨우 일으킨 후작이 데니스를 노려봤다.

“아버지께서 아셔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데니스는 후작의 형형한 눈빛 따위는 무시하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후작은 의아해했다.

‘가문을 장악한 이후로 내게 절대 아버지라 하지 않던 녀석이 무슨 꿍꿍이지?’

“뭘 또 말하려는 게냐? 혹시, 저 계집이 네게 일러바쳤더냐? 내가……!”

데니스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에게 계집이라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지 않으셔도 압니다.”

아버지가 아프시다는 것을요.

“맞는 거구나. 저 계집이 네 환심을 얻으려…….”

“그런 거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아프신 것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루스벨라가 이야기하기 전에요.”

“……뭐?”

‘데니스는 주치의를 내게 보낸 적이 없어. 의사를 따로 부르지도 않았지.’

그래서 후작은 데니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들인 데니스가 의사를 부르지 않자 남은 사비를 들여 은밀하게 외부의 의사를 불렀다. 아들을 욕하면서.

‘건재하단 것을 보여 줘야 해.’

후작은 빼앗긴 후작가에 대한 통솔권을 되찾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을 아직도 지지하는 세력이 남았을 거라 자신했다.

죽어도 아비에게 반역을 일으킨 아들을 적법한 후계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후작에게 남은 것은 아집뿐이었다.

작위를 상징하는 인장과 반지를 넘겨주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었다니.

“너…… 아비를 죽게 둘 셈이었어? 어떻게…… 어떻게! 내가 네 아비인데!”

후작은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며 데니스에게 덤벼들었다. 데니스는 피할 수 있었음에도 얌전히 후작에게 멱살을 잡혀 주었다.

“네. 그러고 싶었습니다.”

“너, 너…….”

“아버지도 아시잖습니까. 제가 아버지에게 가진 분노가 얼마나 큰지요.”

그 말에 후작이 단단히 붙잡고 있던 멱살에 힘이 조금 빠졌다. 데니스는 후작의 손이 허물어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제가 지금 아버지를 후작님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제 옆의 루스벨라 때문입니다.”

“……아니라고 부정도 하지 않는구나.”

“아버지의 손아귀 힘이 풀린 것처럼요.”

후작은 몸에 힘이 빠졌는지 휘청거렸다. 루스벨라가 머뭇거리다 그를 부축하려 했다.

후작은 그녀의 손이 뻗어 오자 그것을 강하게 뿌리쳤다.

“저리 치워라! 날 동정하려는 거라면 꺼져! 꺼지란 말이다!”

그는 울고 있었다. 그것이 아파도 자식에게 외면받은 것 때문인지, 아니면 하늘 높이 뻗어 있던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인지는 그만이 알았다.

“후작님. 후작님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두 달이에요.”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후작은 루스벨라의 말이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불렀던 의사는 상태가 나쁘지만 약을 먹고 꾸준히 몸을 보한다면 나아질 거라고 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전 치유사예요. 지난번 후작님의 몸 상태를 보고 굉장히 위중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치유사가 그런 것도 할 줄 알았나?”

루스벨라가 쓰게 웃었다.

“부릴 수 있는 잔재주 중 하나지요. 남아 있는 생명을 보고 바로 치유해야 하니까요.”

루스벨라의 말에는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후작도 그녀가 몇 없는 치유사의 이름을 걸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내가 정말로…… 시한부라고?’

후작은 말을 잃고 터덜터덜 걸어 다시 소파로 가서 앉았다.

“……저기 앉아라. 더 할 말이 많아 보이니.”

루스벨라와 데니스는 맞은편의 소파에 앉았다.

후작은 불안에 떠는 눈으로 루스벨라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 것을 알려 줬다면…… 넌 나를 치료하러 온 것이냐?”

“맞습니다.”

담담한 루스벨라의 말에 후작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죽음의 그늘을 피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엿보였다.

“그렇지만 후작님. 저는 후작님을 완벽하게 건강한 상태로 돌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지?”

“후작님의 몸은 독으로 망가졌습니다. 처음 보는 독이고, 아주 강력한 작용을 한 것 같더군요.”

“내가…… 독을?”

‘누가 내게 그랬지?’

우습게도 짚이는 곳이 많았다. 후작은 인생을 선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설마 네가 먹였느냐?”

후작이 사나운 기세로 데니스를 노려봤다. 데니스는 용의자로 지목받는 데도 무심하게 그것을 흘렸다.

“제가 왜 굳이 아버지를 죽이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괜히 손만 더럽히게.”

“너…….”

“그래도 제가 아버지를 원망하는 건 알고 계셨나 보죠? 제가 독을 먹인 범인이냐고 물어보시고.”

데니스가 후작을 빈정거렸다. 후작은 할 말이 많은 듯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영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만하시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네. 루스벨라.”

데니스가 순한 양처럼 루스벨라의 말을 따랐다. 후작은 그 모습을 보고 데니스가 정말 자신에게 아무 관심도 없다는 걸 알고 조금 씁쓸해졌다.

“제가 치유한다고 하더라도, 후작님은 남은 두 달을 고통받지 않고 살 수 있을 뿐, 그 이상은 무립니다.”

“다른 치유사의 말을 들어 봐야 알겠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겠나? 내가 너의 뭘 믿고서…….”

“치유사의 눈을 믿는 거죠. 다른 치유사에게 가도, 명의를 찾아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능력이 약하다고 해서 보는 눈까지 다르진 않거든요.

더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뭘 바라는 거냐?”

후작은 루스벨라의 말을 듣고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대가 운운하던 그녀가 쉬이 고통을 면할 치유를 하지 않을 거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본론으로 빠르게 들어가죠. 후작님이 미루고 미뤘던 작위 계승을 데니스에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 이게 목적이었겠지.’

예상은 하고 있었다. 몸이 망가지고 초라한 신세가 된 그에게 남은 귀한 것이 그것 말고는 없었으므로.

“여기에 추가로 더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죽을 날을 목전에 둔 아픈 늙은이에게 뭘 더 뜯어가려는 거냐.”

대답은 루스벨라가 아니라 데니스로부터 나왔다.

“진심 어린 사과를 원합니다.”

후작의 눈이 커졌다. 데니스는 차분한 태도로 이어서 말했다.

“아버지께서 제가 실패작이라는 이유로 방치하고 학대받는 것을 방관한 죄를 진정으로 참회하시면, 아버지를 그녀가 치유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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