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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30화 (31/166)

30화

“아, 물론 제 제안은 우리가 합방하자는 뜻을 담은 건 아니에요.”

“당연히 그래야죠.”

데니스가 아침 해는 동쪽에서 떠야 한다는 진리를 언급하는 것처럼 말했다. 루스벨라는 그의 말에 꼬리를 물고 질문했다.

“당연히라니, 왜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요? 데니스, 당신은 나와 그럼 왜 결혼했어요?”

그 많은 지참금을 지펠론 백작 가에 지불했으면서, 결혼식도 성대하게 치렀으면서, 정략결혼이니 필시 나를 골랐을 이유가 있다고 봤는데.

‘후계자를 낳아 줄 여자가 필요해서 그런가 싶어서 경계했었는데.’

그렇다기엔 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데니스는 강압적인 요구는커녕 루스벨라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어미 새처럼 그녀를 지켜봤을 뿐.

그가 제공해 주는 무심한 다정은 좋았으나 날이 갈수록 궁금함은 부피를 늘려갔다.

그녀는 그에게 어떤 존재일까.

“나, 혹시 일종의 보험이에요? 후작님이 어떤 사람이랑 결혼하라는 압박이라도 줘서 방패막이로 삼은, 그런 역할인가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데니스가 깜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데니스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큰소리는 귀를 얼얼하게 했다. 루스벨라는 귀를 막고 그를 나무랐다.

“목소리 너무 컸어요. 난 성인 남성이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 걸 굉장히 무서워해요.”

데니스가 아차 한 얼굴로 넓은 어깨를 주눅 든 고양이처럼 숙였다.

“……미안합니다. 겁을 주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알아요. 당신 믿어요.”

그 말에 데니스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지고 입도 벌어졌다. 루스벨라는 무슨 말을 해도 고요한 호수처럼 아무 반응 없던 사내가 이리 극적인 결괏값을 내놓으니 신기했다.

“왜 그래요? 당신이 내게 나쁠 짓을 한 적이 없어서 그런걸요. 뿌린 만큼 거두어 간다고 하죠?”

당신이 내게 좋은 사람이었으니 나도 당신을 믿는 거예요.

“……당신은 여전히 눈부시네요.”

데니스의 시선이 현재가 아니라 저 끝, 더 먼 곳을 보는 것처럼 흐릿해졌다. 초점을 잃은 그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너는 살아남아.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행복해져. 그게 널 살려 준 보답으로 치자.]

루스벨라는 영문 모를 데니스의 말에 인상만 찡그려졌다. 이 사람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왔길래 이럴까?

‘나도 갇히다시피 자란 편이지만 이 정도로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으로 자라진 않았는데.’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그만이 자신을 알지 말고 그녀도 그에 대해 알고 싶었다.

루스벨라는 자신과 왜 결혼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받지 못했다. 그녀로서는 후에 자유를 찾아 떠나려는 계획을 대비하려면 좋은 일이었지만 데니스의 태도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도 화가 나.’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는데.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떠나고 싶었는데.

이 남자의 존재가 그녀를 그의 곁에서 안주하고 싶게 만들고 있었다. 그게 화가 났다.

“당신에게 나는 뭐죠? 뭘 위해서 나는 이곳에 있는 거죠?”

그녀의 존재 의미를 찾고 싶었다.

데니스는 그런 루스벨라가 폭발하기 전에 먼저 제안했다.

“루스벨라, 약속하겠습니다. 건국 기념일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는 날, 당신이 궁금한 모든 것을 말하겠습니다.”

루스벨라가 궁금한 모든 것. 거기에는 분명 그가 그녀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도 포함이 될 터였다. 그게 기꺼웠다.

“정말 그때는 내게 말해 줄 거예요? 지금 이 순간을 무마하려고 내세우는 거짓말은 아니고요?”

“전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말에 루스벨라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렇다기엔 당신이 나를 왜 이렇게까지 잘해 주는지 알려 주지는 않잖아요.”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알았어요. 그렇지만 내게 숨기는 게 있다는 건 확실하네요.”

루스벨라의 말에 데니스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시종일관 남들 앞에서는 여유롭더니, 정작 그녀가 정곡을 찌르는 말 한 번 했다고 벌을 받는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미움받는 걸 두려워하는지.’

그 모습을 바라보니 가슴팍의 어딘가가 욱신거렸다. 데니스가 숨기는 것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가 과거의 그녀의 모습과 겹쳐 보여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다릴게요.”

데니스가 고개를 들었다. 루스벨라는 그가 굉장히 불안해 보인다고 느꼈다. 그녀도 모르게 조심스레 뻗은 손이 흘러내리는 금빛 머리칼을 넘겼다. 데니스는 그녀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마다 불에 덴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그렇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페이를 닮은 이 사람을 믿고 싶었다. 루스벨라는 그만은 자신의 삶에서 계속 다정한 사람으로 남기를 바랐다.

***

루스벨라의 방은 곧바로 옮겨졌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시종들을 보니 후작의 명을 수행했던 건 실질적인 주인인 데니스가 없어 억지로 받든 일이라는 게 자명했다.

‘기어이 합방은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데니스는 끝끝내 그녀에게 그럴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대신 차선책으로 그녀를 그와 가장 가까운 방에 두기를 택했다.

[저에 대해 알고 싶은 것들이 많다면 방으로 찾아와 이야기를 나눠 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 정도만 해도 밖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부부로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할 여지를 줄 겁니다.]

그는 그녀가 합방을 들먹인 이유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루스벨라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루스벨라의 방은 후작 부인이 사용하는 방으로 배정되었다. 대신 데니스도 후작이 사용하던 방을 쓰게 되었다.

“그렇게나 이 방을 쓰시는 일을 미루시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 저러시는 걸까.”

지나가며 시종이나 시녀가 흘리는 말은 그가 실권을 잡았음에도 후작의 방을 기피했음을 알려 줬다. 루스벨라 또한 이 저택에서 그와 그의 아버지인 후작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선대 후작 부인은 방 안에 갇혀서 죽었다고 들었어.’

사인은 병사였지만 그 실체가 어떤지는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그때의 시종들이나 시녀들은 이미 데니스가 실권을 잡으며 죄 물갈이를 해서 없었다. 그러니 데니스와 데벤테르 후작만이 진실을 품고 있다.

‘뭐가 되었든 간에 후작이 아내를 죽게 만든 건 변하지 않아.’

그러니 데니스가 후작을 제 눈에 보이지 않는 별채 따위로 치운 게 틀림없었다. 그녀가 머무르는 본채에서는 후작의 발끝도 구경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아버지이나 원수에 가까운 인간을 계속 가까이에 살려 두고 있다는 건.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데, 방문이 똑똑 두드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루스벨라가 허락을 내리자 방 안으로 자그마한 체구의 시녀가 들어왔다. 주홍빛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아이였다.

“아, 안녕하세요. 작은 마님. 저, 저는 마님께 전해 달라는 것이 있어 오게 되었습니다.”

루스벨라는 어린 시녀 아이가 말을 더듬을 때부터 저번과 같은 용건임을 눈치챘다.

“후작님께서 내린 지시니?”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시녀 아이의 눈망울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죄, 죄송해요. 저, 저 같은 천한 것은 거부할 도리가 없어서…… 후작님께서 꼭 전하지 않는다면 화를 볼 거라고 그러셨어요…….”

별채에는 시종과 시녀의 출입이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혹시나 무슨 수를 꾸미지 못하도록 들어가는 시종들은 당번을 정해 시중을 들었다. 이 시녀는 불쌍하게도 후작의 히스테리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병환을 앓고 있다고 들었는데.’

와병 중임에도 대단한 성질머리였다. 하긴, 아들인 데니스가 없는 사이에 다시 집안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했으니 어련했을까.

“그게 오늘은 너였고.”

“네…….”

“그래. 후작님이 내게 뭐라고 하시던?”

예상되는 답은 뻔했다. 루스벨라는 고요히 가라앉은 낯으로 시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기…… 편지로 전해 달라 하셨어요.”

지척에 있으면서도 직접 오지 못하니 이런 술수를 쓴 것 같았다. 루스벨라는 그 편지지를 받아서 읽었다. 편지지는 만드는 데 사용된 종이의 질이 좋지 못했고, 어딘가 퀴퀴한 냄새마저 났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며느리가 되었다면 응당 시부인 나에게 인사를 와야 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예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면 내일 낮 세 시에 별채로 찾아와라.’

“저, 저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그, 그리고 제발 주인님께는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주홍빛 머리의 시녀는 잔뜩 굳어 벌벌 떨고 있었다. 이 일로 데니스에게 올라가면 큰일이 나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편지의 내용을 읽었구나.”

“죄송해요! 죄송해요…….”

시녀를 탓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데벤테르 후작 저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항시 돈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으니까. 모시는 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로운 것이 주변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살벌하네.’

노골적으로 그녀를 도발하려는 편지였다. 억지스럽기도 했다. 많이 당해 본 적이 있는 수법인지라 하품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미 발톱과 이빨이 전부 빠진 호랑이라고 해도 속에 독기에 찬 구렁이가 몇 마리일지 몰랐다.

‘이 아이가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지.’

애꿎은 이를 이런 알력 다툼에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고래 틈에서 새우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등이 터져야 하는가.

“됐으니 나가 보렴. 전하기만 한 네게 잘못은 없으니.”

“감사합니다……!”

황급히 문을 열고 가려는 시녀 아이를 루스벨라는 염려를 숨긴 경고를 날렸다.

“그러나 앞으로는 주의하는 게 좋겠구나. 함부로 귀족의 편지를 열어 보는 건 좋지 않아. 언젠가는 그 행동이 너를 더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어.”

시녀는 그 말에 조금 놀란 눈치로 우물쭈물하다 답했다.

“감사합니다…… 주의할게요.”

그리고 홀로 방에 남은 루스벨라는 편지지를 쥐고 고민했다.

‘이걸 어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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