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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32화 (33/166)
  • 32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과하고 싶으면 직접 와야 한다고 말했지. 공작이, 직접. 그녀를 부르지 말고.”

    보좌관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개졌다. 말을 전달하기 위해 보내진 가신은 그가 모시는 주군을 대신하여 보내진 대리였다.

    하니 보좌관을 격의 없이 대하는 데니스의 태도는 윈체스터 공작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얼마 전에야 겨우 후계 자리를 차지한 주제에.’

    하룻강아지가 북부의 맹주로서 군림하는 윈체스터 공작과 맞먹으려 한단 말인가.

    “공작님은 바쁘십니다. 그러니 저를 보내서 말을 전하셨죠.”

    “누가 모르나? 그런 건 귀족이라면 다들 아는 상식인데.”

    ‘당신이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이야기했겠어?’

    보좌관이 무례함을 돌려 비꼰 것을 데니스는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적의가 흘러나왔다.

    “그게 사과하는 자가 마땅히 취해야 할 예의 아니던가?”

    “그건 그렇지만…….”

    보좌관은 황당했다. 사람 간의 도덕을 따지기 전에 이 땅에는 신분제가 공고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 귀족의 작위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공작이 고작 사과 따위를 하기 위해 쉬이 움직일 수는 없었다. 높은 직위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로 인한 일거리가 가득했으니까.

    “공작 각하께서는 할 일이 많으십니다. 소후작님께서도 아시겠지만, 그분은 북부의 경계를 지키기 위해 매일 애쓰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가 저지른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러 몸소 행차하실 수도 없단 말인가?”

    “……말이 지나치십니다. 이 이상은 참아 드릴 수 없습니다.”

    데니스는 시종일관 공작의 행태를 빈정거렸다. 그는 공작이 싫었다. 예전과 다르게 사과하겠다고 나선 것이 같잖았다.

    ‘몰랐으면 평생 그 추운 북부에서 나오지 않았을 인간이.’

    사과를 구한다고? 그녀에게? 직접 와서 머리를 숙이지도 않고?

    “나야말로 참을 수가 없는데. 공작이 이러라고 당신을 보낸 게 아닐 텐데 말이야. 사과를 하겠다면, 잘못한 쪽은 공작 측이 맞는데. 내 앞에 있는 전령께서는 부끄러운 기색은커녕 자존심이 긁힌 것에 못마땅해하고 있으니.”

    “소후작께서 먼저 시비를…….”

    데니스는 그 말을 기다렸단 듯이 바로 덧붙였다.

    “그래. 윈체스터 공작께서도 내 아내 되시는 분께 먼저 잘못을 하셨지.”

    “…….”

    “그러니 어쭙잖은 자존심은 접어둬야지. 사과하는 쪽이면서 베푸는 척은 집어치우고.”

    “소후작님!”

    보좌관이 데니스의 신랄한 말들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언성을 높였다. 데니스는 그가 소리 지를 때 제 두 귀를 막았다.

    “난 건강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환자라.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면 몸 상태가 나빠져서.”

    아아, 벌써 현기증이 오는 것 같아.

    데니스가 과장된 몸짓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홍옥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눈꺼풀 밑에 숨기고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어딜 봐서.’

    공작의 보좌관은 데니스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로서는 기가 막히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각하께서 최대한 정중하게, 미안하단 말을 전할 자리를 만들어야 하니 나를 보내셨지만.’

    윈체스터 공작 가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이었다. 북부를 지키며 제국에 충성하는 공로를 높이 사 황제조차도 무시할 수 없는 고위 가문.

    ‘후작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돼.’

    그래서 보좌관은 차마 비굴한 태도를 취할 수 없었다. 그는 윈체스터 공작의 사람이란 것에 자긍심을 가졌으므로.

    “제이크, 거기 내 약 좀 가져와 줘. 기본도 갖추지 못한 전령 때문에 머리가 몹시 아프군.”

    “곧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데니스의 수하, 제이크는 익숙하게 그 명을 따랐다. 진짜 약이 건네졌다.

    공작의 보좌관을 속 터지게 해서 죽이려는 계획이라도 미리 짠 것 같았다. 데벤테르 소후작은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다.

    부드럽게 흩어져 있는 금발은 반짝반짝 윤이 났고, 피부는 광택이 돌았으며, 무엇보다 그의 몸은 군살 없는 탄탄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이가 병약한 환자 행세를 하고 있으니 대놓고 엿을 먹이려는 행위가 아님을 모르면 바보였다.

    “……일어나 보겠습니다.”

    “벌써 가나? 아직 공작이 이곳에 친히 왕림한다는 약속을 받아 내지 못했는데.”

    데니스는 끝까지 그를 향해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공작의 보좌관은 이를 갈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날짜와 장소를 정해서 만나러 오신다고 했건만, 소후작께서 그토록 방자한 태도로 눈살을 찌푸리시니 더 할 말이 없군요.”

    “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그대가 나보다 더 까탈스러운 것 같은데.”

    “후회하실 겁니다.”

    보좌관은 아슬란에게 이 일을 절대 좌시해서는 안 된다고 고할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 역시 북부에 장사꾼들이 퍼뜨린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루스벨라가 약혼녀로 공작의 성에 머무를 때 그녀가 내쫓기자 반가워했던 사람이었다.

    “후회는 윈체스터 공작의 몫이지. 그리고 당신도 후회할 거야.”

    데니스는 아슬란의 죄책감을 알았다. 그가 정말로 루스벨라에게 가해진 고통에 미안함을 느낀다면, 필시 저 보좌관이란 자를 책망할 것이다.

    이 말만큼은 비아냥을 담은 공격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가겠습니다. 배웅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던지.”

    그러나 속사정을 잘 모르는 보좌관이 그것을 알 리가 있나. 빠르게 후작가 소유의 살롱을 빠져나갔다. 벌집이 건드려진 꿀벌처럼 독이 톡톡히 올라서 가는 것을 보니 공작의 반응이 기대되었다.

    “과연 뭐라고 할까. 여기서 그놈의 고고한 북부의 수호자 이미지를 지키려 한다면 정말 실망할 거야.”

    데니스가 창틀에서 멀어졌다. 아슬란이 주사위를 던질 차례였다. 그가 정답을 고르길 바라며 데니스는 살롱을 떠났다.

    “루스벨라에게 오늘 일을 전부 말해야지.”

    그는 그가 가진 비밀만 제외한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말하고 공유할 것이다. 특히나 아슬란과 관련한 일이라면 무조건.

    ***

    “루스벨라, 저 왔어요.”

    “…….”

    루스벨라는 후작과의 일을 골똘히 되새기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데니스가 발끝을 세워 살금살금 걸어오는 것을 몰랐다.

    “루스벨라?”

    “헉!”

    “여기 선물이에요.”

    “프리지어네요. 고마워요.”

    그가 샛노랗게 핀 프리지어를 한 아름 사 와 그녀에게 안겨 주었다. 품 안이 꽃향기로 가득해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었어요?”

    ‘당신이랑 당신 아버지 생각이요.’

    이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데니스가 후작과의 문제를 민감하게 여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버지인 지펠론 백작을 끔찍하게 여기는 것처럼.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둘러댄 답은 너무 대충인 것 같았다.

    ‘없는 말을 한 건 아니니까.’

    루스벨라는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을 잊지 못했다. 그렇지만 막상 수도로 올라오니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결정한 것이 없었다.

    ‘붕 떠 버린 신세가 되어 버린 것 같아.’

    루스벨라는 의식하지 못했다. 데니스가 그녀의 기분을 기민하게 살피고 있다는 것을.

    그가 꺼낸 말은 생각지도 못한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슬란 윈체스터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해요.”

    “……!”

    아슬란, 아슬란 윈체스터.

    오랜만에 듣는 무정한 전 약혼자의 이름에 루스벨라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왜죠?”

    그 짧은 질문 하나를 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가 나를 왜 찾는 거지?

    무슨 이유로?

    ‘우린 이미 깨끗하게 끊어진 사이가 되었는데.’

    아슬란과의 인연은 끝났다. 그런데 그가 그녀를 보자고 하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북부에 있는 동안 체득된 공포심이 올라왔다. 그리고 아주 상반된 것 또한 느껴졌다.

    ‘싫어.’

    그것은 존재 자체를 보고 싶지 않다는 혐오였다.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다면서 보좌관을 보냈어요. 날짜를 잡아 적당한 장소에서 보고 싶다면서.”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잔뜩 약 올려서 쫓아 버렸어요.”

    응?

    “약 올렸다고요?”

    “네.”

    데니스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천사처럼 웃고 있어서 악랄한 말솜씨로 아슬란의 보좌관을 물 먹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저 잘했나요?”

    “어…… 음…… 글쎄요.”

    너무 당황해서 루스벨라는 말을 어물거렸다. 그러자 데니스가 울상을 지었다.

    “역시 당신에게 미리 이야기할 것 그랬나요? 만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저 혼자 간 거였는데…….”

    순식간에 루스벨라 앞에서 처연한 강아지가 되어 버린 데니스는 영악했다.

    그가 윈체스터 공작으로부터 보좌관이 올 거라고 연락을 받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본인의 죄책감을 1초라도 더 빨리 덜고 싶었나 보네.’

    데니스가 화가 났던 점은 공작의 보좌관이 만날 상대가 루스벨라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굳이 정성 들여 보좌관에게 시비를 건 데에는 그 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적어도 8할의 지분을 가질 정도로 불쾌했다.

    ‘아슬란은 별생각 없었겠지. 내가 루스벨라의 법적 배우자니까 그랬을 거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후작 부인인 루스벨라 혼자서 아슬란을 만나기에는 위험했다. 루스벨라가 파혼당한 사실은 이미 수그러든 가십거리였으나, 언제든 다시 불을 피울 수 있는 장작개비이기도 했다.

    파혼했던 상대가 결혼해서도 다시 만나면 구설수가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피해는 루스벨라에게 향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아슬란 나름의 배려였던 셈이다.

    ‘그건 알겠지만 아슬란…… 넌 정말 머저리야.’

    “미안해요. 그래서 숨기지 않고 다 말해 주려고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멍청이. 루스벨라에게도 편지를 보내든가, 아니면 보좌관에게 일러 반드시 두 사람이 듣기를 바란다고 해 두지 그랬어.’

    너는 어떻게 어리석은 면모가 변하지 않을까.

    데니스는 입으로는 미주알고주알 공작의 보좌관과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으며 머리로는 아슬란을 욕했다.

    “나는 괜찮아요. 그리고 대신 쫓아줘서 고마워요.”

    루스벨라는 다 듣고 난 후 그렇게 말했다. 데니스는 기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음, 대비는 해 둬야 하는 편이 좋겠어요. 공작이 직접 이곳에 올 수도 있으니까요.”

    ‘아마 그럴 거예요.’

    건국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성대한 연회에는 북부에 웅크리고 있던 윈체스터 공작조차 들러야 했다.

    데니스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날이 될 것이다. 루스벨라가 그녀의 전 약혼자가 후회하는 것을 보게 되고, 작위를 정식으로 받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자식도 나오겠지.’

    루스벨라가 ……하게 된 원인인 그놈을.

    데니스는 계속 웃으며 루스벨라의 말에 대꾸했다.

    “소식이 올 때까지 기다려 봐요. 그땐 당신에게 바로 알릴게요.”

    “알았어요.”

    그렇게 대화가 끝날 줄 알았다.

    “저, 데니스.”

    데니스가 숨김없이 루스벨라에게 모든 것을 말해 줘서, 그녀는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

    “데벤테르 후작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당신이 괜찮다면요.”

    “……아.”

    데니스는 괜찮았다. 대화 주제가 괜찮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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