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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31화 (32/166)

31화

데벤테르 후작이 약속 시간으로 지정한 내일 낮 3시는 데니스가 잠시 외출을 하러 나가는 때였다. 호랑이가 사라진 틈을 타서 여우가 왕 노릇을 하기에 제격인 시간대였다.

“올지 모르겠군.”

후작이 별채의 응접실에서 홀로 손목시계를 보며 앉아 있었다. 시곗바늘이 3시를 가리키기 일보 직전이었다.

얼굴을 본 적 없고, 결혼 상대로 계속 반대했던 여자. 이제는 이미 가문의 일원이 된 루스벨라를 후작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이용 가치가 있지.’

후작이 찻잔을 쥐고 있던 손 위로 핏줄이 벌겋게 돋아났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데니스 그 자식이 아비인 내게 감히.”

자신의 처지가 고작 뒷방 늙은이가 된 것에. 그리고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아들이란 녀석이 병에 든 아비를 위해 해 주는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자 차갑게 식혀진 차를 마셨다. 식도를 따라 넘어가는 차의 양이 늘어도 속에 든 분노는 줄어들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데벤테르 후작님.”

그때, 홀로 루스벨라가 후작을 찾아왔다.

***

“혼자 왔군.”

“혼자 오라고 보내시지 않았나요?”

“나는 그런 말을 편지지에 써 보낸 적이 없어.”

“그렇지만 제가 혼자 오길 기다리셨겠죠.”

루스벨라도 차를 마셨다. 완만한 곡선의 원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삭막한 공기가 스쳐 지나갔다.

별채는 한때 후작이 정부들과 함께했던 자리치고는 을씨년스러웠다. 후작의 눈이 서늘하게 루스벨라를 향했다.

“말이 건방지구나.”

“아니라고 하지는 마세요. 일부러 데니스가 없는 시간대에 저보고 오라 하셨잖습니까.”

루스벨라가 자연스럽게 데니스의 이름을 담자 후작은 이를 악물었다.

“네가 뭐라고 내 아들 이름을 입에 올리지? 팔려 온 주제에.”

시작부터 후작의 말은 거칠었다. 루스벨라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런 말은 숱하게 그녀의 인생을 할퀴고 지나갔던 바람 중 하나였다. 새삼스레 모욕적이라며 눈물을 보이기도 아까웠다.

“네. 저를 지펠론 백작가에서 데니스에게 정략결혼의 용도로 팔았죠.”

“네 신세를 알면서도 뻔뻔하게 낯짝을 후작 가에 들이밀 수 있다는 게 놀랍구나. 너는 수치스럽지도 않느냐?”

후작은 사나운 기세로 루스벨라를 찌르고 꿰뚫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얻는 이득이 있으니 이런 수고를 들이는 것이겠지만. 루스벨라는 그가 하는 말에 그저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게 다였다.

“수치요? 지금 수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루스벨라가 소리 없이 웃었다. 후작은 조금 당황했다. 그가 대면하고 있는 이 어린 여자는 진실로 겁을 먹지 않았다. 도리어 웃었다.

그런데 그 웃는 모습이 꼭 사람이 아닌 인형이 어색하게 웃는 것 같아서 기이했다.

“수치를 아시는 분이시라면 상황이 이렇게 되게 두지도 않으셨겠죠. 본인을 돌아보지도 않으시고 제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후작이 그 말뜻을 모르지 않았다.

“자식새끼 하나 간수 못해서 이런 처지가 된 것을 비꼬는 거라면 싱겁구나.”

태연한 어조와는 다르게 그의 마른 손에 핏줄이 불거졌다. 찻잔 속의 차가 넘실거렸다.

“아무리 내가 퇴물이 되었다지만 너 같은 것에게 이 가문의 안주인 자리는 못 내준다.”

“너가 아니라 루스벨라입니다. 후작님. 저를 상처 입히시려거든, 더 궁리를 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후작은 혀를 찼다. 그의 며느리가 된 사람은 그가 바란 대로의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속을 다 긁어내고 비워 기워낸 흔적을 고스란히 보이는 이였다.

“본론부터 말씀하시죠. 시답잖은 도발을 받아 기분 좋을 것이 없으니.”

루스벨라가 다 마신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일부러 소리 내어 그릇 위로 올린 것이 틀림없었다.

‘이쪽이 먼저 예의 따위를 걷어찼으니 본인도 조심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는 건가.’

후작은 짜증이 났다. 아직 작위를 계승하지 않았는데도 설치는 그의 적자와 마찬가지로 이 여자가 싫었다.

‘며느리는 무슨.’

흠결 있는 여자를 들이는 것은 그의 자존심에, 그리고 가문을 위해서도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네가 이 저택에서, 후작 가에서 나가길 바란다. 가능하면 평생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면 좋겠군.”

“제가 그렇게 할 때의 대가는 무엇입니까?”

“……뭐라고?”

“대가를 무엇으로 줄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후작님.”

루스벨라가 덤덤하게 후작의 요구를 들어주었을 때의 보상을 내놓으라고 하고 있었다. 후작은 어이가 없음을 넘어 이 여자가 괘씸하게까지 느껴졌다.

“네 볼품없는 가문에 지참금은 넉넉히 지불했을 텐데? 거기서 더 내놓으라는 건 강도짓 아닌가?”

“지참금이 어디 신부에게 돌아가는 돈입니까?”

그렇게 받아친다면 또 할 말이 없었다. 딸은 언젠가 출가외인이 된다. 지참금을 많이 내줘 봤자, 신부에게 남는 건 결혼한 남편이 전부였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 따로 재화를 모아 주지 않는 이상 아녀자가 돈을 모을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그 아비에 그 딸이로군.”

데벤테르 후작은 탐욕에 영혼을 바친 것 같은 지펠론 백작을 떠올렸다. 백작과의 결혼 ‘흥정’은 데니스가 했지만 그에게도 귀가 있었다.

“너도 아비를 닮아서 돈 뜯어가는 재미를 느끼나 보구나. 대가 운운하는 걸 보면.”

“아까도 말했지만, 제게 이 결혼으로 얻은 것은 없습니다. 여기서 내쳐지면 저는 제 몸뚱어리 하나만 있는 셈인데, 그것만 가지고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간단 말입니까?”

루스벨라는 화를 내지 않았다. 후작이 그녀를 모욕하는 문장을 내뱉든 말든 그건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조목조목 그의 말에 반박하며 대화의 흐름 속에서 고요함을 유지했다.

“제가 나가면, 후작님께서는 그를 다른 사람과 혼인시키려는 속셈 아니십니까?”

후작이 손가락 끝을 꿈틀거렸다. 기민한 루스벨라가 그 잠깐의 변화를 눈에 담았다.

“점찍어둔 후보가 이미 있겠죠. 후작님께서 지금 이리 홀대받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해도, 몰래 연락하는 가문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너.”

“루스벨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들으신 바가 있으니 저를 어떻게 본지는 아주 잘 알겠습니다.”

루스벨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무례인 줄은 알지만 후작은 말릴 수 없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리더니 그의 앞에서 멈췄다.

“말로 상처를 입는 것에는 이골이 났습니다. 당신이 제게 오늘 하려던 짓은 어떤 의미도 없는 헛짓거리였다는 말입니다.”

“……이게 내 나름의 자비라는 생각은 안 드나?”

“자비요?”

루스벨라가 그 말에 이번에는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이상했다. 후작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거슬렸다. 그를 향한 조소에는 한 가지 감정만이 채워져 있지 않았다.

‘비틀리고 일그러진 무언가가…… 있는데.’

그걸 무어라 정의하기에는 어려웠다.

“후작님.”

루스벨라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자비는 위선과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랍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게 자비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건 폭력이고 억압이죠.”

안 그렇습니까?

‘지긋지긋해.’

그녀는 이제 이런 자비를 가장한 폭력이 귀찮았다. 질렸다.

익숙하다는 듯 의연하게 말을 받아칠 수 있는 건 그만큼 무뎌졌기 때문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 그걸 자비로 포장하는 건 왜일까요. 자기 자신의 선이 훼손당하기 싫어서?”

저는 그게 싫습니다.

“타인을 상처 입히고 얻은 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

루스벨라는 정말 궁금했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남은 타인의 상처는 그럼 누가 봐줄까. 그게 부당한 일이었다면, 지나간 아픔의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야 허하지 않나.

“날 비난하는 건가?”

“아니요. 비난도 통하는 이에게 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녀는 웃었다. 텅 빈 웃음이라도 웃음은 뒤집어쓰기에 좋은 껍데기였다.

그녀가 몸을 숙여 후작을 잠시 관찰하더니 무어라 속삭였다. 후작은 그 말에 놀라더니 이윽고 화를 감추지 못하여 찻잔 속 남은 차를 뿌리고 말았다.

“아.”

“어디서 그딴 말을…….”

‘차가 식어 있어서 다행이다.’

루스벨라는 태연히 그런 생각이나 했다. 뜨거운 차였다면 비명을 질렀을지도 몰랐다. 그건 싫었다.

“치유사가 남은 생명력을 알아보지 못할 수는 없습니다.”

“난 멀쩡하다! 아직…… 아직은 괜찮단 말이다.”

후작은 바지춤을 더듬어 주머니 속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그것이야말로 루스벨라에게는 자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제까지 버티실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필요하시면 도움을 요청하세요. 대가만 주어져 있다면 기꺼이 들어 드리겠습니다.”

“꺼져라! 너 같은 건 필요 없다.”

후작이 성난 눈을 번뜩여 지팡이를 찾기 시작했다. 데니스와 같은 붉은 눈이 그토록 초라해 보이고 경멸스러울 수가 없었다.

루스벨라는 그가 지팡이를 제게 휘두르기 전에 별채를 빠져나왔다. 악다구니를 쓰는 후작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얼마 남지 않았네. 저 사람.”

길어야 두 달 정도면 고비가 찾아올 것 같았다.

‘그는 후작의 상태를 알고 있을까?’

저택 내에 있는 주치의는 후작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후작은 방치되고 있었다. 그가 몸이 불편한 것을 시녀 아이도 알았음에도 잠잠했다.

마치 후작이 그대로 죽기를 바라는 것처럼. 최소한의 예우만 갖춰 대하고 있었다.

‘그가 제 아버지에게 행하려는 복수가 이것이라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린 패륜이었다.

루스벨라는 데니스에게 이 일에 관해 물어보기로 했다.

***

루스벨라가 후작과 마주하고 있던 때, 데니스는 특별한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용건은, 내 아내와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 이건가?”

그 손님은 북부에서 온, 윈체스터 공작의 사람이었다.

“그렇습니다. 공작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바입니다.”

심부름꾼으로 보내진 자는 아슬란의 보좌관 중 한 명이었다.

‘소후작과 말이 잘 통해서 다행이군.’

그는 내심 겁에 질려 강제로 떠밀려 데벤테르 소후작과 대면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공작의 약혼자였던, 지금은 소후작의 아내인 루스벨라의 일로 앙심이라도 품었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소문처럼 험악하지도 않고.’

소후작의 응대는 평범했다. 최악을 가정하고 왔기에 그 평범함이 훌륭한 대접이라는 착각을 주었다.

“공작님께서는 언제든 자리를 만들어도 좋으시다고…….”

그래서 이대로 술술 일이 풀릴 줄 알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싫은데.”

“네?”

“싫다고.”

데니스가 이때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자세를 바꾸며 말했다.

“진짜 사과를 하고 싶었다면 본인이 직접 왔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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