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33화 (34/166)

33화

치유사의 눈은 특별했다. 그들은 마치 의사가 진찰을 하는 것처럼 아픈 이의 상태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러니 숨길 수 없었겠지. 눈에 훤히 보이니까.’

아픈 이를 지나칠 수 없었을 테니까.

전자는 맞지만, 후자는 틀렸다.

루스벨라는 후작이 데니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고민한 것이었다.

“후작님의 상태가 나빠요. 길어야 두 달이에요.”

“…….”

“의사가 계속 옆에 있어 줘야 할 것 같았는데, 저택의 주치의는 별채로 가지 않았어요.”

알고 있었다.

모르지 않았다.

“네.”

“후작님이 약을 가진 것으로 봐서는 몰래 의사를 부른 것 같긴 한데……. 그걸 당신이 모를 것 같지는 않았어요.”

후작 저는 이제 온통 데니스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후작이 아무리 자기 상태를 감춘다고 하더라도, 데니스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후작님을 일부러 내버려 두고 있나요?”

루스벨라가 더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데니스는 그녀가 진짜 묻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가 그의 아비를 죽이려 드는 것이냐고.

이빨 빠진 호랑이를, 그가 영화를 누렸던 장소에서 천천히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두고 보고 있었냐고.

그것이 당신이 방관으로 그를 학대한 후작에 대한 복수인지를 묻고 있었다.

‘아까 묻고 싶었던 건 이것이었구나.’

그는 생각의 뭉치를 정리하고 차분해졌다. 그런 그의 모습에 오히려 루스벨라가 조바심을 냈다.

“내가 괜한 걸 물었나요? 그렇다면 미안해요.”

“아뇨, 그건 아니고요. 루스벨라는 잘못한 게 없어요.”

‘어쩐다.’

데니스는 당혹스러웠다. 동시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명을 달리할 것을 알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의사를 부른 적은 없었다. ‘이번에는.’

“길어질 이야기 같으니까, 시간을 좀 줄래요? 저녁 먹고 나서.”

“알았어요.”

루스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니스는 여전히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나를 경멸하고 있지 않아.’

그를 향한 염려하는 눈빛을 보았다. 더불어 조심스럽게 그녀가 먼저 그의 손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을 거예요.”

그 작은 손짓이 포근하고 따스해서, 그것만으로도 그는 행복했다.

***

식사를 마친 루스벨라는 데니스를 따라 이동했다. 데벤테르 후작 저에서 가장 구석지고 음침한 방으로.

굽이굽이 뻗어 있는 복도를 따라 걷자 나오는 방이었다. 찾는 게 힘들 것 같았다.

“여긴 어딘가요?”

“내가 소후작이 되기 전까지 쓰던 방이에요.”

그곳은 데니스가 어린 시절을 누워서 보낸 그의 방이었다. 허름하고 비좁아서 어느 하인의 방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데니스가 하인을 시켜 가져다 놓은 안락한 의자는 온통 무채색이고 음울한 방 안에서 유독 튀었다. 방이 깨끗이 치워져 있는데도 그랬다.

“거기 앉아 있어요. 불 좀 붙일 테니까.”

데니스는 벽난로에 장작을 밀어 넣고 불을 붙였다. 노련한 모습이었다. 금세 불이 붙었고, 활활 타올랐다.

타닥. 타닥.

‘따뜻하다.’

후작 저의 온도는 리스냐 때처럼 마도구를 이용해서 가장 쾌적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온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것도 들어요.”

핫초코와 마시멜로였다. 데니스는 벽난로 근처에 마시멜로 꼬치를 세워 두고 잘 익은 것을 루스벨라에게 건넸다.

“맛있어요.”

달콤한 맛이 입 안에 돌자 긴장이 풀어졌다. 데니스는 루스벨라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서 의자에 앉았다.

“내가 루스벨라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처럼, 루스벨라도 내 이야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죠.”

“네.”

“내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를요.”

“……알아요.”

너무 병약하게 태어난 탓에 아버지인 후작은 그에게 실망했다. 정부를 들여 다른 아들을 보았고, 만족했다.

그리하여 그는 질긴 명줄을 잡고 살았다. 그의 어머니인 후작 부인이 일찍이 광증으로 세상을 떠나도 계속, 혼자.

‘이곳에서 줄곧 혼자.’

이렇게 자란 것이 용할 일이었다.

“이 방에서 난 매일같이 기도했어요. 거짓말처럼 건강해지게 해 달라고. 그리고…… 나를 괴롭혔던 가족 같지도 않은 가족에게 복수하게 해 달라고.”

씁쓸한 이야기에 핫초코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의 이복형제들은 적당한 돈을 주고서 내보냈지.’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살려서 멀리 보냈다.

루스벨라는 데니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아버지의 정부들도 이복동생들이 나갈 때 같이 보냈어요.”

그렇지만.

“아버지에 대한 복수는 내가 가문을 물려받는 것으로는 부족했어요.”

데니스는 데벤테르 후작이 미웠다. 직접적으로 그를 골탕 먹이거나 때린 이복동생들이나 정부들보다 그가 원망스러웠다.

후작은 데니스에게서 어머니를 앗아 갔다. 어린 시절에 받았어야 했을 사랑도, 행복도 주지 않았다.

후작은 무책임한 방관자였다.

“항상 송장처럼 겨우 살아가는 나를 아예 잊고 살았으면서, 막상 내가 건강해지니 바로 간섭하려 들고.”

데니스가 후작의 모든 권력을 빼앗았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본인이 아비이니 아들인 그가 복수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네 복수는 이미 다 끝난 게 아니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서러웠던 순간들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하는 게 싫었다. 사무치게 미웠다.

“그래서 그 사람도 나처럼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 주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아닌 사람 취급을 당하니 그제야 복수하는 맛이 났어요.”

“……후작님이 앓고 있는 병은 당신이 그런 게 아니죠?”

루스벨라가 물었다. 그녀가 본 후작의 병은 울화가 쌓여 온 것이 아니었다. 자연적으로 노화가 되어 생긴 병도 아니었다.

“그건 독을 먹여 생겨난 병이었어요.”

독을 먹인 게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데니스가 후작에게 독을 먹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 죽였을 거야.’

위장할 방법은 많았을 것이다. 귀족에게도 날벼락 같은 죽음은 닥치는 법이었으니까.

“맞아요. 그건 내가 아니에요. 하지만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데니스의 말끝이 흐려졌다. 벽난로의 불이 잠시 흔들렸다. 루스벨라가 말했다.

“패륜이에요.”

“네. 패륜이죠.”

그는 무덤덤한 대답을 내놨다. 미움받을 각오는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당신 심정을 이해해요. 나라도 그러고 싶었을 거예요.”

“…….”

그녀는 후레자식인 그를 옹호해 줬다. 그게 기뻤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났다.

‘기뻐하면 안 되는데…….’

그녀는 나처럼 더러워지면 안 되는데.

그렇지만 외로웠던 그에게 공감은, 너무, 달콤해서.

‘더 듣고 싶어.’

루스벨라가 따뜻한 말을 그에게 더 해 주길 바랐다. 그녀가 괜찮다고 말해 주면, 그도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슴께가 아팠다. 그는 눈썹을 조금 찡그리기만 했다.

“내가 걱정한 건 당신이 후회할 일이 생기는 거였어요.”

당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짊어지고 갈 수 있을까, 하는.

“…….”

“다행히 독은 당신이 한 짓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됐어요. 지금부터 제가 치유하면 당신이 아버지를 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족쇄를 차지 않아도 돼요.”

“……그럼 나는 아버지에게 무엇으로 복수할까요.”

데니스가 슬프게 웃었다. 웃고 있는데 우는 것 같았다.

“후작님의 상태는 이미 너무 늦어서 제가 당장 치유한다 해도 두 달을 넘기진 못해요. 그저 남은 시간을 고통 없이 보낼 수 있게 할 뿐이죠.”

그리고 이건 치유사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이에요.

“그 말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추하게 죽고 싶지 않다면, 당신에게 애원이든 참회든 사과든…… 뭐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받아 내라고 말해야겠죠.”

“그 사람은 싫어하겠군요.”

못마땅해하던 아들에게 편안한 남은 생을 보장받기 위해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후작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빨 빠진 호랑이에게는 자존심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에게는 그것이 가장 소중할 것이다.

그 후로 그들은 잠자코 벽난로의 불을 감상했다. 시간이 지나자 불은 꺼졌다. 까맣게 탄 숯만이 남았다.

“이제 침실로 자러 가요.”

데니스가 다시 앞장서려는데, 루스벨라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당신 손을 더럽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알았어요.”

“어쨌거나 당신은 날 도와주고 있으니까요. 집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고.”

“네. 당신이 원하는 만큼 실컷 이용해 주세요.”

데니스는 웃었다. 어릴 때 그토록 무서웠던 어두운 복도가 그녀와 있으니 전혀 무섭지 않았다. 평온해졌다.

“등골 빼 먹히면 어쩌려고요. 그런 말도 하지 마세요.”

“네에.”

‘당신과 지금처럼만 있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러면 더 바랄 것이 없겠는데.

그건 어렵겠죠.

‘그놈을 만나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해야겠어.’

데니스는 소망했다. 소중한 루스벨라를 지킬 수만 있게 해 달라고.

‘그걸 위해서 나는 어찌 되어도 좋으니까.’

“잘 자요, 루스벨라.”

“당신도 잘 자요.”

심란했던 밤이 끝났다.

***

“흐흥~ 흐흐흥~.”

축축하고 서늘한 어딘가의 지하에서, 한 소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소년은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아벨 님, 그런 것 좀 갖고 놀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왜 안 되는데?”

검은색 로브를 입은 사내가 한숨을 쉬었다. 언뜻 보기에는 소년의 보호자 같았다.

“불길하니까요. 아벨 님은 무섭지도 않으세요?”

“난 괜찮아. 몇 번이나 와 봤는걸.”

“제가 안 괜찮아요…….”

검은 로브의 사내가 우는 척을 하며 고충을 호소했다.

“익숙해지면 괜찮아져. 너도 많이 와 봐.”

“싫어요…….”

“싫어?”

소년의 미성이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다음에 들린 것은 청년의 굵고 낮아진 목소리였다.

“내가 싫어? 너도 그것처럼 만들어 줄까?”

데구루루.

소년이 가지고 놀던 것이 굴러왔다.

“히익……!”

검은 로브의 사내가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굴러온 것은 사람의 두개골이었다.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낙서가 되어 있는 누군가의 유골이었다.

“아, 아닙니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사내가 납작 엎드려 진짜 우는 소리를 냈다. 백발의 소년, 아니 청년의 검붉은 눈이 사납게 빛났다.

“내 신경 건드리지 마. 난 누가 날 싫어하는 게 그렇게 참을 수가 없더라.”

청년, 아벨의 손목에 걸린 팔찌가 푸른빛을 내뿜었다. 검은 로브의 사내는 그 푸른빛이 죽도록 무서웠다.

“잘해, 알았지? 그러라고 보내진 거잖아.”

“네. 네…… 잘하겠습니다.”

아벨이 그 말에 싱긋 웃었다.

“옳지, 그래야지.”

“도, 돌아가실 건가요?”

“아니. 조금 더 놀고 가려고.”

그러고서 아벨은 어둠 깊숙이 들어갔다. 그가 두른 푸른 보석의 팔찌에서 빛이 떠올랐다.

‘언제 봐도 으스스한 곳이야.’

검은 로브의 사내가 눈을 힐끔 떠 본 광경은 끔찍했다. 사람의 유골이 셀 수 없이 많이 쌓여 있었다. 세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많이.

아벨은 그 유골들의 무덤을 유유자적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푸른 보석의 팔찌에서 나오는 빛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작은 한 점이 깨졌다.

“이런…… 새로 구하기 어려운데.”

아벨은 뒤로 돌아 사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에게 물어봤다.

“새로운 보석은 어디 있어? 구해다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잖아.”

무능하게 놓친 건 아니지?

“그게…… 아무래도 수거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장로님이 전하라 하셨습니다.”

“기다리는 건 질색인데.”

아벨은 다시 소년으로 돌아가 툴툴거렸다. 사랑스러운 외양이었지만 사내는 겁에 질려 떨었다.

“장로에게 전해 줘. 너무 기다리게 하면 내가 못 참고 나설 수도 있다고.”

아벨이 킥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의 고개는 수도가 있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